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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담배를 권한다. 거절하니 혼자 피워 문다. 창문을 열려고 보니 창틀이 너덜너덜한게 다 떨어져나가기 일보 직전. 문틈에서 찌그럭, 소리가 난다. 녹슨 면들이 서로 닿을 때 나는 소리다. 많이 낡은 차라는 걸 타기 전에 얼핏 알았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털털털, 차는 오르막길에서 힘이 딸린다. 슬쩍 고개를 꼬고 운전석의 속도계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계기판도 고장이다. 슬그머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악명 높은 박시시

 

새벽 3시, 카이로 공항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호객을 하는 택시 기사들과 흥정을 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70파운드(1이집션파운드=220원 정도)면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170파운드를 부르는 기사에게는 콧방귀를 뀌었다. 130, 100, 80까지 떨어져 오케이 했더니, 위치를 확인하고는 멀다고 또 딴소리다.

 

그 기회를 비집고 나선 다른 기사가 80파운드가 좋다고 차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차가 좀 낡은 듯 싶어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가 우리 가방을 슬그머니 들어 올려 차 지붕 위에 얹고는 손을 내민다.

 

아차, 박시시! 이게 그 악명 높은 박시시?

 

여행 준비하면서 여기저기서 많이 주워들었다, 박시시를 조심하라고. 이집트 여행을 하다 보면 그놈의 박시시 때문에 속을 좀 썩게 마련이다. 원래 박시시란,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다는 의미. 그들에게, 많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와 나누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여기까지는 좋다. 함께 나누기를 요구한다는 것, 당당해서 좋다. 그런데 그게 팁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변질되었다. 하나 쓰잘데기 없는 친절을 제멋대로 베풀고는 박시시를 요구한다. 너는 돈 좀 있는 여행객이니 가난한 나한테 박시시 좀 내놔라, 뻔뻔한 걸 넘어서 위협적일 때도 있다.

 

유적지에서, 졸졸졸 따라 붙어 알아먹지도 못할 영어발음으로 제멋대로 설명을 해주고 요구하는 박시시는 그래도 애교스럽다. 카이로에서 박시시는 나아가 바가지, 더 나아가 가벼운 사기행각으로까지 확장이 된다. 모스크 내부에 들어갈 때, 안 신어도 될 덧신을 비싸게 팔아 먹기도 하고, 무료인데도 버젓이 책상까지 구비하고 앉아 모스크의 관람요금을 받아 먹기도 한다.

 

카이로의 택시 운전사

 

어쨌든 이제 가방까지 차 지붕 위에 얹고 박시시까지 주었으니, 가다가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타고 볼 일이다. 택시는 위태롭게 언덕을 넘어 다시 달린다. 모퉁이를 돈 차는 주유소를 향해 속도를 늦춘다. 기름이 떨어졌나?, 싶었는데 주유소 바로 앞에 차를 세우더니 기사가 내린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차창은 그만 두고 뒷문을 삐죽이 열고 내다보았다.

 

우띠! 트렁크에서 타이어를 꺼내고 있는게 아닌가. 이 시간에 여기서 타이어를 갈겠다고?

헌데 그 꼴을 볼작시면 더 가관인게, 갈아보겠다고 꺼낸 스패어 타이어가 별로 쓸만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현지시각으로 맞추어 놓은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이집트 양반이 끙끙거리며 주유소 불빛 아래에서 타이어를 갈 동안, 우리 가족은 차에서 기어 나와 우리가 타고 온 택시 상태를 그제야 확인하고는, 허걱, 해골바가지를 발견한 원효처럼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가족에게도, 여행 가서 맞닥뜨리는 이 정도 사건쯤은 즐기게 되는 내공이 생겼다.

 

무사히(!)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사는 또 딴소리를 한다. 아까 공항 빠져 나올 때 낸 돈 10파운드를 더해서 90파운드를 내놓으라고. 다 포함해서 80파운드로 흥정한 거라고 따지다가 슬그머니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돈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잔돈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실컷 80파운드로 흥정해놓고 100파운드짜리 밖에 없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잔돈을 받아내기 힘들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나는 포기하고 100파운드를 내밀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이렇게 낡은 택시를 몰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이집션에 대한 박시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돈을 받아든 기사는 잔돈을 주겠다고 주머니를 뒤적인다. 큰소리 치더니 5파운드 밖에 없다며 씨익 웃는다. 그럼 그렇지. 어차피 잔돈은 포기했는데 그거라도 고맙게 받아들었다. 헤어지면서 기사는 거래가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하이파이브, 손바닥을 내밀었다. 타이어 갈고 기름때 까맣게 묻은 그 손과 맞대고 싶은 마음이 선뜻 안 들어, 나는 그저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직 어두운 시간이지만 한눈에 들어온 카이로는 지저분하고 가난이 모래먼지처럼 내려 앉은 도시였다. 나는 그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덜 깨끗하고 가난한 나라는 대체로 시스템이 흐리멍텅했으며, 흐리멍텅할수록 거친 여행이 되고, 거친 여행일수록 감흥은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고, 그럴수록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거라는 걸, 일천한 여행 경험을 통해 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그:#이집트, #카이로, #박시시, #카이로 택시, #시타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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