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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본 곳인데 아주 낯익은 곳처럼 느껴진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예전부터 알던 사람같이 느껴진다.

처음 접하는 사건인데 과거에 경험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데자뷰(deja vu) 현상(기시감)'이 무엇인지, 아마 잘 설명할 수 있을 터. 최초의 경험임에도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데자뷰(deja vu)'라고 한다. 1900년 프랑스 의학자 플로랑스 아르노가 처음 규정한 '데자뷰 현상'은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토니 스콧(Tony Scott) 감독에 의해 선보여진 <데자뷰>란 영화에서도 한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수사관과 피해자, 그리고 범죄행위와 장소들 간에 나타난 '데자뷰 현상'을 잘 묘사해 주었다. 영화의 주인공 더그 칼린 수사관이 시공의 물리적 개념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든지, 범행의 피해자인 한 여인을 과거로 돌아간 시점에서 강렬하게 인지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데자뷰 현상'에서 기인한다.

 

인류의 오랜 미스테리 중 하나인 '데자뷰'를 잘 묘사해 주는 영화는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겪는 '데자뷰 현상'이 '만약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면 어떨까?', 또는 '만약 과거로부터 온 어떤 경고라면 어떨까?'란 의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우연한 사건이 과거로부터의 경고라면 끔찍하다. 이런 경우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을 것이다. 그런데 '데자뷰 현상'이 지금 우리 정치권을 맴도는 듯하다. 최근 한나라당에 초강력 악재로 부상한 '돈 봉투 사건'은 과거 '차떼기 사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 사건들에서 플로랑스 아르노가 규정한 '데자뷰'가 엿보인다.  

 

[데자뷰 #1] '차떼기', '공천헌금'때도 "부패척결" 강조, 수사 의뢰하더니

 

2003년 12월. 한나라당은 '차떼기 사건'으로 존폐위기 상황을 맞는다. 제17대 총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이다.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측근을 통해 대기업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트럭째 받은 사건이 들통났기 때문. 검찰은 9개월 동안의 수사를 통해 한나라당이 대선 당시 일부 대기업들로부터 823억 원에 이르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법이 가관이었다. 50억 원씩, 또는 150억 원씩 실은 2톤 트럭을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지하 주차장 등에서 통 크게, 통째로 넘긴 사건이다. 정치자금은 사과박스 등으로 받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박스 떼기'로 불렸지만, 트럭째 받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차떼기', 또는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이 한나라당에 붙여졌다. 이후 '차떼기'는 한나라당의 부패 이미지를 상징하는 별칭이 되었다. 민심이 한나라당에 등을 돌린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한나라당 내부 상황을 복기해 보면 최근 빚어진 한나라당 '돈 봉투 사건'과 흡사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최병렬 당시 대표는 대대적인 인적 쇄신을 위해 자신과 가까운 의원을 공천심사위원장에 기용하지만 대표 자신도 인적 쇄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여론조사에서 30%대에 이르던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차떼기'라는 용어 등장 이후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

 

바로 그때 박근혜 현 비상대책위원장(비대위원장)이 당 전면에 등장한다. 그해 3월 24일 당 대표로 취임한다. 4·15총선을 불과 20여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대선자금 수사로 밝혀진 '차떼기 당'이란 오명과 함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강행 처리에 대한 급속한 여론 악화 등으로 인해 거의 와해되는 분위기였다.

 

취임 일성을 "부패척결"로 시작한 당시 박 대표는 "검찰에 기소되면 당원권을 정지시키고 유죄가 확정되면 영구 제명 조치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총선 결과,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게 패하고 만다. 그러더니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은 또 다시 대형 악재를 만났다. 뼈아픈 '차떼기' 악몽이 되살아났다. 공천헌금 파문으로 당이 흔들렸다.

 

5선의 김덕룡 의원과 재선의 박성범 의원이 각각 서울 서초구청과 중구청장 공천 대가로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각각 4억여 원과 21만 달러를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 된데다 한 달 뒤 고조흥 의원이 3억 원의 공천헌금을 받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돼 휘청거렸다. 5·31 지방선거를 불과 40여일 남겨놓은 시점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 오명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공천비리 의혹을 검찰에 수사 의뢰한다. 박근혜 대표체제 하에서였다.

 

[데자뷰 #2] '돈 봉투' 폭로, 반나절 만에 수사 의뢰..."의혹 털고 가야?"

