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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늘 얘기치 않는 일이 벌어지는 법. 무려 14년만의 일본 크루즈 여행. 발단은 일본 도착지 주소 때문이었다. 묵을 호텔을 예약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도착지 주소가 따로 없었다.

하여, 비워 둘 수는 없고 해서, 오래 전 알았던(지금은 소식이 끊긴) 지인의 집주소를 적을까, 한때 알바 했던 곳의 주소를 적을까 고민하다 알바 했던 곳의 주소가 쉬워서 그곳을 적었다. 양국은 3개월 무비자 협정도 맺은 사이이니 주소는 그냥 형식적으로 적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헉!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즉, 친구와 내가 적은 주소지가 신쥬꾸(新宿) 모 커피숍이었기에 그들은 자연스레 돈 벌러 가는 것이려니 의심한 것이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나 싶더니, 아닌 게 아니라, 한쪽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했다. 갑자기 당황이 되면서 이거이거, 간(?)도 못보고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늘이 노래졌다.(웃음)

'모처럼 용기를 내어서 왔는데 이게 뭐람, 정말이지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우린 별 뾰족한 수 없이 그들이 가리키는 별도의 의자에 앉았다. 그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우리처지가 딱해보였던지 단체여행 가이드 한사람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사연을 듣더니.

"다른 사람들 심사 마치고 제일 나중에 할 겁니다. 일본은 주소를 중요시 합니다. 여행 가시는 도시의 호텔주소를 적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안 되었을 텐데..."
"그러니까, 불법 취업이 아님을 설명하면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한 시간여 후,  모든 사람들의 입국심사가 끝난 후 본격적인 심문 아닌 심문이 시작되었다.

"왜 이 주소를 적었나요?"
"아는 주소가 이것밖에 없어서 단지 적었을 뿐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이해 안 됩니다."
"(웃으며) 이해하세요. 정말입니다! 옛날 유학시절 알바 하던 곳으로,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칸을 비워 둘 수 없어 썼을 뿐입니다."

믿어라, 못 믿겠다, 실랑이 하다가 귀국 예약권을 보여주었더니, 왜 주소는 도쿄라 쓰고 돌아가는 것은 오사카냐고 또 따졌다.

"도쿄에 갔다가 최종적으로 오사카에서 귀국하지 말란 법이 있나요? 그러나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갑자기 도쿄에 대한 흥미가 삭 가시는 군요."
"아무튼, 우리는 납득이 안 됩니다."
"믿어주세요. 취업이 웬 말입니까. 14년만에 여행 한번 하겠다고 모처럼 마음을 먹었는데... 오해하는 마음은 이해하나 사실이 아니니 믿어주세요."

그들로서는 뭔가 한건 잡았다 싶었는데 영 아닌가 싶기도 하고 혼란스러운가 보았다. 수시로 사무실을 들락날락 안에 있는 사람들과 상의 해가며 추가로 묻고 또 물었다. 그래서 왜 똑같은 말 자꾸 묻느냐, 몇 번이냐 말해야 되냐 하다가, 옳거니, 그래 마음껏 물어라로 전략을 바꿨다. 그들이 자꾸 다각도로 묻는 것은 나의 말속에서 거짓말을 찾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정말 불법 취업이었다면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질문공세를 받았다면 중간에 눈동자가 흔들리며 인정하고 말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사관은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눈동자를 뚫어지게 살피며 물었기에 나 또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질문을 하다하다 그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까지 시시콜콜 물었고 나는 허참,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냐며 대답했다.

"여행 일정을 다 말해 보세요."
"원래는 별다른 일정 없이 발길 닫는 대로 즉흥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것이었지만 굳이 그렇게 물으니 할 수 없이 일정을 정할게요. 일단 지금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역에 가서 청춘 열차 티켓(여름 할인 티켓)을 끊을 겁니다. 그리고 몇 번의 갈아탐 후 히로시마 역에 도착해서 역 안내소에서 묵을 곳을 안내 받아 숙소에 짐을 부리고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갈 겁니다."

"히로시마 공원에는 왜 가죠?"
"알다시피 후쿠시마 지진해일로 원전사고의 위험이 얼마나 인류 모두에게 당면한 난제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한 고통을 이미 경험한 히로시마 사람들의 아픔을 평화공원의 원폭 돔 등을 보면서 느껴보고요. 또, 핵에너지로부터 벗어나려면 세계시민들은 저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할까 등 인류의 미래와 원자력에 대해 두루두루 생각해보고 싶습니다(일부러 거창하게).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후쿠시마 원전사고 정말 놀라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것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고요. 일본이 잘 극복하면 다른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핵 없는 세상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요? 시사주간지 '아에라'가 현 상황의 나아 갈 길에 대해 보다 진실을 말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좌우지간 일본사람들 힘내시고. 후쿠시마 사람들도 힘내시고..."

