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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읍성
 고창 읍성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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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팔순이 넘으신 제 어머니와 이모에겐 여행이 힘을 준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살아생전 처음 해보는 자식과의 여행에 설레다

내 어머니
정읍떡(댁), 올해로 여든둘.

그동안 어머닌 온 생을 자식들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한 삶을 살지 않겠냐만 어머닌 유독 심했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버스를 빌려 놀러 가는 날에도 어머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을 했습니다. 자식들은 그런 모습이 싫어 "엄마도 가세요. 가서 즐겁게 놀고 오세요"라고 하면 버스를 타면 어지럽고 속이 안 좋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곤 했습니다.

사실 어머닌 버스를 타고 충청도는 물론 강화도까지 품일을 하러 간 적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 온 어머니는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 농사일이 조금 한가할 때면 타지로 품일을 떠났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여행은 먼 나라의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조금 못마땅해 했습니다. 특히 동네에서 여행을 갈 땐 더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부가 짝이 되어 놀고 마시고 즐기는데 아버지 혼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아버진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어이! 자네 죽어서 여행 갈라구 그렁가. 죽으면 보고 싶어도 못 봉게 가세잉!"

그러면 어머니는 늘상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영감이나 재미나게 댕겨오쇼잉. 나는 안 갈랑게."
"참 할망구도… 자네허구 여행 다녀온 지가 얼만지 아능가. 아마 삼십 년은 족히 될 거네. 삼십 년."

그렇게 여행을 가자! 안 간다! 하던 두 분은 이제 이승과 저승의 양쪽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작년에 여든여덟을 일기로 이승의 삶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머닌 아버지 영정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나지 못함을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너그 아부지 떠난 게, 살아서 너그 아부지 말 안들은 게 쪼께 미헌허구나."

그러면서 자신도 얼마 남지 않은 생, 팔도강산을 돌아댕겨야겠다는 혼잣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은 자식들은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어머니 모시고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 아버지 돌아가신 지 1년이 안 돼 실행하게 됐습니다.

"내가 살아서 김일성이 별장도 가봤다이"

어머니와 이모, 두 손녀
 어머니와 이모, 두 손녀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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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경기도 화성에 살고 있는 이모님이 동생을 찾아 시골집에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팔십 중반을 넘긴 이모님은 걷기를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당뇨와 관절염으로 고생을 한 탓입니다. 그때 두 분을 모시고 새만금에 갔습니다. 아마 두 자매가 각자 결혼 후 처음으로 함께 하는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육십 년, 칠십 년 만에 떠나는 자매의 첫 여행일지도 모릅니다.

그날 백발이 성성한 두 자매는 무슨 할 얘기가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풍경을 바라보며 "참 좋다! 참 좋아! 죽기 전에 이런데도 와 보구, 니 덕에 좋은 귀경헌다"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헌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찌 죄송하고 마음이 짠하던지요.

점심으로 바지락죽을 먹고 새만금 방파제를 향해 달리면서도 바다의 모습을 바라보곤 어린애처럼 좋아합니다. 젊은 사람이야 마음만 먹으면 훌쩍 와보는 곳이라 별 감흥도 없는 곳인데, 두 노인은 방실방실 좋아합니다. 두 자매가 함께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살아서 함께 이런 나들이를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새만금을 다녀온 후 화성에 올라 간 이모는 자식들에게 엄청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지난 10월 말경, 둘째 형과 형수가 일을 잠시 미루고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가기 전 이모는 몸이 좋지 않아 며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행을 간다는 말을 듣고 억지로 밥과 약을 챙겨 먹었다고 합니다. 아프면 떠날 수 없으니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입니다.

형 내외의 안내로 강원도 강릉 앞바다와 속초를 거쳐 김일성 별장까지 갔다 와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야야! 내가 살아서 김일성이 벨장도 가봤다이. 거그서 멩언견(만원경)으로 저쪽 동네도 봤당게."
"좋았어요? 나도 못 가봤는디."
"좋다마다야. 근디 너그 이모는 못 보구 나만 봤어야. 야, 근디 멩언경 본깨 쪼깨 어질어질 하더라."
"처음 본 게 그럴 거예요. 근디 이모는 왜 못 봤어요?"
"너그 이모는 잘 걷질 못혀서 그냥 차에 있었다."

어머니는 처음 보는 망원경으로 북쪽을 바라봤는데 어질어질했다 합니다. 무릎이 아파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이모는 차 안에서 건물만 보고 왔다 했지만 이모는 그것도 너무 좋았다며 웃습니다.

젊어서 일했던 곳, 나이 들어 구경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두 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두 분.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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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를 구경하고 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가려 했던 형은 일 때문에 잠시 시골에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 내가 두 분을 모시고 고창에 갔습니다. 선운사의 꽃무릇을 보여드리려 했지만 걷기 힘든 이모를 생각해 메밀밭을 선택했습니다.

봄에는 청보리밭으로 유명하고, 가을에는 메밀꽃으로 유명한 학원농장은 본래 미개발된 야산이었습니다. 그다지 쓸모없는 이 땅을 국무총리를 지냈던 진의종씨가 부인과 함께 개간해 뽕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92년 초 장남인 진영호씨가 귀농하면서 여러 농작물을 심었고 2000년부터 보리를 심게 됐답니다. 보리를 수확하고 나선 메밀을 심어 봄엔 푸른 초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엔 올망졸망한 작은 꽃들이 붉은 황토 위에서 춤을 춥니다.

