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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불교는 어쩜 죽은 불교일지도 모릅니다.
 박노자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불교는 어쩜 죽은 불교일지도 모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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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3.22-3.16-3.12-3.00

뜬금없는 숫자가 아닙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전국 16~69세 남녀 1512명을 면접 조사(9월26일~10월15일)해 발표한 '한국의 사회문화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중 '신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분야별 신뢰도를 5점 만점으로 해 조사한 결과 의료계(3.22)-시민사회(3.22)-학계(3.16)-대기업(3.12)-종교계(3.00) 순으로 나왔다는 내용입니다. 

대기업보다도 믿지 못할 '한국 종교계'

종교의 근간, 종교 집단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은 누가 뭐래도 믿음(신뢰)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 현재 한국 종교의 신뢰도는 무한경쟁의 전장인 대기업,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기업보다도 못한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11월 2일 현재 인터넷 대안언론 <불교포커스>에 실린 머리기사의 제목은 "불교, 정부의 수족이 될 건가?" 입니다. 조계종의 핵심 사업에 소요되는 대부분의 예산을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행태를 꼬집고 있는 내용입니다.

불교계에서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내용과 기사는 불교계에서 말하는 자업자득, 자작자수로 드러난 한국 종교계의 실상이자 한국불교계의 자화상입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나 보도가 한국 불교(조계종)에 대한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평가라면 박노자 교수가 짓고 <한울과 사상사>에서 펴낸 <붓다를 죽인 부처>는 한국사를 전공한 학자가 좀 더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한국 불교계를 진단하고 직시한 내용입니다. 

러시아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해 2001년,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 저자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불교 사상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대표적 진보 지식인입니다. 

박노자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불교는 '죽은 불교'

박노자 교수가 들여다보고 진단하는 한국 불교는 시류에 편승해 늙어 있고 '기도발'에 병들어 있습니다. '불사'에 멍들어 있고 '상像'에 홀려서 그 실체가 혼미한 상태입니다. 국가 권력에 순응하느라 '계'를 외면하고, 전통을 고집하느라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붓다를 죽인 부처> 표지
 <붓다를 죽인 부처> 표지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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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불서佛書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일방적인 찬탄이거나 뜬구름 같은 설화이지만 <붓다를 죽인 부처>는 한국불교에 대한 애증이며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입니다.

초호화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사찰의 고용자들에겐 노조조차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한국 스님들도 외형적인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 생활태도나 이론적인 토대는 같다. -본문 279쪽-

국가(특히 군대 당국)와 자본 등 사회적 고통을 제공하는 자들과의 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다. -본문 280쪽-

살갗이 살짝 찢어진 정도의 상처라면 소독을 하고 꿰매는 것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암처럼 전이되는 특성을 가진 환부를 치료할 때는 주변의 조직까지 깊숙이 파내야 하듯이 저자는 불교계에 만연해 있는 병폐를 모질다 싶은 정도로 적나라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2,000년대의 두 불자,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병역거부를 선택한 오태양씨와 김도형씨의 근본주의적 양심을 '나 몰라라' 한 한국불교계를 적나라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참 날카롭게 지적하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 줄 한마디가 불교계 지도자들에겐 많이 아프게 들리겠지만 애정이 담긴 진단이며 처방입니다. 단언은 달고 충언을 쓰다고 하였습니다. 진정으로 한국불교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고찰 할 수 없는 진지한 내용입니다.

병폐와 폐단은 칼질이라도 할 듯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되는 부분은 대안이 될 수 있는 논리를 제시합니다. 진보 지식인의 근본주의적 주장 같지만 긍정적이고 수용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한국 불교가 추구해 나갈 방향을 가리키는 원론적인 처방입니다.   

붓다가 설한 '자비'의 윤리를 상대화하고 대신 송나라 귀족 승려들의 '영적인 유희'를 절대화한 오늘날의 종단 불교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지금 전쟁과 경쟁의 나락으로 이끌려가는 사회에 필요한 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같은 법어가 아니다. "모든 산 것들여, 편안하라. 안락하라"는 적극적인 대타적 對他的 원력願力이 필요하다.

수행 원리로서 선禪은 필요하지만, 불자의 궁극적 목적은 신비화된 '깨달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행복이다. 화석화한 전통과 무관하게 붓다의 원리 원칙과 초기 불교의 정신에 근거해 재가자 위주의 새로운 민중적 불교를 백지白紙 상태에서 새롭게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짐이 될 뿐인 전통들을 폐기해야 살아 숨 쉬는 불교로 거듭날 수 있다. -본문 287쪽-

불교계, 재가 불자들 모두에게 자화상을 비춰 줄 거울

거울을 보지 않으면 늙고 병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거울이 없다면 맑은 물에라도 비춰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얼굴에 묻은 티끌, 깊숙이 파인 주름, 쭈글쭈글해진 피부, 광채를 잃은 눈동자, 서릿발처럼 허옇게 쉰 머리카락, 등 굽은 허리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붓다를 죽인 부처>는 부처님 법대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 볼ㅅ 있는 거울이 될것입니다.
 <붓다를 죽인 부처>는 부처님 법대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 볼ㅅ 있는 거울이 될것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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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에서도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의든 타의든 귀도를 이탈한 한국 불교의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남들은 다 보고 있는데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 건 거울을 보지 않아 늙고 병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지 못하고 누추한 얼굴을 들이밀며 '나 예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껏 있었던 한국불교계에 대한 이런저런 고언이나 질타가 물결에 비추는 거울처럼 조금은 두루뭉술했다면 박노자 교수가 쓴 <붓다를 죽인 부처>는 여드름 자국 같은 부끄러움과 땀구멍 같은 체제적 모순까지도 또렷하게 비춰줄 유리알 명경이 될 것입니다. 

파업하는 노동자를 위해 연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다거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고 읽는 등의 지적 작업 역시 집단적 해탈을 향한 수행의 일종이라 하겠다. -본문 12쪽-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수행, 해탈을 향한 수행은 결코 아리송하거나 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 동참하는 작은 행동과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저자가 묻고 도법 스님이 답한 8편의 대담까지 더해 놓아 한국 불교계의 실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진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불교계지도자들에겐 초발심을 추스르게 하고, 재가 불자들에겐 미신迷信적 기복 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참된 불자의 길을 안내 받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붓다를 죽인 부처>|지은이 박노자|펴낸곳 <인물과 사상사> | 2011.10.22 | 14,000원



붓다를 죽인 부처 - 깨달음의 탄생과 혁명적 지성

박노자 지음, 인물과사상사(2011)


태그:#부다를 죽인 부처, #바노자, #인물과사상사,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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