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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책표지.
 <지금은 없는 이야기> 책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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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명제나 인간 행동의 원칙을 예시하는 짧은 이야기'를 일컬어 우화라 부른다. 쉽게 말해 우화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다. 이솝우화 중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교훈을, '여우와 두루미'는 상대방을 배려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우화가 있고, 각자 나름의 교훈을 전달한다. 그러나 수많은 우화를 묶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개인의 성품이나 태도만을 문제 삼을 뿐, 개인을 둘러싼 세상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우화들은 사회에 대해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쓸데없는 불평불만 하지 말고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다그친다.

최근의 자기계발용 우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심지어 고통까지 웃으면서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두 힘을 합쳐 연대해야 한다는 내용의 좌파적 우화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최규석의 우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알던 우화와는 다르다. 그는 기존의 우화가 유통해온 굳건한 믿음 체계, 세상과 타인은 죄가 없고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그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수천 년 된 생각에 도전한다. 그래서 최규석의 우화는 일종의 반우화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다.

모든 일을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마을

<지금은 없는 이야기>에 수록된 우화 중 '가위바위보'는 강자의 논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모든 일을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마을 일을 하다가 손을 다쳐 주먹을 펼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주먹밖에 낼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는 곧 마을의 힘든 일을 도맡으면서도 가장 나쁜 집과 안 좋은 음식만을 가지게 된다. 그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마을 대표를 찾아가 가위바위보를 왼손으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마을 대표는 우리의 규칙은 신성한 것이며 신성한 일은 오른손으로 해야 한다며 거절한다.

"그렇지만 전에도 가끔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없었잖아요?"
"그때는 우리가 이 규칙의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지. 이제라도 반성하고 철저히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게 하필 왜 지금부터인가요? 저를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부려먹으려는 것 아닌가요?"
"규칙을 철저히 지키자는 말에 때가 따로 있나? 규칙이란 언제 어디서나 지켜져야 하니까 규칙인 거야!"

그렇지만 그는 '마을 일을 하다 다친 건데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마을 대표는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희망에 부풀어 그 방법이 뭐냐고 묻는 그에게 마을 대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이 규칙을 걸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거지. 우리 모두를 이기면 자네 맘대로 규칙을 바꾸는 거야."

마을 대표의 말은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약자를 부당하게 괴롭힌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강자의 논리다. 손을 다친 이가 규칙 때문에 계속 가위바위보에서 질 수밖에 없다면, 규칙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 대표는 규칙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규칙은 신성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약자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 '가위바위보'는 겉보기에는 그럴싸한 논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는지, 그럴싸한 논리 뒤에 어떠한 탐욕이 숨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보들아, 뜨거운 건 그냥 뜨거운 거야!"

세상이 부조리한 것은 강자의 말장난 때문만은 아니다. 약자 자신이 강자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냄비 속의 개구리'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물이 가득한 냄비 속에 개구리 몇 마리가 살고 있다. 예민한 개구리는 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지만, 자신만만한 개구리는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면 된다고 그의 말을 일축한다. 예민한 개구리는 계속 뜨거워지는데 적응할 수는 없다고 반박하지만, 자신만만한 개구리는 다른 냄비를 본 적이 있느냐며 여기만이 우리의 세계라고 말한다.

"이 냄비가 우리의 유일한 세계야. 다른 냄비 같은 건 없다구. 설사 다른 냄비가 있다 하더라도 그곳이 여기보다 나을 거란 보장이 있나? 어디에도 문제없는 세상 따윈 없어. 거기도 여기처럼 뜨겁거나, 아니면 그곳만의 다른 문제가 있겠지. 그리고 겨우 물이 좀 따뜻한 것 때문에 못살겠다는 네가 다른 세상이라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처럼 환경 탓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녀석은 그곳에서도 물이 뜨겁네 차네 불평만 늘어놓을 걸? 난 여기가 좋아. 아주 편안하다구."

이윽고 물이 점점 뜨거워져 개구리들은 고통스러워하지만, 자신만만한 개구리만은 편안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다른 개구리들이 어떻게 그렇게 편안할 수 있는지 묻자 자신만만한 개구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요 근래에는 나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로 괴롭긴 했어. 하지만 나는 곧 이것이 단순한 고통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이 고통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서 나는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되었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만하며 살았는지 반성하게 해서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지. 또한 이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자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무한한 용기가 샘솟아 더 이상 무엇도 괴롭거나 두렵지 않게 되었지. 이 고통은 아마도 내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일 거야."

마치 자기계발서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말에 다른 개구리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예민한 개구리만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냄비를 뛰쳐나가며 소리친다.

"바보들아, 뜨거운 건 그냥 뜨거운 거야.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 뿐이라고!"

자기계발용 우화 : 솔개 이야기

최근에 나온 자기계발서는 우화를 활용해 교훈을 설파한다. 자기계발용 우화의 정점에 선 것이 솔개 이야기다. 그 우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솔개는 약 40살이 되었을 때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발톱이 노화해 사냥감을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되고,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된다.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 또한 무거워진다.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게 된 솔개는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산 정상부근으로 날아올라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깨뜨린다. 깨진 자리에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고, 이제 새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해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교훈은 지극히 간단하다. 부단한 노력으로 자기 혁신을 해야 한다는 것. 좌파 솔개였다면 40세 이상의 노인 솔개를 위한 복지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겠지만, 무릇 훌륭한 솔개라면 사회 탓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피나는 자기 혁신에 성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용 우화의 선두에 서 있던 이 이야기는 거짓이다. 부리가 다시 난다는 것은 생명체에 없는 일이며, 설령 가능하다 해도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기 때문에 부리가 나기 전에 죽을 것이다. 이처럼 솔개의 생태와는 거리가 먼 우화까지 유통하면서 교훈을 전파하려는 의도는 참으로 불순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의 우화에 맞서야 한다. 우화의 교훈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손을 다친 이는 가위바위보에서 계속 질 수밖에 없고, 죽을 때까지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고통이 '내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일 거라고 생각하는 한 냄비 속의 개구리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이제 "뜨거운 건 그냥 뜨거운 거야"라고 말할 차례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야기다. 누군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까지 만들며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달려있다는 교훈을 전파했듯이, 우리는 반대편의 이야기를 통해 잘못된 세상을 고발하고 여기 맞서 싸우라는 교훈을 전달해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이야기에는 이야기다.

그래서 최규석의 우화는 빛을 발한다. 그의 우화는 강자의 논리가 갖는 기만성과 약자들의 연대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이제까지의 우화가 보여주지 않은 세상의 단면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의 우화는 '지금은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단면은 의도적으로 은폐되었지만 오랫동안 수도 없이 반복되어 온 세상의 일부라는 면에서 그의 우화는 '지금도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아져야만 하는 이야기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최규석 지음, 사계절(2011)


태그:#최규석,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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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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