 

6년의 세월이 흐른 2012년 1월. 한나라당발 대형 '돈 봉투' 사건이 터졌다. 새해 신년사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은 "한나라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이계 당대표 후보로부터 300만 원이 든 봉투를 받았으나 곧 돌려줬다"고 폭로했다.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패배와 디도스 사건 등으로 당 내부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대대적인 쇄신을 기치로 내걸며 박근혜 비대위원장 체제로 돌입한지 1개월도 채 안된 시점이다.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겹친 '정치의 해'다. 그래서 한나라당도 비대위윈장 체제로 실추된 당 이미지를 되찾고 변화와 개혁을 추진해 나간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으나, '돈 봉투'가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한나라당은 5일 곧바로 검찰 수사 의뢰를 결정하고, 반나절 만에 수사 의뢰를 완료했다. 박 비대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비공개 회의에서 "국민 사이에서 의혹이 확산되기 전에 신속하게 진실을 밝혀 의혹을 털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 의혹이 확산되는 것을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6년 전과 흡사하다.

 

2004년 대표 취임일성으로 강조한 '부패 척결'과 그 이듬해 검찰 기소 후보들의 당원권 정지, 2006년 공천헌금 수사 의뢰 당시에도 그는 당의 최고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검찰 수사 의뢰로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것은 왠지 정략적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트럭째 돈을 받은 '차떼기' 수법을 절로 떠오르게 한 사건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한미FTA 날치기 통과에 이어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으로 민심의 흐름이 한나라당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다시 "한나라당에 돈 선거의 망령이 부활한다"는 여론의 흐름은 한나라당 텃밭에까지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신년을 맞아 각 지역 언론사들이 총선과 대선의 민심풍향을 좇는 여론조사에서 PK와 TK지역 모두에서 한나라당 일색인 현역의원 물갈이 의견이 응답자의 절반 이상씩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고승덕 의원이 8일 검찰 조사에서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의 당사자로 박희태 국회의장 측을 지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지역 민심이 더욱 요동치고 있다. 정치권에도 거센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박 의장이 지난 2008년 7월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18대 국회 첫 한나라당 대표인데다, 현재 영남출신 입법부 수장으로서의 정치적 상징성 때문이다.

 

박 비대위원장에게 넘겨진 '돈 봉투 사건'이 어떻게 처리될지 궁금하다. '데자뷰 현상' 대로라면 한나라당은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당분간 '차떼기 당'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이미 경험해 본, 또는 낯익은 처방 때문이리라. 한나라당의 텃밭에서조차 그런 분위기가 감지된다.

 

[부산·경남] "돈 봉투 사건 터지면서 '카운터펀치' ...재창당 불가피"

 

"4·11 총선을 3개월 앞둔 한나라당이 '패닉'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차떼기 당'이란 오명을 아직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이 터져 나오면서 '카운터펀치'를 맞았다. 고승덕 의원의 폭로는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혐오증'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된 형국이다. 당 일각에서는 '재창당'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다."

 

<국제신문>은 7일 PK지역 민심을 이렇게 대변했다. 신문은 이날 '여, 총선 앞 대형악재에 망연자실… 당 일부 "재창당 불가피"'란 제목의 기사에서 '돈 봉투' 사건은 '차떼기 당' 오명을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며 '재창당'을 주문하며 "지역구에서 선거를 준비 중인 의원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이어 "의원들은 '총선을 앞두고 열심히 지역을 돌아다니면 뭐하냐. 이런 것 한 방에 다 날아간다'고 불만을 토로했다"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자기만 살려고 당을 죽여놓은 것 아니냐'는 원망이 쏟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희태 양산 불출마 사실상 공식화'란 제목도 눈에 띈다. "박 의장이 7일 자신의 지역구에서 사실상 총선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고 기사는 전했다.

 

<경남도민일보>는 6일 한나라당이 자초한 악재 한 가지를 더 내세워 민심이 싸늘하게 돌아선 이유를 피력했다. '미디어렙법·KBS수신료 인상 한나라당 날치기 처리'란 제목에서 잘 읽힌다.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처리한 미디어렙법과 KBS수신료 인상안은 대다수 민심과 동떨어진 것임을 강조한 기사다.

 

 

그런가하면 <부산일보>는 '정수장학회 환원' 문제를 놓고 노·사가 팽팽한 대립을 빚고 있다. 8일 낮 12시 서울 중구 정동 정수장학회 사무실이 있는 경향신문사 빌딩 앞에서 신문사 노조는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과 부산일보 편집권 독립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을 압박했다. 전국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 조합원들은 9일부터 서울 정동 정수장학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는 등 투쟁을 확대하고 있다.

 

신문은 앞선 지난 7일 ''4월 부산' 벌써부터 후끈'이란 제목의 머리기사를 통해 "4월 총선을 앞두고 부산이 벌써 달아오르고 있다"며 "야권이 이른바 '문(문재인)·성(문성근)·길(김정길)'을 앞세워 낙동강 벨트를 중심으로 '부산 공세'를 강화하자 여권이 야당 깎아내리기에 들어가는 등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고 전하면서 사설에서는 한나라당의 잇단 자충수를 경고했다.

