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돼지의 왕>

▲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11월 3일, 전국 25개 상영관으로 출발한 <돼지의 왕>은 개봉 2주 만에 1만 관객을 돌파했다. 1만 명이 넘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상영관과 회차가 늘어날 것을 기대했지만 비슷한 규모의 영화들이 나오면서 회차가 조금씩 줄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조영각PD는 "점유율이 떨어지지 않고, 예매율도 상영관 100개 짜리 영화와 비슷하다"며 "내년 초까지는 상영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 하는 것"이라는 수백억 원짜리 영화의 뻑적지근한 훈계형 어록 따위를 빌리지 않아도, 1억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하는 영화가 있다.

모두가 투자를 꺼렸던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1억 4900만원으로 1년 만에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이 가능함을 보여줬다. 이미 개봉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최초로 3관왕 수상을 하며 존재를 알렸고, 올해 독립영화계 최단 기간 1만 돌파 영화 <파수꾼>의 기록 18일을 나흘 앞당겼다.

<돼지의 왕> 개봉 4주차, 연상호 감독은 벌써부터 다음 증명을 위해 차기작 <사이비> 구상에 한창이다. 일단 예열이 되면 초사이언처럼 달려버리는 감독답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PD의 공이 크다.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혼자 작업하던 습관이 배어 있는 연상호 감독 옆에서 빠듯한 살림과 시간 안에 장편의 호흡을 유지시킨 사람, 조영각PD를 만나 <돼지의 왕>의 제작과정에 대해 들었다.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그는 1990년대부터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영화인이다. 

 영화 <돼지의 왕> 조영각 PD.

영화 <돼지의 왕> 조영각 PD. ⓒ 이현진


- <돼지의 왕>에 참여하게 된 시작이 궁금한데요?
"시나리오는 이미 2006년에 봤어요. 그때부터 연상호 감독이 '형, 아는 충무로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몇몇 영화사에 돌리기도 했어요. 너무 어두워서 '이게 될까?' 우려가 있었죠."

- 결국 아무데서도 돈이 들어오지 않아 제작을 포기하려고 했던 마지막 순간에 지원을 받고 겨우 프로덕션을 꾸리게 된 거군요.
"처음에는 1억 으로 만들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고 했을 때, 저예산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거지. 다른 독립영화도 마찬가지예요. 안 되면, 이를 악물고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

투자처를 여러 군데 알아봤지만 찾지 못했어요. '이 영화 못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던 차에 KT&G 상상마당의 1억 원 제작지원이 된 거죠. 프로덕션도 상상마당에서 제작위원회를 꾸려 관리를 했는데, 여기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요. 1억이라는 돈으로 1년 안에 가능하겠냐. 연상호 감독은 '5천만 원만 줘도 가능하다!'고.(웃음) 물론 감독이 그만큼 준비가 많이 돼 있었고, 작품을 하겠다는 의지가 높았죠. 그 가운데 제가 PD로 합류해 예산안을 짜면서 돈도 절약하려고 노력했어요. 장편이 다 끝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지 아니까."

- 오랫동안 독립영화계에서 극영화의 프로듀서는 여러 번 했지만, 애니메이션은 처음이었잖아요. 제작과정이 달라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애니메이션은 안 끝나니까! 극영화는 어쨌든 프리프로덕션 시작하면 몇 달이든 끝이 보이는데, 애니메이션은 얼마큼 진행됐는지도 알기 어려웠어요. 중간에 작업한 걸 보려면 렌더링을 걸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작업을 방해해야 되잖아요. 어쩌다가 보여 달라고 하면, 겨우 1분짜리 보여주더라고요.(웃음) 그냥 감독을 믿고 무리하게 관여하지 않았죠.

"어차피 '18금' 나올 게 빤한 시대, 차라리 세게 가자" 

 <돼지의 왕>의 한 장면. 경민은 부부싸움 중 홧김에 아내에게 칼부림을 하고 만다

잔혹스릴러를 표방한 <돼지의 왕>은 의외로 젊은 여성 관객이 많다고 한다. GV를 할 때 90%까지 여성 관객인 경우가 있었다고. 조영각PD는 "워낙 독립영화를 많이 보는 관객층이 20대 여성들인데, 추가로 30대 이상 남성들이 많이 움직여주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그런 식으로 부모 세대까지 극장에 불러들인 좋은 사례가 <워낭소리>"라고 설명했다.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 우석훈 교수가 쓴 칼럼 '<돼지의 왕>은 어느 개를 위하여 18금인가' 보셨죠? 사실 잔혹스릴러라고 홍보됐지만 <돼지의 왕>은 '15세 이상 관람가'를 받아도 무방한 수준 아닌가요?
"예전에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을 한 적이 있어요. 만약 내가 심의했다면, 힘들지만 어렵게 '15세 이상 관람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죠. 근데 지금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15세는 힘들겠다는 예상을 하고 희망등급을 '18세 이상 관람가'로 낸 거예요. 어차피 18세 받을 거면, 15세를 받기 위해서 욕을 빼거나 수위를 조절하는 것보다 센 영화, 잔혹스릴러로 가자! 청소년 관객은 뺏기지만, 사실상 독립영화는 청소년들이 그렇게 많이 보지 않잖아요.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죠. 중고등학생들이 '보려고 했는데 못 보는 건가?'라는 트윗이 올라오니까. 이게 옳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점점 사회가 제도적으로 철저해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밥상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도 TV에 나왔는데 이제는 담배조차 나올 수 없잖아요. 영화에 대한 심의도 점점 더 보수화되고 기준도 강화되고 있어요."

