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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희로애락'
 작품 '희로애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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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 그림은 색채가 화려하지요?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감성적으로 표현해 본 그림입니다. 어떠세요? 혹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으셨나요?"

지난 17일, 화실로 들어가려다 화실 앞 벽면에 걸려 있는 매우 역동적인 느낌이 드는 그림을 발견하고 그림에 대해 묻자 문병금 화백이 설명을 해준다. 그림 속에는 매우 다양한 형상들이 불규칙하지만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 음표와 쉼표, 그리고 날거나 뛰어오르고 기는 모습의 사람과 동물형상들, 조금은 난해했지만 그림을 들여다볼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성이 조금씩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비구상 미술의 특징인 작가의 직관과 상상력이 자유롭게 표현된 작품이었다. 음악과 생물학적 형태의 인간, 그리고 동물형상을 단편적이지만 유기적으로 배열하여 연상시킨다. 하나하나의 단순한 이미지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생명력 있는 리듬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비구상 추상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세계

화실 안에는 온갖 그림도구들과 물감들. 그리고 완성된 작품들과 함께 아직은 미완성으로 화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작품들이 몇 점 놓여 있다. 그런데 벽면 눈높이 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서 나와 눈동자가 마주친 무엇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그림이었다. 뭘까?

마음심 (心)자를 형상화한 작품
 마음심 (心)자를 형상화한 작품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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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비구상작품들이어서 자세히 살펴봐야 어렴풋이 어떤 형상과 이미지를 잡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내 눈동자와 언뜻 마주친 그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림 속 두 개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눈동자가 아니다. 한문자인 마음 심(心)자 중에 두 개의 점 속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었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림 속에 한문자인 '마음 심' 자를 형상화하고 그 글자의 점 속에 두 개의 눈동자를 그려 넣어 속마음을 표현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서양화 비구상계열은 대학에서 전공한 화가들도 만만하게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림에 소질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제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보면 몰두하게 되고 창작열과 함께 어떤 감성에 빠져들 때가 더러 있긴 합니다."

이미 완성되었던 작품을 수정하고 있는 모습
 이미 완성되었던 작품을 수정하고 있는 모습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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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화백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나이 50을 넘긴 10년 전이라고 한다.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을 때였는데 문화센터에서 취미로 시작한 미술이었다.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 시간도 보낼 겸 자기성취도 기대하며 배우는 그런 곳이다. 이런 곳에서는 대개 산수화나 정물화 같은 구상계열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취미 삼아 시작한 미술공부였지만 과감하게 뛰어든 비구상서양화

그런데 문 화백은 조금 달랐다. 그가 선택한 것은 놀랍게도 직관과 상상력을 필수요건으로 하는 비구상서양화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취미 삼아 시작한 미술이었지만 아무나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비구상서양화를 선택한 것은 자신도 확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던 어떤 잠재의식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그림솜씨는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동료들에게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각종 공모전에도 권유를 받아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수상경력은 경기도 미술대전에서 특선 8회, 교원미술대전과 환경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환경미술협회에서는 초대작가로 초청되고 있다.

프링스 파리 아트컬렉션 평론가상 금상 수상작품
 프링스 파리 아트컬렉션 평론가상 금상 수상작품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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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난해 큰맘 먹고 출품한 중앙무대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미술계의 현주소가 유명대학에서 전공하지 않은, 소위 학맥이 없는 화가가 뛰어 넘기에는 너무나 벽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를 이해해주고 지원해주는 남편과 주변 사람들이 큰 힘이 되었고, 스스로의 작품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열정과 자신감이 작은 결실을 보게 된 것은 금년 1월이었다. 그를 아끼던 지인의 소개로 비구상서양미술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파리 아트컬렉션'에 그림 한 점을 출품했는데 '평론가 상' '금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그림은 전에 그려놓았던 완성 작품인데 요즘 다시 손을 보고 있습니다."

서양화는 한국화와는 달리 물감을 몇 번이고 덧칠하여 그리기 때문에 본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언뜻 보기엔 한국화처럼 보이는 노송과 노부부가 주제인 그림이었지만 그림의 질감이 전혀 달랐다.

작업실 내부 모습
 작업실 내부 모습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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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소나무는 붉은 줄기와 푸른 잎이 무성한 한국화의 소나무와는 분명이 달랐다. 노부부의 모습도 담배를 물고 있는 할아버지가 역시 담배를 손에든 할머니에게 불을 붙여주기 위한 자세였지만 성냥이나 라이터는 보이지 않고 바람을 가린 손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뭐랄까? 한국화적인 요소와 사양화의 구상화법과 비구상화법을 절묘하게 배합한 아주 특별한 그림이었다. 자연과 사람이라는 실체와 추상적인 이미지, 그리고 작가의 내적 관념 속에서 생성된 이미지를 절묘하고 조화롭게 표현한 것이다.

미술계의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서산지역 겨울여행 중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찾게 된 문병금(60) 화백의 작업실은 추위 속에서도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문 화백은 남편이 직장생활을 정년퇴임한 이후 귀향을 준비하다가 지난봄에 이곳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영탑리 산자락에 아늑한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수정작업을 하고 있는 작품 앞에서, 작가 문병금씨
 수정작업을 하고 있는 작품 앞에서, 작가 문병금씨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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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림을 처음 시작하고, 친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안산을 떠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도시와는 달리 조용하고 자연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라 제 작품 활동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늘그막에 시작하여 회갑이 지난 나이에도 좋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예술혼과 창작열을 가진 문병금 화백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비록 대학에서 전공하지 못하고 뒤늦게 뛰어든 미술, 그의 그림과 존재가 비구상서양화 미술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갈지 기대가 된다.


태그:#문병금 화백, #비구상작가, #서산, #희로애락,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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