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몇 년 전에 공주 '우금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의 청탁을 받고 동학관련 장막희곡을 집필한 적이 있다. 난생 처음 청탁 받은 희곡이고, 또 난생 처음 고료를 선불로 받고 집필을 한 작품이다. 문예진흥원 지원 사업을 시행하면서 제출해야 할 오리지널 희곡작품이 필요하여 내게 긴급하게 청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동학농민혁명군의 '우금티전투'를 배경으로 작품구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이 기본 배경을 이루는 내용이면 되리라는 생각으로 태안의 백화산과 교장바위를 중심 소재로 삼아 3막 12장의 희곡작품을 만들었다.

'우금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가 무대공연을 전제로 내게 희곡 청탁을 한 것도 아니려니와, 우금티가 아닌 태안 백화산의 '교장바위'에 관한 이야기여서 나 역시 그쪽에서 무대에 올리기는 어려우리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우금티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의 긴급 청탁에 따라 집필했던 내 희곡 <저 바위에는 꽃이 피네>는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고료 수령과 상관없이 미발표작인 셈이다.

요즘 나는 <소설충청> 제19호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 '충남소설가협회'에서 1993년부터 해마다 한 번씩 작품집을 발간하는데 올해가 열아홉번째이고, 나는 20년 가까이 키잡이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올해는 내게 신작 소설을 쓸 여유도 없었고, 발표할 만한 재고 작품도 없어서 몇 년 전에 만들었던 장막희곡 <저 바위에는 꽃이 피네>를 발표하기로 했다.   

장막희곡 <저 바위에는 꽃이 피네>의 시대적 배경은 1895년 2월 태안 동학농민혁명 진압 시기, 1920년대 말 일제시대, 그리고 2000년 이후의 오늘이다. 그러니까 현대와 일제 때와 동학농민혁명 시기가 번갈아 교차된다. 장소는 태안읍과 백화산이다. 등장인물들은 남녀 대학생, 현 시대 태안읍 주민들, 일본인 관광객들, 일제 때의 일본인 상점주인, 일본인 소학교 교장, 소학교 학동들, 주재소장과 순사들, 경찰서장, 학부모들,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동학교도들, 일본군 중대장 산촌(山村) 대위와 병사들이다.

<소설충청> 제19호 편집 작업을 하면서 실로 몇 년 만에 내 희곡작품 <저 바위에는 꽃이 피네>를 읽어보았다. 내 작품에 대해 본인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쑥스럽지만, 일단은 재미가 확보되어 있지 싶다. 또 주제가 명확하다. 동학농민혁명 때 처음 이름이 생겨난 '교장(絞杖)바위'가 일제 때 '교장(校長)바위'로 바뀌는 과정이 면밀하게 그려져 있다. 교장바위의 원 이름, 진짜 이름이 '絞杖바위'임을 강렬하게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문헌들의 어디에도 '絞杖바위'가 적시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絞杖바위'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개연성은 동학농민혁명 사실 자체에 명확히 농축되어 있다. 또 일제 때 생겨난 '校長바위'도 그것을 증명할 만한 기록이 없다. 오로지 미담 구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絞杖'이냐, '校長'이냐의 판단 여부는 전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기본적 자세, 그 '눈'과 '가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바로 옆에 '피체지 표석'을 건립하고, 10월 29일 추모제 때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위 사진은 피체지 표석 건립공사 후 제를 지내고 나서 찍은 사진이다. 1895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기록된 관군 순무영 보고서 안에서 태안 백화산에서 동학농민군 다수가 체포된 사실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피체지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
▲ 피체지 표석 건립 충남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바로 옆에 '피체지 표석'을 건립하고, 10월 29일 추모제 때 제막식 행사를 가졌다. 위 사진은 피체지 표석 건립공사 후 제를 지내고 나서 찍은 사진이다. 1895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기록된 관군 순무영 보고서 안에서 태안 백화산에서 동학농민군 다수가 체포된 사실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피체지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
ⓒ 문영식

관련사진보기


지난 10월 29일 오전 백화산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앞에서 거행된 '동학농민혁명 117주년 기념 제21회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군 추모제'에서는 또 한 가지 뜻 깊은 행사가 있었다. 태안 백화산이 북접(北接) 동학농민혁명군의 최후 주둔지였고, 마지막까지 항전한 동학농민군 다수가 체포된 곳임을 알리는 피체지 표석을 세우고 제막식 행사를 가진 것이다. 그 행사와 피체지 표석을 보면서 필자는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구술로 전해져 온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백화산의 비극은 관군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가 정리한 '순무사정보첩'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유규희, 최성서, 최성일, 안순칠, 피만석 등을 체포하여 압송해 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최근에 발견함으로써 '내포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 '동학농민혁명 태안기념사업회'가 발 빠르게 피체지 표석을 세우게 된 것이다.

비극의 기록물이면서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그 표석을 보며 일말의 우려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명확한 사실의 기록물인 그 피체지 표석이 또 다른 시비나 논란을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관군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의 기록(순무영에 올린 보고서)에는 동학농민군 백화산 체포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교장바위에서의 살상 행위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순무영의 기록에는 백화산 동학군 체포 사실 외의 다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역사를 보고 판단할 때 오로지 기록에만 의존하고 기록만이 전부인 줄로 아는 사람들에게는 호재(好材)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이기도 한 역사는 기록상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무릇 사실들을 문자 기록이 전부 담을 수는 없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군료가 사실 모두를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을 하고 가감을 하기 마련인데, 자신들의 잔혹한 살상 행위까지 그대로 기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각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패주하여 백화산에 마지막 진을 친 동학농민군은 죽을 각오로 일본군과 관군을 맞았을 것이고, 순순히 체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각지의 전투에서 피아간의 숱한 살상으로 눈이 뒤집힌 일본군과 관군이 아무런 살상행위 없이 동학군을 오로지 체포만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사실을 오늘의 수많은 유족들이 증명하고, 일제 때까지 제사도 몰래 지내야 했으리만큼 공포분위가가 지배했던 사실이 동학농민군 진압 당시의 잔혹상을 증명하지 않는가.

백화산 교장바위에서의 잔혹한 살해 행위는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문자 기록 밖으로 번져나는 여러 가지 개연성을 놓고 볼 때 분명한 사실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絞杖바위'의 신빙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에 관한 역사 추리와 합리적 상상을 내 장막희곡 <저 바위에는 꽃이 피네>가 명확하고 절절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교장바위의 '絞杖'을 한사코 부정하고 '校長'을 고집하는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동학농민혁명,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