- 그래도 중학생들이 본드 부는 장면이 있는데도, 신기하게 영등위 기준에서 '약물' 등급은 높게 나오지 않았더라고요.
"본드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니까. 연상호는 본드가 아니라, 그냥 비닐 쓰고 있는 거라고 하던데.(웃음)"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을 제작한 조영각 프로듀서(왼쪽)와 연상호 감독

▲ 조영각 프로듀서(왼쪽)와 연상호 감독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3관왕은 <돼지의 왕>에 큰 기회를 가져다줬다. 조영각PD는 "극영화가 아니고, 또 감독이 그렇게 유명했던 것도 아니라서 인지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연상호 감독에 대해서는 "상 받고나서 오히려 더 겸손해졌다"며 "원래 울분에 찬 캐릭터인데 표정관리 때문에 그렇게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성하훈


"독립영화는 잊힌 사건과 현실을 계속 환기시키며 불편을 주는 것"

- 애니메이션 제작이 어려우니까 만화를 할까, 극영화를 할까 우여곡절도 많았잖아요. 그럼에도 <돼지의 왕>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게 맞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요. '왜 극영화로 안 했냐'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애니메이션 창작자에게 그렇게 묻는 건 극영화하는 사람에게 '왜 애니메이션으로 안 했냐'고 묻는 거랑 똑같아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니까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는데 다큐네?'라는 반응도 있던데, 장르를 무시하는 건 제작자에게 실례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이 개그맨 최효종을 구속한 걸 보고 '개그를 다큐로 받네'라고 하던데, 그럼 다큐는 고소해도 되는 건가요? 그런 각기 다른 잣대들이 있어요."

- <마당을 나온 암탉>이 성공했을 때도 그렇고, "애니메이션인데, 재밌네?"라는 반응은 솔직히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극영화 중심적인 사고와 선입견이 있는 거죠. 독립영화도 그래요.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독립영화치고 괜찮네?' '뜻밖에 재밌었어요'. 그런 선입견이 없어지려면 영화로 증명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독립영화가 기대를 배반하는 영화이기는 하죠. 영화가 갖고 있는 판타지를 깨버리니까요. 기존의 상업영화들이 2시간 동안 스크린에서 판타지를 보며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게 한다면, 독립영화는 잊힌 사건과 현실을 계속 환기시켜 주니까 괴롭고 불편하죠. 하지만 그게 독립영화의 역할이에요. <돼지의 왕>도 그런 역할을 하는 영화고요."

 <돼지의 왕>에서 권력을 가진 이른바 '개'들에게 억압 당하던 '돼지'들은 '돼지의 왕' 철이의 등장으로 연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영웅의 등장이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영화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곤 하던 약자들의 사회가 위험해 보였다"고 말했다.

<돼지의 왕>에서 권력을 가진 이른바 '개'들에게 억압 당하던 '돼지'들은 '돼지의 왕' 철이의 등장으로 연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영웅의 등장이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영화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곤 하던 약자들의 사회가 위험해 보였다"고 말했다.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 다행히 <돼지의 왕>은 조금씩 증명을 해나가고 있지만, 사실 이렇게 어두운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결심하게 된 확신이 뭘까 제일 궁금했어요.  
"확신을 못했다니까요!(웃음) 확신이라기보다 연상호 감독의 제작가능성, 제작의지를 믿은 거예요. 감독의 의지를 가지고 그 정도 규모에서 작품을 만들어 선보일 수 있는 건 굉장히 중요한 기회였어요. 연상호에게도, 한국 애니메이션에게도, 한국 영화계에도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생각했던 4억 원대로 만들었다고 해서 퀄리티가 더 높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1억으로 영화를 완성했고 좋은 평가도 받았습니다. 물론 적지만 관객들을 만나고 있어요. 비록 돈은 많이 못 벌겠지만 한 편으로 끝날 일은 아니지요. 다음 작품을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으니, 이번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더 많은 관객을 만나면서 확대해 나갈 수 있겠죠. 무엇보다 연상호가 이제 자기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게 중요하니까요."

돼지의 왕 조영각 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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