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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공군에서 새로운 '불온서적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거기에는 2008년에 선정된 불온도서 23종에, <낯선 식민지, 한미FTA> <길에서 만난 사람들> <슬롯> 등 19종의 책이 추가돼 있었습니다. 새롭게 불온도서 목록에 이름을 올린 이 책들은 과연 얼마나 불온한지, '불온도서를 읽다' 시리즈를 통해 불온하게(?) 읽어보겠습니다. [편집자말]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의화 부의장이 한미FTA 비준안 통과를 선언하자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이 의장석을 에워싼 채 항의하며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의화 부의장이 한미FTA 비준안 통과를 선언하자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이 의장석을 에워싼 채 항의하며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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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비장했다. 단상 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얼굴에 최루 가루가 뿌려졌지만 정의화 국회부의장은 작은 생수병의 물로 눈가를 씻어낸 뒤 다시 의장석에 섰다. 우국충정에 젖은 지사의 결기가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과연 한미FTA 협정문을 다 읽기나 했을까.

다른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비준안을 통과시키고자 하는 그들은 과연 1400쪽에 달한다는 그 긴 협정문을 다 읽고서 저렇듯 당당하게 본회의장에 모여 비준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일까.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한미FTA의 본질, '낯선 식민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한미FTA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ISD(투자자국가소송제도) 조항 때문에 협정을 맺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ISD 조항이 빠진다면 어떤가, ISD를 비롯한 몇몇 독소조항들만 빠진다면 문제가 없는가.

혹시 이명박 정부의 분석과 장밋빛 전망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만일 정부의 분석대로 대미 무역수지 흑자폭이 크게 늘고, 국내 서비스 시장도 구조조정을 거쳐 경쟁력이 강해진다면, 그렇다면 한미FTA를 체결하는 것이 옳은가.

어려운 문제다. 2006년 6월 한미FTA 1차 협상이 시작된 뒤로 무려 5년 4개월이 흘렀고, 그 사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해설과 분석, 또 전망과 토론들이 우리들에게 쏟아졌지만 여전히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니, 어쩌면 그 무수한 정보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사이 정작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이 어려운 문제에 답을 해줄 책을 한 권 소개하려 한다. <낯선 식민지, 한미FTA>. 감히 한미FTA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줄 책이라 말하고 싶다.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장을 맡은 이해영 교수(한신대)가 2006년 6월에 쓴 책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신년연설에서 한미FTA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로 그해다. 그러니 그 이후 5년여의 협상 과정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어차피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FTA를 둘러싼 '이해관계'와 '삼성'

<낯선 식민지, 한미FTA> 표지
 <낯선 식민지, 한미FTA> 표지
ⓒ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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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식민지, 한미FTA'. 불평등 협정이 아니라 '낯선 식민지'라니 호기심이 생긴다. 혹시 한국 경제가 미국 경제에 종속된다는 해묵은 주장을 하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론' 위에 '담론'이 있고, 그 위에는 '조작'이 있고, 또 그 위에는 '비리'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있던 비리도 없던 일로 되기가 허다하므로 나는 비리 위에 결국은 이해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사실 부족하다. 해서 '국민' 위에 '정부'가 있고, 그 위에 '재벌'이 있고, 또 그 위에 '삼성'이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 실마리를 제공하는 글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해관계'와 '삼성'이다. 우리가 한미FTA를 바라보는 데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 두 가지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관계, 서로 이해가 걸려 있는 관계다. 즉, 누군가에겐 이롭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해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한미FTA를 통해 이(利)를 얻는 쪽과 해(害)를 보는 쪽은. 물론 그 어느 쪽도 우리 사회의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거나, 또는 요행에 따라 갈리지 않는다. 이미 그 경계는 뚜렷하다. 짐작했겠지만 이를 얻는 쪽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대자본들, 그리고 해를 보게 되는 쪽은 나머지 전부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따르자면, '1 대 99'. 그것이 한미FTA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구도이자,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그토록 한미FTA에 매달리는 이유다.

지나간 얘기지만 참여정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문재인 전 참여정부 비서실장이 쓴 <운명>이란 책에서 문 전 실장은 한미FTA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을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줄곧 '장사꾼 논리'를 강조했다고 한다.

"100% 국익 기준으로 하라. 우리가 이익이 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거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노 전 대통령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자본의 이익을 위해 시작된 협상에서 조금 덜 주고 더 받는다 한들, 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된다 한들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이미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돼버린, 그 시절 참여정부와 삼성의 관계를 떠올리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참여정부가 가졌던 인식의 한계이자 어쩌면 한국 진보개혁 진영이 가진 역량의 한계였다. 훗날 노 전 대통령이 토로했듯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시대의 벽과 맞닥뜨려야 했던 개혁 정권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암울한 현실'은 이미 시작됐다

그들은 말한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시장으로 이른바 '경제 영토'를 늘려 자동차와 IT 등 우리나라 수출 주력 부문의 판매를 크게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또한 미국의 선진 서비스 분야를 끌어들여 오랜 세월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한국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팔아서 더 많은 쌀과 고기를, 그것도 싼 가격에 사오고, 또 강한 외부 충격을 통해 힘을 키우자는 논리는 이미 한미FTA가 아니더라도 익숙하다.