"일본 사람들 힘내라는 말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보내주든가.)"
"(그것과 이것은 별개 임, 착각하지 마쇼.)"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상업 전시관.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상업 전시관.
ⓒ 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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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히로시마 이후의 여행지도 말로 미리 갔다. 오카야마는 내릴까 우쩔까 고민이고, 고베 찍고, 돗토리 현 찍고, 교토에 가서 일박하고, 나라 갔다가 오사카로 와서 다시 일박한 다음 도톰보리 가서 푸짐하게 먹고 오사카 항구에 도착하면 되겠지요?

아무튼 그런 식의 개괄과 별의별 구차한 질문과 대답을 다하다가 심사관이 사무실로 상의 하러간 막간을 이용하여 우리를 지키고 있던 젊은 직원과 잠시 수다를 떨었다. 한국드라마나 한류가수 좋아하느냐, 정말 인기 있느냐 물었다. 그는 카라가 소녀시대보다 더 인기 있다고 하였다. 자신도 카라 쪽이 더 좋다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는 '현빈'이 최고로 인기 있는 배우인데 일본 아줌마들이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척 궁금하다며 나중에 <시크릿 가든> 방영되면 꼭 보라며 추천했다. 그 직원은 문근영, 장근석이라면 몰라도 현빈은 아직 듣보잡인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명동과 제주도에 가봤다는 얘기를 하였다(굳이 그 직원과 얘기를 한 이유는 취업 아닌 여행이 목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심야 우등 고속은 무섭나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고 시설도 좋습니다."

"여차하면 호텔 대신 심야고속도 한번쯤 이용할까 합니다."
"그것도 괜찮지요. 되도록 돈은 적게 의미는 깊은 그런 여행을 하고 싶은 거군요."

"바로 그거예요. 저, 저 높은 사람에게 얘기 좀 해줘요."(웃음)

라면과 계란 덮밥과 모밀국수, 히로시마 라멘은 얼마나 짠지 소태가 따로 없었다. 생각만 해도 아우, 짜!
 라면과 계란 덮밥과 모밀국수, 히로시마 라멘은 얼마나 짠지 소태가 따로 없었다. 생각만 해도 아우, 짜!
ⓒ 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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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온 심사관이랑 몇 번이나 더 했던 말 또 하며 옥신각신하다 이윽고, 결론은 해피엔딩. 하다하다 안 되어 마지막으로 가방을 열어 두 권의 책과 책 크기 만 한 일기장을 보여 주었다. 두 권의 책은 다름 아닌, <황하에서 천산까지>와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였다. 두 책은 다행히 사진이 있어서 그들이 한글을 몰라도 내 설명을 수긍하기 쉬웠다.

"이것 보세요. 취업하러 가는 사람의 가방이 이렇게 가볍겠어요? 그리고 책을 이렇게 넣어갈까요? <기생충...>은 재미를 위해, <황하는...>는 여행지에서 또 다른 여행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아 넣었습니다. 최근 산 책들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일기장 보세요. '2011년 7월 23일'이라고 진하고 크게 써져 있죠? 어젯밤 배에서 잠이 안 와 로비에서 쓴 것입니다. (대 여섯 장 되는 일기를 넘기며, 웃으며) 번역해 읽어 드릴까요?"
"......."

그제야 할 수 없다는 듯, 심사관은 젊은 직원들에게 지문 찍는 것 도와주라 시켰고. 우리는 재일 교포들의 그 한 많은 투쟁의 사연이 담긴 지문을 얼씨구나 찍어서 송구했고 씁쓸했다. 물품 검사 등 최종 심사가 끝난 후, 카라가 좋다던 직원은 건물 밖으로 까지 걸어 나와 시모노세키역의 위치를 알려주며 즐거운 여행을 빌어주었다.

여권과 각종 안내 책자와 지도
 여권과 각종 안내 책자와 지도
ⓒ 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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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안도의 심호흡을 한 다음 친구와 나는 '에잇~!'하며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씩씩거리며 갖은 욕*&%$#y@#$%^&*@#$%^&$*%&#$......을 다했다. 한편으론 이 떫은 기분도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될까 하며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에 다음에는 여행 첫날 하루정도는 예약호텔에서 잠을 자자고.

가끔 다른 사람의 여행기에서 입국심사에서 난리 났네, 어쨌네 읽은 기억은 있지만 내가 설마 그런 경험을 할 줄이야~!^^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3~28일 사이에 있었던 일본 여행담입니다.



태그:#일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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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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