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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반 밤을 새우다시피 하셨을 텐데 아침에 내려오신 모습은 여전히 정돈된 모습이었습니다.
 

"새벽에 좀 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에 관한 책 <지식인의 서재>도 잘 읽었습니다."

 

오래된 한적(漢籍)을 펼쳐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검정된 해법을 제시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계신 정민 작가입니다. 데드라인이 정해진 원고를 면벽하고 끝낼 요령으로 모티프원에 오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의 처조차도 이 분의 저작물을 워낙 좋아하는 탓에 우리 부부는 정민 작가와의 가을 낮 차 한 잔에 차가 식는 줄도 몰랐습니다.

 

매니아의 시대, 18세기

 

- 오래된 한서에서 보물을 찾아내는 선생님의 작업이 녹녹한 일이 아니겠지만 참 즐거우시겠어요?

"저는 18세기의 저작물들을 텍스트로 하는 작업들을 주로 하는데 즐겁습니다. 이 시기는 정보의 혁명기였습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인터넷 혁명과 비견될 만합니다. 당시 중국에서 한 번에 책을 5천권 이상씩 들여왔습니다. 1725년에 완성된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만 하더라도 총 권수 1만 권에 목록이 40권입니다. 이런 책들이 들어오면 제본을 다시 했어요.

 

중국은 4침 제본(전통제본방식에서 바인팅할 때 구멍을 4개를 뚫는 제책법)인데 이것을 모두 해체해서 표지를 다시 하고 더욱 단단한 우리의 5침 제본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단단히 다시 매어진 책들은 규장각으로 들어갔지요. 박제가와 이덕무 같은 분들이 그곳의 집서관(集書官)이셨습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정보검색사 같은 분들이었지요. 임금께서 궁금해 하는 것을 경서(經書)에서 찾아 보고하는 거지요. 시대의 지식을 모으고 그것을 편집해냈던 것입니다. 그곳에 묻혀 지내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 조선의 18세기는 정치와 사회뿐만 아니라 문화와 학문전반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시대일 듯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의 양이 혁명적으로 늘어났고 그것이 학자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꾼 거지요. 공교롭게도 이런 현상은 동서양이 동일해요. 18세기학회가 있습니다. 런던의 볼테르 재단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18세기학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한국18세기학회'가 만들어졌고 제가 회장을 맡은 적도 있습니다. 4년마다 이 학회의 세계대회가 개최되는데 한 번에 수백 편의 논문이 발표됩니다. 동시에 여러 개의 트랙이 진행되는데 각자의 관심분야를 찾아가면 됩니다. 저도 이 학회의 발표를 통해서 학문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배우고 열정을 더욱 키우기도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는 매니아의 시대임이 분명해요. 이 시기 지식인들의 지적 편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그곳 참석학자들과 얘기 중에 조선의 18세기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시대였다고 하니 프랑스학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프랑스도 '파시옹(passion)의 시대' 즉 격정이 휩쓰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18세기는 지식의 재편이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 조선에서 지식인들 인식의 지각 변동을 자극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18세기 연암 박지원으로 출발해서 19세기 다산 정약용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특히 다산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499권의 저술이 있는데 홀로 어찌 이것이 가능했겠느냐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분의 연구를 계속하고 보니 그중에 300여 권은 그 제자들과 함께한 공동작업이었습니다. 즉 한 가지의 주제가 선정되면 제자들을 통해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에디팅 했던 것입니다. 뛰어난 에디터였던 거지요. 그는 이런 방법을 통해 혼자만으로는 불가능한 광범위한 18세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분들이 <경제유표>나 <목민심서>의 내용에 대해 비슷한 연구나 풀이를 반복하는 동안 저는 이런 다산의 방대한 지식의 생산시스템 매뉴얼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을 책으로 엮었는데 그것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입니다.

 

'아홉 방향으로 서로 말을 타고...?

 

- 선생님은 이런 저술 중에는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같은 새에 방점을 두거나, <와당의 표정>과 <돌 위에 새긴 생각> 같은 와당과 전각, 조선후기의 차 문화에 관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시드군요?

"2006년 가을에 강진에서 다산선생 유물특별전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동다기(東茶記)`가 실린 책을 발견했습니다. 초의스님이 `동다송(東茶頌)`에서 인용했던 책이지요. 두 가지의 소득이 있었는데 하나는 실물이 전해지지 않았던 것을 찾아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산으로 알려졌던 동다기의 저자가 진도에 유배 와서 있던 이덕리(李德履)라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 일로 조선의 차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려 때의 번창했던 차문화는 조선시대에 거의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다산이 차를 중흥시키고 다성茶聖이라고불리시는 초의선사께서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추사 김정희의 후원이 있었지요. 차는 18~19세기 지식인들의 교유가 차를 매개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자료들을 찾아내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동안 잘못 알려진 채 답습되던 것들을 바로잡은 것입니다. 예컨대 동다기에 '구방지상마(九方之相馬)'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동안 '아홉 방향으로 서로 말을 타고'로 풀이되었습니다. 이 해석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은 오류가 답습되어왔습니다. 그 옳은 뜻은 구방고란 사람이 말 관상을 보듯이 차 맛을 잘 감별해낸다는 뜻으로, 구방고는 중국 고대에 말을 뛰어나게 감별해내던 사람이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여러 다례법이 각각의 방식대로 전수되고 또한 큰 비즈니스기도 합니다. 그것은 저의 영역 밖이고 저의 역할은 자료를 발굴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번역하여 올바른 행다법으로 한국의 전통문화가 올바르게 전승하는데 기초가 되었으면 하는 거지요.

