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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교회 등의 종교시설, 서원이나 정자 등을 제외하고 사람이 실제로 산 '집'에 한정하여 살펴볼 때, 대구의 두드러진 집으로는 어떤 곳이 있을까? 적어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정도는 되어야 타지인들에게 내세울 수 있을 텐데, 과연 어디?
 
먼저 초가이면서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200호로 인정받은 '조길방가옥'부터 소개할 만하다. 보통 중요민속자료의 지위를 얻은 집이라면 대단한 양반들이 99칸 등 으리으리한 와가를 지어 남긴 것들이 다반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조길방가옥은 초가에 불과한데도 그 명예를 얻었으니 '대구의 집'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조길방가옥은 평범한 백성 조길방이 공들여 손수 지은 것으로 세상에 태어난 지 200년 이상 된 조선 후기의 초가집이다. 달성군 가창면 비슬산 한쪽 자락 깊은 산중에 있어 큰 길에서는 그 존재를 짐작도 할 수 없다. 난리를 피해 골짜기로 숨어든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켜켜이 묻어 있다는 말이다.
  

달성군에 있는 삼가헌 역시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104호)이다. 박팽년의 11대손인 박성수가 영조 45년인 1769년에 지었다. 양반가이지만 중문채를 특이하게 초가로 지었고, ㅁ자형의 본채도 두 동으로 나누어 건축하여 색다르면서도 서민적인 풍모를 강하게 풍겨준다.
 
삼가헌의 특장은 집 옆에 서당 겸 정자를 달아 내었는데, 그 뜰앞에 작은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아기자기하게 심어 두었다는 점이다. 철에 맞게 방문하면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겨울철에 가보면 얕으면서도 청아하게 푸른 물빛에 취한다. 그리고 뜰에서 연못 가운데의 화단까지 물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도 눈길을 끈다. 그저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이 다리답지 않은 다리가 재삼 이 집의 소박한 체취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조길방가옥이나 삼가헌에 비하면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261호는 그 규모가 사뭇 다르다. 흔히 백불고택이라 부르는 동구 둔산동의 이 양반 가옥은 대구에 남아 있는 주택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저술된 이래 70년 이상을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묻혀 지냈던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이 1694년(숙종 20)에 본채를 지었고, 1905년(고종 4년)에 사랑채가 중건되었다.
 
백불고택이 있는 둔산동 옻골마을에는 고가 한옥들이 많다. 그래서 근래에는 한옥체험장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게다가 <반계수록> 이외에도 왕건의 군대가 주'둔'하였던 '산' 아래 마을이라 하여 동명이 둔산동이 된 만큼 역사적 이야기도 지닌 곳이다. 이 마을은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납부해주고, 굶는 이가 없도록 향약을 만들어 실천한 대선비 최흥원의 명성에 힘입어 점점 높은 이름을 얻어가고 있다.    
 
문씨세거지는 백불고택과 어깨를 견줄 만한 한옥 고가들의 운집지이다.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나라 사람들을 '백의민족'으로 만든 문익점의 후손들이 인흥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터에 자리를 잡고 대대로 살아왔다. 조길방가옥, 삼가헌, 백불고택처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의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민속문화재 3호의 명예는 누리고 있다.
 
수십 채의 한옥 고가 중 특별히 돋보이는 집은 수봉정사와 광거당이다. 수봉정사는 손님도 맞고 일가친척 회의도 열었던 집이고, 광거당은 학문과 수양의 요람이었다. 또 남평문씨들의 정신은 인수문고에도 잘 나타난다. 이 집은 1910년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서고(書庫)로 건축하였으며, 지금도 인근 주민들의 도서관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문씨세거지에서는 고색창연한 흙담장들도 특별한 볼거리이다.  

 

현대로 들어와서는 '3.1운동로'의 선교사 주택들이 볼 만하다. '대구3.1운동역사관'으로 쓰이는 블레어주택(유형문화재 26호), 챔니스주택(동 25호), 스윗즈주택(동 24호)이 연이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풍경은 '여기가 대구에 처음 생긴 서양식 주택 단지였구나' 싶은 찬탄을 저절로 불러 일으킨다. 또한 집들 사이에 있는 <동무 생각>의 음악가 박태준 노래비도 이 동산의 운치를 한껏 올려주는 데 기여를 한다. 
 
선교사주택들을 돌아 약전골목 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계단에 서면 상화고택과 국채보상운동의 서상돈고택이 발치에 들어온다. 그 옛집들을 햇살 아래로 바라보노라면 '정녕 이 길이 3.1운동로다운 역사적 의미의 주거지로다' 싶은 강렬한 느낌이 일어난다. 이 길을 1919년 당시 어린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내달렸던 것이다. 
 
3.1운동로를 내려가면 바로 길 건너, 약전골목으로 들어가는 첫머리에 상화고택이 있다.  이 집은 1901년 4월 5일부터 1943년 4월 25일까지 이 세상 사람이었던 상화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고택이다. '빼앗긴 들'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시인은 하늘나라로 갔다. 상화고택은 작은 문학관이자 그의 기념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이 살았던 고택이 상화고택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 답사객의 더욱 감회를 애틋하게 한다.
 
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중략)
우리들도 한국 백성 아닐런가. (중략)
적의 공격 없어도 나라 자연 소멸되면,
아아 우리 백성들 어디 가서 사나.
이 나라 강토 없게 되면 가옥, 전토는 뉘 것인고.
 
이병덕 김인화 등이 만들었고, 당시 사람들이 애창했던 '국채보상가'의 한 부분이다. 모두들 서상돈을 본받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서상돈을 잊어가고 있다. 2011년 10월 5일 대구의 국채보상공원 안에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어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적 기부운동을 되살릴 계기가 마련되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바짝 붙은 고층빌딩에 가려 언제나 음지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서상돈 고택에 앞으로는 환한 햇살이 비치려나.
 

태그:#이상화, #서상돈, #백불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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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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