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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북하게 쌓인 은행잎이 한껏 가을을 느끼게 해주는 요즘이다. 어느 해보다도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이번 가을. 짧게 스쳐 지나가는 가을을 잠시라도 잡아둘까 싶어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에 내려 '충정각'을 둘러보았다.

유럽풍이 가미된 근대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충정각의 모습
▲ 충정각 전경 유럽풍이 가미된 근대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충정각의 모습
ⓒ 한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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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초등학교, 푸른극장 등을 떠올리게 되는 충정로역 주변은 마포에서 서대문을 거쳐 종로를 나가는 길목이다. 높은 건물들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80년대만 해도 이곳을 지날 때면 주변의 낮은 집들 사이로 종근당 건물이 홀로 우뚝하니 눈에 띄었다.

예전에 버스를 타고 자주 오가던 길이었는데, 오랜만에 와보니 곳곳에 들어선 빌딩숲이 새삼스럽다. 비록 키 큰 빌딩들 사이에 잔뜩 웅크리긴 했지만 주황색 종근당 빌딩도 여전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충정아파트도 마치 옛날 친구를 만난듯 반갑다. 건너편은 높은 빌딩들이 키재기를 하고 있지만, 충정아파트가 있는 이 쪽은 그래도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관사'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일반 분양아파트'였다고 한다.
▲ 1930년대 지어진 충정아파트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관사'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일반 분양아파트'였다고 한다.
ⓒ 한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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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예전 기억을 더듬어가며 걷다 보니 '충정각'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그 표시를 보고 들어서면 주변 집들과는 눈에 띄게 다른 분위기의 붉은 벽돌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대안전시공간 '충정각'이다.

재개발에 밀려 사라질 뻔한 위기를 극복하고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1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충정각 재개발에 밀려 사라질 뻔한 위기를 극복하고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한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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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각은 서울에 몇 남지 않은 근대건축물 중 하나다. 한 때는 벨기에영사관이었다고도 하고, 한동안은 사택으로,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가며 개인 소유 주택으로 쓰였다고 한다.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두연'이라는 이가 소유하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 8월 2일 '고두권'이라는 이가 매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함께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1910년 즈음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1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 건물은 서울에 몇 남지 않은 귀한 근대건축물이어서 그 의미를 더한다. 한때 재개발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충정각은 그 가치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에 의해 다행히 보존되었고, 현재 레스토랑을 겸한 대안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인과의 식사 약속이나 혹은 가볍게 차 한 잔 나누며 전시회를 즐기기에 좋을 것 같다. 때로는 회화작품, 때로는 설치미술 등 다양한 표정의 전시가 이어지고 있어 찾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것도 이곳의 매력이다.

다락방 같은 분위기가 나는 충정각의 2층. 보수공사시 이 곳에서 옛날 매매계약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충정각 2층 다락방 같은 분위기가 나는 충정각의 2층. 보수공사시 이 곳에서 옛날 매매계약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한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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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건축가가 지었다는 이 건물은 한국식과 일본식, 유럽식이 뒤섞여 묘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삼각형, 사각형에 팔각형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붉은 벽돌 건물이다. 팔각형 바탕에 삼각뿔지붕을 얹고 있는 기둥 형태의 입구에는 격자창과 담쟁이 덩굴이 아담하게 잘 어우러져 있다. 그 시대에는 흔치 않았을 테라스와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 그리고 부도인지도 모를 출처를 알 수 없는 석물도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미로찾기라도 하듯 작은 방들이 골목골목으로 이어진다. 통으로 탁 트인 실내도 좋지만, 이렇게 올망졸망 작은 방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좋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숨어있는 계단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가보면, 다락방 분위기가 나는 2층이다. 이곳에서 건물 보수공사 때 옛날 매매계약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을빛이 가득한 충정각 후원의 모습.
▲ 충정각 후원 가을빛이 가득한 충정각 후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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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구경을 마치고 마당으로 나가보면 다른 구경거리가 또 가득하다. 마당 벽면으로는 먼지쌓인 와인병들이 또 하나의 벽을 이루고 있어 방문객의 시선을 끈다. 은행잎 가득한 뒷마당에서는 따뜻한 담요 한 장 두르고 차 한 잔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을 듯하다.

여름이면 한쪽 구석에 있는 해먹이 좋은 휴식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니 문득 이 곳의 여름 풍경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릴 적, 숨바꼭질하고 소꿉놀이하던 골목길. 이젠 점차 콘크리트 숲에 묻혀가는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 충정로 골목길 어릴 적, 숨바꼭질하고 소꿉놀이하던 골목길. 이젠 점차 콘크리트 숲에 묻혀가는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 한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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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각을 돌아보고 혹시 시간 여유가 된다면, 주변 골목을 서성거려봐도 좋다. 수십 년 세월이 이곳은 그냥 두고 비껴간 듯, 어릴 적 놀던 골목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소꿉장난하기 딱 좋은 누구네 집 대문 앞이나, 골목과 골목을 이어주는 작은 계단까지…… 서울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었나 싶어 잠시 상념에 젖어들게 한다.

한 자리에서 35년을 넘게 계셨다는 구멍가게 할머니는 주변 집들이 이젠 식당으로 변했다고 푸념이시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빌딩숲속에 살고 있는 도시인의 눈에는 어릴 적 살던 골목이 생각나게 하는 추억의 길이 새삼 반갑기만 하다.

대형마트가 동네수퍼까지 밀어내는 요즘. 35년째 그 자리에 있는 '구멍가게'는 바로 우리의 정든 이웃이다.
▲ 골목길 구멍가게 대형마트가 동네수퍼까지 밀어내는 요즘. 35년째 그 자리에 있는 '구멍가게'는 바로 우리의 정든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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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운 지금은 어디를 걸어도 그저 좋을 계절이다. 바쁜 일상 때문에 멀리 여행갈 시간을 내기 힘들다면, 주변의 가까운 곳을 찾아, 바삐 지나가는 가을을 잠깐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하이서울뉴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태그:#여행, #서울, #근대건축, #충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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