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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6일)는 군산 노인종합복지관(관장 정헌주)에 다녀왔다. 연말 쯤 들르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60~80대 어르신들(늘빛사랑 실버극단)이 펼치는 연극공연이 있다고 해서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제목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추억의 여고시절>이었기 때문.

오전 11시 40분 복지관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학창시절 추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옛날 교복을 상징하는 검은색 포스터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고교얄개 그림과 정겨운 글귀들이다. 건물 앞 도로가 중고등학교 시절 등굣길이어서 추억의 향수를 더욱 자극한다.

식당에서 현관까지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여유가 있어보였다.
 식당에서 현관까지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여유가 있어보였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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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 어르신들의 점심 메뉴가 궁금해서 일찍 도착했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있어 실내가 조금 소란스럽다. 배식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식당에서 현관까지 길게 늘어서 있다. 나란히 줄지어 있는 차분한 모습에서 시대가 변했음을 느낀다.

얼굴에 세월의 나이가 가득한 어르신들을 보며 잠시 잊고 있던 내 나이를 확인한다. 환갑 진갑 다 넘긴 나이를 세는데 10초도 안 걸린다. 만 60세가 넘으면 복지관 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나도 자격이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2층에서는 장기를 두는 모양이다. 훈수하는 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린다. 목소리에 생기가 넘쳐난다. 그 옛날 동네 아저씨들이 그늘에서 장기를 두다가 옆에서 끼어든 훈수꾼 때문에 싸우던 장면이 뇌리를 스치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1700원짜리 백반, 꼴로 볼 게 아니네!

1700원짜리 점심. 어머니 손맛에 영양사의 정성이 담겨 글자 그대로 별미였다.
 1700원짜리 점심. 어머니 손맛에 영양사의 정성이 담겨 글자 그대로 별미였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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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대는 1700원. 기초생활보장 수급 어르신들은 무료란다. 이춘엽 조리사 팀장을 만났다. 젊어 보이는 데 할머니란다. 이 할머니는 "반찬은 세 가지씩 나오는디, 매일 바뀐다"라며 "된장은 봄·가을에 직접 메주를 쒀서 담근다"라고 자랑이다.

이 할머니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토속적인 음식으로 식단을 짠다"라고 말했다. 그는 "반찬을 준비해야 하므로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일과가 끝난다"라며 "말씀을 함부로 해서 속상하게 하는 어른도 있지만, 하루하루 보람을 느낀다"며 활짝 웃었다. 

이날 반찬은 들깨가 들어간 배춧국에 가자미 무 조림, 부추김치, 배추김치 등. 고소한 들깨 냄새와 가자미 무 조림이 침샘을 자극한다. 한 그릇 사 먹고 싶다니까 식판을 가져오란다. "얼씨구나!"하고 밥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꼴로 볼 게 아니었다.   

'실버세대'의 연극 <추억의 여고시절>, 연기는 수준급

오후 2시. 공연시간에 맞춰 복지관 3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무대는 허술하지만, 조명기구와 버스 정류장 표시, 책상, 수돗가 등 소품이 그럴듯하다. 어르신들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훈훈함이 감돈다. 옛날 가설극장 분위기가 짙게 묻어난다.

정헌주 관장이 연극 시작에 앞서 어르신들에게 박수를 당부하고 있다.
 정헌주 관장이 연극 시작에 앞서 어르신들에게 박수를 당부하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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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맡은 군산 노인종합복지관 박수진(37세) 사무국장이 "연극을 감상하시면서 풋풋했던 학창시절 추억들을 돌이켜보며 실컷 웃고 즐기시라"며 "옛날에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떠올리시면 어르신들 건강에도 좋을 것"이라고 인사말을 전했다.  

정현주 관장은 "연초에 단원을 모집, 어르신들이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혹시 실수하더라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주시라!"고 당부했다. 이어 "실수도 연극이니 예쁘게 봐주시고, 아름다웠던 여고, 남고 시절로 돌아가 보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연극 <추억의 여고시절> 지도 감독은 한유경 강사. 나오는 사람은 홍도, 경자, 김중배, 철진(경자 오빠), 경자 엄마, 홍도 엄마, 홍도 아빠, 홍도 남편, 담임선생, 엑스트라 합해서 20여 명. 정 관장의 인사가 끝나고 배경음악과 함께 무대에 조명이 켜지면서 막이 올랐다.  

 경자 집으로 찾아온 김중배를 경자 엄마가 맞이하고 있다. 수줍어하는 자세로 서 있는 홍도의 표정연기는 수준급.
 경자 집으로 찾아온 김중배를 경자 엄마가 맞이하고 있다. 수줍어하는 자세로 서 있는 홍도의 표정연기는 수준급.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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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홍도와 경자가 만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배경은 1963년 5월 어느날 경자네 집. 홍도가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오다 경자 엄마와 마주친다. 경자 엄마는 잠꾸러기 딸(경자)을 혼낸다. 경자는 홍도에게 일찍 일어나 엄마를 화내게 만든다며 짜증 낸다.  

고등학교 교목 차림의 김중배가 대문을 들어서며 경자 엄마에게 꾸벅 인사한다. 친구 철진이와 경자, 홍도와 함께 학교에 가려고 찾아온 것. 경자 엄마는 잠시 착각했는지 "철진이 왔냐!"라며 반긴다. 그러나 곧바로 "아니 중배 왔냐!"로 바꾼다. 객석에서 박수와 함께 웃음이 터진다.