"여그가 옛날엔 다 산이었고 황무지였는디…"
"이짝으로 일도 많이 댕겼지만 귀경은 처음이네."
"일해 먹고 사느라 귀경은 생각이나 했간디."
"너그 덕분에 이렇게 귀경도 허고 참말로 좋다 좋아."

두 분이 코스모스 꽃밭을 조심조심 걷습니다. 젊은 사람들 속에 백발을 하고 코스모스 꽃길을 걷는 이는 어머니와 이모 두 사람뿐입니다.

"옛날 생각나네. 처녀 적에 우리도 이런 꽃길을 걸었는디."
"난 생각도 안 나네. 땅 파고 풀 메고 이렇게 백발 신세가 되었응게."
"그리도 살아서 요런 곳도 귀경하고 걸어보니 참말로 좋네."
"인제라도 귀경 다니면서 살아야지."

두 분은 오순도순 말을 주고받으며 꽃길을 걷다가 힘들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 열 발자국 띄면 한 걸음 띕니다. 잘못해 넘어질까 부축하고 의자에 앉게 해 드리자 손녀딸들이 뻥튀기를 사옵니다. 복분자를 첨가한 뻥튀기라는데 맛이 고소합니다.

"힐머니, 맛있어요?"
"응, 그려. 맛나다."
"출출혔는디 하나 더 다오."

두 사촌 자매의 다정한 모습
 두 사촌 자매의 다정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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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뻥튀기를 먹으며 손녀딸들과 나란히 메밀꽃밭을 느릿느릿 걷습니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게 염려되어 '나가서 쉴까요?'하니 괜찮다 합니다. 두 분이 함께 하는 여행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몇 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하는데 어찌 여행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두 분이 나란히 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모습이 좋으면서도 짠하기도 합니다.

메밀밭을 나와 고창 읍성 앞 음식점에서 전복죽을 먹고 신재효 생가와 고창읍성, 판소리박물관을 둘러보고 집에 오는 길. 두 노인은 피곤도 할 터인데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안 피곤하세요? 많이 걸었는데."
"안 피곤허다. 나온 게 좋다."
"그렇게 좋으세요?"
"좋다마다. 좋은 귀경하고 바람도 쐬고."

그런데 '좋은 귀경 했다'는 소리에 괜히 미안해집니다.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서 눈요기로 꽃구경을 한 게 그리도 좋으실까요. 며칠 전 강원도에서 형수가 전화로 했던 소리가 생각납니다.

"작은 아빠, 엄마랑 이모 좋아 죽네. 형님은 피곤하다고 허는데 엄마랑 이모는 잠도 안 자고 그냥 싱글벙글이에요. 진작에 올 걸 그랬나봐. 암튼 잘 모시고 갈 테니 걱정 말아요."

그때도 그랬습니다. 팔십이 넘은 두 노인이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가는 동안 잠 한숨 안자고 들떠 있다는 소린 오히려 '너그들 여태껏 뭐했냐!'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메밀밭을 보고 온 후 형 내외는 두 분을 모시고 다시 부산까지 여행을 이어갔습니다. 형 부부는 3일 동안 부산과 포항 등을 거쳐 이모님을 경기도 화성 집에 모셔다드린 후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여행 후, 형 내외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야, 아버지 살아계실 때 두 분 모시고 여행을 갈 생각이었는데 못 간 게 지금 너무 아쉽다."
"나도 그래. 그래도 형이 큰일 했네. 형수도요."
"내가 한 거 아니다. 니 형수가 한 거지. 아무리 내가 하고 싶어도 니 형수가 싫어했으면 가당치도 않았다. 긍게 니 형수가 애쓴 거지."
"그렇지. 암튼 형수 고마워요."
"고맙기는요. 엄마가 좋아하는 걸 보니까 나도 너무 좋았어요. 틈나는 데로 가까운 데라도 종종 가야겠어요."

팔도유람, 요참에 고걸 해뿌렸다

두 분 건강하게 사세요. 다음엔 더 멋진 마실길 갈 수 있게요.
 두 분 건강하게 사세요. 다음엔 더 멋진 마실길 갈 수 있게요.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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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는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딸이 없는 어머니는 그 '엄마'라는 소릴 무척 좋아합니다. 무뚝뚝한 아들들은 대화가 별로 없습니다. 늙을수록 어린아이의 감성을 지니게 된다는 노인들의 마음을 아들들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종 딸 타령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엄마라 부르며 살갑게 대할 때면 잠시 딸 타령을 하지 않습니다.

나이든 부모를 모시고 며칠씩 여행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잠자리, 먹거리는 물론 장소도 신경이 쓰입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그런데 일단 떠나면 무척 좋아합니다. 말로는 '다 늙어서 뭐 그런데 가냐?'하면서도 일단 떠나면 좋아하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한 바퀴 돌고 온 어머니는 소망 하나 풀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야야! 내 죽기 전에 팔도유람 한 번 떠나고 갈라고 혔는디 요참에 고걸 해뿌렸다."


태그:#어머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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