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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으로 쏜 화살이 사람 배에 맞고 튕겨나가 부러질 확률은? 나는 초등학교 때 양궁을 해봐서 활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초등학생의 고사리 같은 팔로 쏜 화살도 사람이 맞으면 치명적이다. 게다가 석궁은 양궁과 달리 시위를 당기는 힘의 크기와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파괴력과 정확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석궁으로 쏜 화살이 배에 맞았다면 튕겨 나올 가능성은 0%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사람 배에 맞은 화살은 부러지면서 튕겨나갔고, 화살을 맞은 사람은 속옷과 겉 조끼에 피를 흘렸다. 그런데 속옷과 조끼 사이에 있던 와이셔츠에는 피가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실로, 슈퍼 울트라 맥시멈 삼투압 기술을 적용한 초기능성 와이셔츠라 할 만하다.

아, 그럼 그렇지, 영화 이야기다. 아니, 실화다! 실제 있었던 일을 영화로 만들었단다. 그냥 실화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재판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한 거란다. 무슨 SF 공상과학 영화냐고? 감독이 정지영이다. 그럴 리가.

영화를 보고난 뒤 '분노'하게 된 관객들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 아우라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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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전쟁>(1992)의 정지영 감독이 만든 <부러진 화살>(1월19일 개봉)은 몇 년 전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명호 교수의 이른바 '석궁재판'의 항소심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판사의 어이없는 재판 진행은 관객까지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현실의 김명호 교수는 영화 속에선 김경호(안성기분)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김경호 교수와 박준 변호사의 저항은 안타까움과 설움, 분노를 뒤섞은 묘한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은 "어떻게 이럴 수가! 정말 저런 일이 있었던 말이야?"를 연발하며 분노했다. 물론 관객들은 김명호 교수사건, 아니 '석궁테러'이라 이름 붙여진 사건을 처음 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전달된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거 참 별 꼴통 같은 교수도 다 있네, 감히 판사한테 석궁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대부분 언론이 던져주는대로, 사법부가 재판하는 프레임대로 생각했을 뿐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본 후 느껴진 당혹스러움은 지금까지 우리가 진실이라 믿었던 것이 허구였다는 '폭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재판, 또 한 명의 교수 재판과 너무 닮았다. 바로 강정구 교수 재판이다.

또 한 사람의 김명호, 강정구 교수

<부러진화살> 포스터
 <부러진화살> 포스터
ⓒ 아우라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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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만경대 방명록 사건'과 '한국전쟁은 통일을 목표로 했던 내전' 발언으로 유명한 그 교수다. 강정구 교수는 2001년 소위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후, 2005년 말 다시 기소되어 재판이 재개됐다. 

2001년 당시 언론은 소위 방명록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마치 오랫동안 대학교수로 암약한 간첩이라도 잡아낸 양 떠들었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별 것 아닌' 사건이었다. 강교수가 처음 사용한 만경대 정신이란 용어는 물론 사람마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만경대 정신=김일성 정신'으로 규정하고 총공세를 펼쳤다. 본인이 아무리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2005년은 대연정 선언 이후 위기에 몰린 노무현 정부에게 총공세를 펴던 보수세력이 '뉴라이트'라는 히트상품을 만들고 시민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여 나가고 있던 시기다. 그들은 때마침 '맥아더는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라 수많은 인명학살에 책임 있는 원수'라는 내용의 칼럼을 쓴 강정구 교수을 다시 표적 삼아 '반북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고, 이를 기반으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당시 분위기는 마녀사냥 그 자체였다. 논리적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일방적 공격과 강정구 교수를 옹호하면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광기의 백색테러, 그리고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재판이 뒤따랐다. 

판사와 싸우는 교수들

영화에서 김경호(김명호) 교수는 판사와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통상 매우 '전투적'인 피고라도 검사와는 다툴지언정 판사 앞에서는 한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판사 앞에서 할 말은 하고, 심지어는 판사를 고소까지 한다. 우리의 보편적 모습과는 어긋나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어긋남 때문에 관객은 희열을 느낀다. 마치 돈 뺏던 불량배를 대신 혼내주는 영웅의 등장을 보는 기분이랄까?

강정구 교수의 재판도 마찬가지였다. 김명호 교수처럼 강정구 교수 역시 변호사 선임의 기준은 '판·검사와 싸울 수 있는가'였고, 직접 자료를 준비하고 반론을 썼다. 김명호 교수 사건을 '사법부에 대한 테러'로 규정한 판사들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재판을 진행했듯, 강정구 교수 사건도 유사한 경로를 밟았다. 영화에서 문성근이 연기했던 부장판사의 모습은 강정구 교수 항소심을 진행한 부장판사의 판박이였다.