담임이 교실에 들어오자 학생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담임이 교실에 들어오자 학생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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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군산의 모 여자고등학교 교실로 바뀐다. 경자와 홍도가 급우들과 수업을 받고 있다. 김중배-홍도 사이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경자.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김중배가 홍도에게 보낸 편지를 노리고 있다. 

반장: "차렷,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학생들 모두 인사)
담임: "안녕하세요. 오늘은 김소월님의 <진달래 꽃>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 낭송을 하겠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시는 길에 뿌리오리다···."

연애편지가 발견되어 담임에게 꾸중 듣는 경자와 홍도.
 연애편지가 발견되어 담임에게 꾸중 듣는 경자와 홍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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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이 김소월의 시(詩)를 낭송하는데 경자가 옆자리 홍도에게 큰 소리로 숙제하려 한다며 수학 문제집을 빌려달라고 한다. 담임이 알아듣고 두 사람을 나오라고 해서 꾸짖다가 김중배의 편지를 발견한다.

"이게 뭐야. 연애편지잖아. 둘이 죽자사자 붙어 다니더니 이제는 남학생 하나 두고 싸우는 거야 잘한다 잘해. 그나저나 너희 월사금은 언제 낼 거야. 월사금도 못 내면서 무슨 학교에 다닌다고. 내가 챙피해서 죽겠어. 이번에 월사금 못 가져오면 부모님 모시고 와!"

홍도 방을 청소하다가 발견된 연애편지로 난장판이 된 경자네 집 앞마당.
 홍도 방을 청소하다가 발견된 연애편지로 난장판이 된 경자네 집 앞마당.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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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또 바뀌어 경자네 집. 시골에서 농사짓는 홍도 부모가 선물을 사 들고 경자 엄마를 찾아온다. 경자 엄마가 "무슨 선물을 사 오셨어요!"라며 반갑게 맞는다. 홍도 부모는 "홍도가 속 썩이는지 모르겠다."라며 걱정한다. 홍도의 방을 청소해주던 엄마가 연애편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홍도 아빠가 단단히 화난 표정으로 학교 그만 보내야겠다며 야단친다. 구경하던 경자가 김중배는 첩의 자식이라고 고자질한다. 홍도 아버지가 "아무리 농사짓고 있지만, 첩의 자식에는 딸을 줄 수 없으니 시집이나 보내야겠다!"고 한다. 순간 객석에서 폭소가 터진다.

경자는 홍도에게 김중배와 멀리 떠나라고 꼬드긴다. 오빠(김중배)에게는 자기가 연락하겠다며 다음날 군산 도선장(나루터)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러나 경자의 농간으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탄식 소리가 들린다. 뱃고동 소리, 기적소리 등 효과음이 1960년대 시대극 분위기를 띄워 준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초로에 접어든 경자, 홍도, 김중배, 철진, 여고 시절 급우 등은 복지관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그들은 복지관에 나오니까 보고 싶었던 친구도 만나고 할 일도 많다며 스포츠 댄스 시범을 보여준다. 연극 공연은 40분, 스포츠 댄스와 함께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박수진 사무국장이 전하는 노인복지관



연극 공연이 끝나고 컴퓨터 교실에서 어르신들을 봐주는 박수진 사무국장을 만나 궁금한 점 몇 가지를 들어보았다.

컴퓨터 교실에서 어르신들에게 사용법을 알려주는 박수진 사무국장
 컴퓨터 교실에서 어르신들에게 사용법을 알려주는 박수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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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의 열정이 넘쳐서 그런지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감동 있게 봤습니다.
"어르신들 연극 발표는 올해가 세 번째입니다. 공연 도중 대사를 깜박 잊거나 실수해서 넘어져도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재도전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전율을 느낍니다. 자랑스럽고 기뻐서 눈물이 나올 때도 있지요."  
 
- 원래 노인을 좋아하셨는지. 매일 뵙다 보면 짜증 날 때도 있을 텐데요.
외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어요. 엄마 아빠가 섭섭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진즉 돌아가셨지만, 저에게는 여전히 큰 존재이십니다. 외할머니 영향도 조금은 있었을 거예요. 당연히 짜증 날 때가 있지요. 조금 전 얘기했지만 감격해서 울기도 하고 속상해서 울기도 했어요. (웃음) 

- 군산 복지관에 등록된 회원과 하루에 이용하시는 어른은 몇 명인가요?
"군산엔 이곳 하나밖에 없구요. 회원으로 등록한 만 60세 어르신은 1000명쯤 됩니다. 100세가 넘은 분도 계셨는데 요즘은 안 보이더군요. 하루 이용객은 350~400명 정도. 복지원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은 복 받은 분들이에요. 우선 몸이 건강해야 오갈 수 있으니까요."

- 노인복지 사업을 하면서 잊을 수 없었던 일은?
"도서지역 주민지원 사업을 벌인 적이 있는데요. 현금이 수입되는 거라서 서로 하겠다고 다툼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어렵게 시작한 사업인데 난감하더군요. 하지만 설득으로 분쟁을 조절했습니다. 섬에 대해 많은 걸 배웠고 보람도 느꼈죠. 지금도 1년에 3~4회씩 찾아뵙습니다." 

- 노인이 이용하는 복지관도 종류가 있나요?
복지관은 이용시설과 생활시설로 나뉩니다. 이용시설은 대상자들이 찾아와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저녁에 가는 사회복지관, 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 등을 말합니다. 건강한 분들이 이용하는 곳이지요. 생활시절(구 수용시설)은 24시간 생활하는 요양시설을 말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추억의 여고시절, #실버세대, #군산노인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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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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