정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 시장에서 쏘나타와 갤럭시S가 정말 더 팔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우리가 미국산 삼겹살과 와인을 조금 더 싼 가격에 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현대와 삼성이 벌어들인 그 어마어마한 돈이 대규모 투자를 낳거나 청년층의 좋은 일자리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 그렇다 한들 우리 농민들이 입을 엄청난 손해를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무너진 이유가 우리 경제의 개방 수준이 낮거나 외부 충격을 겪은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투자가 늘지 않고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 그들이 지금껏 돈을 벌지 못해서가 아니기 때문이고, 농민들이 이런 식으로 피해를 입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묵은 논쟁이다. 그들은 똑같은 거짓말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한미 초국적 자본은 한미FTA를 지렛대로 구조조정의 새로운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는 점에서 보면 삼성과 LG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과거 NAFTA를 미국 자동차 업계가 인원감축, 생산기지 이전 등 구조조정의 계기로 이용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미FTA로 인한 관세철폐가 가져다 줄 가격인하 효과보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조정을 통한 인건비 절감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국의 대자본들이, 아니 정확히 말해 한국과 미국의 초국적 자본이 한미FTA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초국적 기업으로서의 현대자동차와 포드(Ford)가 한국과 미국이라는 시장을 두고 경쟁 관계에 놓여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같은 각종 노동 관련 규제를 무너뜨리는 데 있어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가변자본에 대한 총자본의 글로벌 네트워킹의 한 고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한미FTA는 노동에 대한 초국적 자본의 거대한 카르텔인 셈이다.

이미 한국의 초국적 기업은 국민경제적 차원에서만 기능하지 않고, 또 국민경제에 무차별적인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국가 역시 국민경제의 조절자라기보단 초국적 기업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매개자 역할로 전락해 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한미FTA가 미칠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주권의 상실"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경제 체제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국가의 정책 공간(policy space)이 줄어들고 정책 수단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장은 국가를 향해 규제의 완화나 철폐, 즉 탈규제를 요구해왔지만, 이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대담하게도 "시장에 의한 국가의 '역(逆)규제'"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저자가 제목에서 밝힌 '낯선 식민지'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단순한 대미 종속을 넘어, "한국계 초국적 기업을 포함하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포괄적 식민화". 섬뜩한 미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암울한 현실일지 모른다.

어둠이 걷히면 다시 새벽 첫차가 온다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세종 역의 한석규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세종 역의 한석규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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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한 장면. 역병이 도는 마을을 찾아간 임금 이도(세종)는 역병으로 죽은 자식을 수레에 싣고 가던 어느 백성을 발견하고는 멱살을 잡는다. 이미 역병을 막기 위해 마을 곳곳에 방을 붙였지만, 까막눈인 백성들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임금은 그를 향해 대체 왜 글을 배우지 않느냐고, 기껏 천자만 익혔으면 자식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지 않았느냐고 울부짖지만, 뼈 빠지게 일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던 백성들에게는 천자문을 익히는 일조차 언감생심이었다.

백성들은 여전히 바쁘다. 그런 백성들에게 왜 경제를 공부하지 않느냐고, 왜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한미FTA를 반대하느냐고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 게다가 1400쪽에 달하는 협정문을 앞에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은 백성의 몫이 아니다. 마땅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백성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 역시 정부의 몫이다. 그러니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분석과 전망들 앞에서 주눅 들거나 지칠 필요는 없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정부가 국민의 편에 올바로 서서 국민을 위한 정책을 올곧게 펴기만 한다면 굳이 복잡한 설명도 필요 없다. 어디까지나 꿈같은 이야기다. 현실에서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이해를 구하기에 앞서 번역이나 제대로 해주길 바랄 뿐이다.

경제를 잘 모르는 나는 쏘나타가 얼마나 더 팔릴지, 리바이스 청바지가 얼마나 더 싸게 들어올지, 그리하여 일자리가 얼마나 늘고 경제성장률이 얼마나 올라갈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본질만 이해하려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협정이고 정책인지를 말이다. 복잡할수록 거짓에 가깝고 진실의 아름다움은 그 단순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먼 옛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던 믿음이 깨진 뒤부터 자연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러준 교훈이 아니던가.

이미 막차가 지나간 듯 보이지만, 언젠가 어둠이 걷히고 나면 다시 저 멀리서 새벽 첫차가 불을 밝히며 다가올 것이다. 아마도 내년에 있을 총선과 대선라면 기대를 걸어볼 만도 하지 않겠는가. 그때를 위해 본질만은 잊지 말아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낯선 식민지, 한미FTA> 이해영 씀, 메이데이 펴냄, 2006년 6월, 275쪽, 1만5000원



낯선 식민지, 한미 FTA

이해영 지음, 메이데이(2006)


태그:#한미FTA, #낯선 식민지, 한미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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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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