비상식적인 재판진행도 영화와 빼다 박았다. 보수단체와 보수언론의 공세 속에 서둘러 마무리된 1심 재판은 유죄로 마무리 되었으나 항소심에서는 불합리하고 무리한 기소의 문제점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이에 따라 항소심 판사 중 재판을 주재했던 부장판사만 유죄를 주장하고, 나머지 배석 판사들은 모두 무죄를 주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항소심 선고가 예정된 당일, 갑자기 판사들이 교체됐다. 강력히 유죄를 주장하고 있다던 부장판사만 제외하고.

유난히 권위적이었던 부장판사를 주축으로 새롭게 구성된 재판부는 조속한 재판 종결이 필요하다며 심리 일정을 밀어 붙였고 2007년 4월, 일방적인 재판종료를 선언했다. 영화에서처럼 판사에게 항의하던 86세의 한 노인은 유치장으로 보내졌다. 강정구 교수는 김명호 교수처럼 재판부 기피신청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검찰의 구형이 있기 직전, 또 한 번 알 수 없는 이유로 주심판사가 교체되었고 결국 뻔 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렇듯 영화에서 다뤄진 김명호 교수 사건은 그리 독특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강정구 교수 재판을 비롯해 사람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몰상식한 재판 중 단지 하나였을 뿐이다.

사법성역의 냉정한 현실

<부러진화살> 마지막 장면은 유쾌하다.
 <부러진화살> 마지막 장면은 유쾌하다.
ⓒ 아우라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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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하버마스는 헌법을 통해 조직된 정치체계와 법은 '사회적 통합이 이룩되지 않을 때를 대비하는 일종의 안전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자기결정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통해 만들어진 법이 사회적 갈등에 대해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가 '공정한 사회적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답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김명호나 강정구는 모두 대학교수였다. 빈틈 많은 검사의 논리나 재판부의 일방적인 공판진행을 그냥 묵과하지 않을 정도의 치밀한 논리력을 갖춘 이들이란 의미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사법부의 일방적 판결을 제지할 수 없었다. 하물며 보통 사람은 어떻겠는가?

사법부가 작심하면 대학교수일지라도, 억울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배에 맞은 화살이 튕겨져 나왔다고 하는데도, "내가 한 말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라고 항변해도 판사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재판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이들이라면, 한국에서 판사는 그 자체로 '권력'이라는 사실을 의심조차 할 수 있을까?

한미FTA 등 사회문제에 대해 개인적 의견을 밝힌 몇몇 판사에게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한다'든가 '정치 판사'라고 비난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막상 이들은 촛불시위 관련 재판에 노골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개입했던 판사를 버젓이 대법관으로 임명한 이들이다. 사법부를 이용하려는 권력이 있고, 그 권력에 흔쾌히 부합하는 '일부' 판사들이 존재하는 한, 사법부의 치부를 드러내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재판이 '공명정대'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는 것은 김명호 교수의 억울함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본 사법성역의 냉정한 현실이다.

부러진 화살, 흥행할 수 있을까?

영화는 김명호 교수 사건을 통해 사법부의 위선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기 때문에 비슷하게 억울한 사연이 있는 이들에게 큰 공감대를 얻을 만하다. 그럼에도 영화의 흥행은 장담하기 어렵다. 정지영 감독의 매끄러운 연출과 배우 안성기의 안정되고 진실된 연기에도 불구하고, 박준 변호사를 연기한 박원상의 애절함과 기자를 연기한 김지호에 대한 심리적 공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고리타분할 수도 있는 사회비판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흥행을 기대해보는 이유는, 이 지긋지긋한 몰상식과 권력의 횡포, 억울함이 깨끗하게 해소되었으면 하는 2012년이기 때문이다. 상식이 위선을 이겼으면, 거짓이 패배하는 모습을 꼭 보았으면 하는, 상식을 지키는 일이 더 이상 '꼴통'이 되는 것이 아닌 세상에서 살고 싶은 2012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리고 우리가 김명호 교수 사건이나 강정구 교수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보였던 냉소와 비난들, 그 위선의 공범이 되었던 과거를 반성해 보기 위해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 교수도 아니고 전문지식도 없어 저항도 못하고 무전유죄의 억울함을 감내하고 있을 이름 없는 이들에게 공감이라도 해보기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한 포털사이트에는 이 영화의 '관람전 기대지수'가 10점 만점에 9.7점을 기록했다. 1월 19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부러진 화살'이 위선과 몰상식을 관통하기를 기대한다. 올해는 무엇이든 바꾸고 싶은 2012년이니까.


태그:#부러진 화살, #김명호, #강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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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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