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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글에선 깊은 허무의 냄새가 난다. 깊고 깊은 허무는 뼛속까지 스민 듯 해 보인다. 김훈의 글은 빨리 나아가지 않는다. 한땀 한땀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를 또 그렇게 공들여 읽듯이 힘들게 밀어서 가게 만든다. 자전거 바퀴를 저어 경사진 길을 헉헉대며 올라가듯이. 역사소설<흑산>(학고재), 제목부터 무겁다. 이번엔 또 어떤 소설일까 궁금하면서도 책은 여러 날 덮어두고 미적거리다 손에 들었다.

 

15년 전 일산으로 이사를 온 뒤 자유로를 타고 한강을 따라서 서울에 드나들던 작가는 귀가하는 저녁이면 옛 양화진 자리에 강물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봉우리(누에 대가리 같다고 해서 잠두봉이라고)를 보았다.

 

140년 전에 이 봉우리에서 사학(邪學)의 무리들 목이 잘렸고 그 시체들을 강물에 던졌다. 강은 피로 물들었었다. 그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1만여 명. 잠두봉은 지금은 절두산(切頭山)이라 바뀌었다. 작가는 피에 젖었던 산천, 140여 년 전 일을 자유로를 타고 한강을 따라서 오가는 길에 마음에 담았다.

 

김훈은 <흑산>을 쓴 배경에 대해 작가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절두산은 자유로에 바짝 닿아 있었다. 잠두봉은 조선시대에 한강의 절경으로 꼽혔고 겸재는 이 자리를 <양화환도>라는 화폭에 그렸는데 지금 절두산은 매연에 찌든 흙더미이다. 비오는 날에는 절두산 벼랑이 빗물에 번들거리고 그 아래 자유로에는 늘 자동차들이 밀려 있었다. 자유로를 따라서 서울을 드나들 때마다 이 한줌의 흙더미는 나의 일상을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소설은 그 억압과 부자유의 소산이다."

 

그는 절두산 아래를 통과해서 귀가하는 날들이 오래 계속되었고 마침내 흑산도와 남양 성모성지, 배론 성지 같은 사학죄인들의 유배지나 피 흘린 자리를 답사했고 기록들을 찾아 읽었다. 작가는 흑산에 유배되어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儒者)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는 영원을 위해 순교한 자들이 염원한 피안의 세계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고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서 당면한 삶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작가의 <남한산성>이나 <칼의 노래> <밥벌이의 지겨움>과 <흑산>에서도 산 자의 슬픔, 이 땅에서의 삶, 지금, 여기서의 삶이 면면이 깔려 있는 것을 본다. 그는 매일 자유로를 따라가면서 보던 절두산을 품고 잉태하여 소설로 낳았다.

 

<흑산>은 천주교로 인해 박해받았던 정악용의 가문과 민초들의 굴욕, 그 속에서 삶을 그리고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생생하고도 리얼하게 와 닿는 매 맞는 자들의 신음소리가 소름끼치게 와 닿아서 힘이 들었다. 말로 전할 수 없고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소설은 내내 목 베임과 뼈가 꺾이고 살이 터지는 비명과 신음소리와 고통으로 가득했다. 

 

<칼의 노래>가 베고 베고 또 베었다면 <흑산>은 고통의 소리가 절절이 배여 있어 소름 돋는다. 민초들의 골수까지 파먹으려드는 벼슬치들과 풀뿌리로 연명하는 백성들의 신음소리, 그 신산한 삶이 묻어났다.

 

소설은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를 떠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천주교도인 정약용의 형제들, 정약종은 순교를 당하고 정약전은 정약용과 각각 다른 곳으로 유배를 떠난다.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황사영, 정명련, 황경한, 정창대, 구베아(18세기말~19세기 초에 살았던 실존인물) 등이 등장한다. 그 외의 인물들은 작가가 거의 만들어 낸 인물들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여기서 정약용의 형제들 중 주인공은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이다. 그러니까 순교자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산 자에 맞춰져 있다. 저기 구원의 꿈이 있는 곳이 아닌, 배반의 삶의 자리, 여기서 살아 있는 자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끊임없이 매 맞고 고통당하고 형틀에 묶여 고문당하는 자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배교와 배교의 꼬리를 문다. 작가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기도문은 이렇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p105)

 

정약전은 흑산에 유배되어 그곳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곳임을 인정하고 산다. <자산어보>역시 거기서 나왔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살았다. 흑산에서 술이 더 늘었고 섬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물고기를 들여다 보았다. 끌려온 곳에서 살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 '당면한 곳만이 삶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儒者)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 결절의 벽에 내 말들을 쏘아댔다.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작가의 말 중)

 

정약전은 지금 흑산에서 살 수 밖에 없음을 체념하며 받아들인다. 거기서 흑산을 자산으로 바꾸어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는 늘 대면하던 창대에게 '자산'이 왜 '흑산'과 다른지 그 의미를 말한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다'고, 흑은 무섭고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치지만 자(玆)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고,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 있다고 말한다.

 

흑산도, 그 당면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정약전의 체념 섞인 말이 울리는 것 같다.

 

' 여기서 살자. 여기서 사는 수밖에 없다. 고등어와 더불어, 오칠구와 더불어 창대와 장팔수와 더불어, 여기서 살자. 섬에서 살자'.

 

끌려온 곳에서 살 수 밖에 없음을 알고 당면한 곳만이 삶의 자리라던 정약전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역시 또 다른 유배지일지도.

덧붙이는 글 | 책: <흑산>
저자: 김훈
출판: 학고재
값: 13,800원


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학고재(2011)


태그:#흑산,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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