 

연암 박지원의 글 가운데 눈 뜬 장님 얘기가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장님이었던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눈이 떠진 것입니다. 서양에도 간혹 갑자기 소경이었던 사람이 시력을 회복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갑자기 눈이 떠지니 자기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길에서 울고 있는 그에게 이런 처방이 내려집니다. '도로 눈을 감아라.' 눈을 감고 다시 지팡이로 더듬어 가니 무사히 집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떠진 눈을 다시 감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다시 그 본래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10여 년 다례를 공부하신 분이 이 책을 읽고 허탈한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교토 노무라박물관 관장께서 저의 책을 보고 만나자는 연락을 해온 적이 있습니다. 값진 다도구를 많이 컬렉션하고 있는 박물관입니다. 그 분이 한국으로 저를 찾아왔고 한국의 발효차와 일본의 말차, 후지산 중턱의 차를 보관하던 굴에 관한 차보관법 등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국토의 재발견

 

-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등 유럽의 18세기는 여행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여유 있는 귀족들이 문화의 본고장을 여행하고 싶은 욕구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였지요. 조선에서도 국토의 재발견이 일어난 시기로 많은 산수기행문이 발표됩니다. 여행의 인프라가 구축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로망이 확충되고 상업자본이 형성 된 거지요. 그런데 중앙정국에서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그 지역이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예컨대 금강산은 노론의 터였습니다. 노론 사람이 그곳을 여행하게 되면 지방 관아에서 잠자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준비해주었지요. 그들의 여행에 금강산의 사찰 스님들이 가마를 메느라 수도를 못할 지경이었어요. 반면 남인들은 그곳을 여행할 수가 없었지요. 연고가 없으니 잠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청량산은 퇴계 이황의 산이었고, 지리산은 남면조식의 산이었으며, 속리산은 우암송시열의 산이었습니다."

 

- 현재 어떤 책을 준비 중이신가요?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에 정약용과 제자 황상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이 두 분의 관계를 더 깊이 연구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1여 년 동안 몰두해왔던 그 작업이 마무리되어갑니다. 지난밤에도 그 작업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한 것입니다."

 

만남을 함께한 저의 처가 말했습니다.

 

- 정약용과 황상의 사제 간의 얘기는 저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챕터였었는데…….

"네, 그곳에 단지 18페이지에 거쳐 언급된 얘기를 실마리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관련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서술해왔습니다. 아마 600페이지 분량의 책이 될 것 같습니다."

 

- 선생님의 글에는 맛이 있어요. 고전을 담고 있으면서도 바로 오늘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의 처 같은 여자들도 두루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한학을 공부하시게 되었나요?

"저는 한양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대학 4학년 때 한문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맹자를 읽게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에 국한문을 함께 배운 사람인데 그것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 수모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 '한국한문학'을 전공하고 공부하게된 것이지요. 그때 한문강좌가 폐강이 될까 봐 주변 친구들을 강권해서 그 과목을 듣게 하는 열성으로 매달렸습니다. 저는 외국어로서 한문을 공부한 것입니다."

 

- 대학 강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저술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어려움이 있지않나요?

"강의준비가 저술에도 상호보완적이기도 합니다."

 

- 이쯤 대학에서 강의부담을 줄여주는 연구교수을 선택할 수도 있던데….

"저희 대학은 아직 투트랙(Two track)제도가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년은 안식년이라 큰 기대로 명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1년간은 어디서 면벽을 하실 지요?

"외국대학의 연구소에 신청을 넣을까 싶습니다."

 

뜬 인생 반나절의 한가로움

 

바쁜 분의 발걸음을 너무 오래 잡아두었다 싶었습니다. 빈 노트를 내밀었습니다.

 

"한구절 저를 위해 남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민 선생님은 '우득부생반일한(又得浮生半日閒)'이라고 적었습니다.

 

 

정민 선생님의 <책 읽는 소리>의 '옛 사람과의 맛난 만남'이라는 글에 아래 글이 나옵니다.

 

"옛 시인은,

그대와 함께 나눈 하루 저녁 대화가

십 년간의 독서보다 외려 낫구려

與君一夕話  勝讀十年書)

라고 회심의 벗을 만난 기쁨을 노래하였다. 대체 십 년의 독서와 맞바꿀 하루 저녁의 대화란 얼마나 개운한 것이었을까.

 

죽원 지나던 길 스님 만나 담화하니

뜬 인생이 반나절의 한가로움 얻었네.

因過竹院봉僧話  又得浮生半日閒

 

이 또한 예기치 않은 만남이 가져다 준 잔잔한 기쁨을 구가한 것이다. 부질없는 인생에서 기약 없이 누린 이 반나절의 한가로움이야말로 그간의 누적된 피로를 일거에 씻어줄 청량제가 아니겠는가?"(31페이지)

 

'뜬 인생 반나절의 한가로움'이란 바로 이런 풍경이구나 싶습니다.

 

정민 선생님이 지금 막 새로운 집필의 종착점에 다다른, 처가 눈물로 읽었다는 <미쳐야 미친다>의 정약용과 황상의 글의 첫단원입니다.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만남 앞에서도 길 가던 사람과 소매를 스치듯 그냥 지나쳐버리고는 자꾸 딴 데만 기웃거린다. 물론 모든 만남이 맛난 것은 아니다. 만남이 맛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외손바닥으로는 소리를 짝짝 낼 수가 없다."(177페이지)

 

가을 빛 속 정민 선생님과의 한 나절, 참 맛난 만남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정민, #미쳐야미친다, #책읽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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