 

''디도스 사건', "윗선 없다"는 찜찜한 수사 결론'이란 제목의 사설은 "검찰 수사 결과는 국민들이 품고 있는 의문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미흡한 수준"이라며 "이상득 의원 보좌관 금품 수수, 디도스 사건,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전 정책보좌관까지 검찰 수사가 '몸통'으로 진척되지 않은 상황을 꼬집어 국민은 이 정부를 '보좌관 정권'이라고 조롱하고 있다"고 한 야당의원 말을 인용해 강조했다.

 

한편, <국제신문>과 부산MBC가 공동으로 실시한 신년 여론조사 결과, 이 지역에선 '현 지역구 의원이 다음 총선에 재선출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21.9%에 불과한 반면 '다른 인물 선출'을 꼽은 주민이 70.0%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대구·경북] "'한나라당=돈당' 꼬리표, 정당사 더럽히는 부끄러운 역사"

 

 

디도스 사건과 이상득 의원 등 대통령 측근 친인척 비리사건 등으로 가뜩이나 심난해진 TK민심도 '돈 봉투'사건으로 더욱 복잡하게 꼬여만 가고 있다. 지역 유력일간지인 <매일신문>과 <영남일보>가 연달아 사설에서 충고와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영남일보>는 '일당 독점 정치구도론 민의 반영 못한다'를 6일 사설 제목으로 뽑았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로만 보면 야권 인사의 당선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며 "대구·경북의 경우 제1 야당인 민주통합당의 지지도가 5%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운을 뗀 사설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설은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다원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차제에 대구·경북도 정치인들의 경쟁구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설은 더 나아가 "'대구·경북은 여당의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말은 곱씹어보면 매우 치욕적"이라고 자괴한다. <영남일보>가 신년을 맞아 TBC대구방송과 공동으로 실시한 대구·경북민 여론조사 결과, 지역민의 60.4%가 '현역 국회의원을 교체해야 한다'고 응답한 바 있다.

 

<매일신문>도 화가 단단히 났다. 6일과 7일 사설에서 강한 톤으로 쏘아붙였다. 신문은 6일 '한나라당은 돈 봉투 뿌리 캐고, 돈 선거 혁신하라'란 제목의 사설에서 "보통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되는 데는 수십 억 원이 든다는 말이 있다"며 "오죽했으면 '전(錢)당대회'로 불렸을까"라고 핀잔을 던졌다.

 

이어 사설은 "비리와 부패의 씨앗을 없애야 할 사람이 오히려 뿌리는 꼴"이라고 지적한 뒤"'한나라당=돈당'의 꼬리표는 우리 정당사를 더럽히는 부끄러운 역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다음날인 7일에도 '정권 실세 '최시중 의혹' 철저히 파헤쳐야'란 제목의 사설에서 MB의 멘토로 알려져 왔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을 겨냥했다.

 

사설은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최측근인 정용욱 전 방통위 정책보좌관이 김학인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이사장으로부터 수억 원대의 뇌물을 받은 정황이 포착돼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며 "정씨는 최 위원장의 '양아들'로 불리며 최 위원장이 직제에도 없는 정책보좌관 자리를 만들어 데리고 갈 정도로 각별히 챙긴 인물"이라고 규정한 뒤 검찰을 나무랐다.

 

"6일 디도스 사건 수사 발표에서 검찰은 사전 공모는 밝혔지만 윗선이나 배후는 없는 것으로 정리했다. 국민들을 납득시키지 못해 특검이 가동되어야 할 상황이다. 또 정권의 다른 실세로 알선 수재 혐의로 기소된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의 항소심 재판에서 형량이 줄어들었지만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봐주기 논란도 초래하고 있다."

 

사설은 더욱 강한 어조로 "정권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을 수사할 때마다 진상을 속 시원히 드러내지 못해 '정치 검찰'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하는 현실을 되새겨야 한다"며 "'최시중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가 미진하다면 검찰의 좁은 입지는 더 좁아지고 검찰 개혁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처럼 한나라당이 자초한 잇단 악재들이 텃밭 민심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악재들 중 상당수는 그 뿌리를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 디도스 특검, 돈 봉투 수사 확대, 거기에다 끝나지 않은 MB 측근 및 친인척 비리수사 확대,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를 BBK 등 변수가 산재해 있다. 그 변수들이 총선과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데자뷰'는 그 답을 알고 있을까.


태그:#돈 봉투, #차떼기, #데자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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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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