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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고전의 맛을 알아가던 참에 느닷없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중용, 인간의 맛> EBS 강의가 조기 종영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총 36강에서 18강으로 반토막 낸다고 하니 아니함만 못하게 됐다. 더욱이 이미 24강 분량까지 녹화돼 있다고 하니 EBS의 다급한 종영 결정의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EBS측은 "강의 중에 나오는 도올의 '거친 표현' 때문"이라고 조기 종영 이유를 밝혔다. 2년 전 <논어> 강의부터 시작해 지난 25일 밤 방영된 <중용, 인간의 맛> 16강까지 그의 강의는 녹화를 해서라도 빼놓지 않고 봤지만, 표현이 거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비단 나만의 느낌일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도드라진 억양을 활용하고 중요한 부분에서는 침이 튈 만큼 갈라진 목소리를 내곤 하지만, 그건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도올 특유의 강의 방식일 뿐이다. 이를 강의에 대한 열정이자 매력으로 봐야 옳지, 두루뭉수리 거칠다는 이유로 문제 삼는다면 현직에 있는 우리나라 교사나 강사들 중 쫓겨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무릇 유능한 강사는 청중을 압도하며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그들의 가슴에 심어줄 수 있는 있는 열정을 지녀야 한다. 그러자면 다소 과장된 억양과 동작이 나올 수도 있고, 청중은 그런 강사의 모습에서 열정을 느낀다. 설마 이번 결정을 계기로 실제 강의에서 '바르고 고운' 방송용어만 써야 한다는 '보도지침'이라도 내리려는 것일까.

지적 쾌감 선사하는 도올, 단지 말투가 문제라고요? 

20일 오전 충남도청 대강당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도올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
 20일 오전 충남도청 대강당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도올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
ⓒ 충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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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주로 대학생을 비롯한 성인들이다. 설령 강의 중 정제되지 않은 거친 표현이 나왔다고 해서 성인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게 될 것이라 여긴 걸까. 도올 특유의 말투가 멀쩡하게 진행되던 강의에 대한 퇴출 사유라고 한다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특정 종교를 비방했다는 '죄목'도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다. 여기서 특정 종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기독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강의는 미션스쿨인 한신대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실제로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점 인정 수업이다. 게다가 도올 역시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다.

그런 그가 기독교를 바라보는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해석 방법을 제시하고, '절대적인 건 없다'며 '끊임없이 회의하라'고 설파한다. 그의 날카로운 칼날은 비단 기독교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서양 고전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 유교, 불교 할 것 없이 동서양 모든 사상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리'하는 모습을 통해 청중은 지적 쾌감을 얻고 많은 것을 깨닫는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매주 월요일, 화요일 밤을 목을 빼며 기다리는 건 강의를 통해 깨닫고 느끼게 되는 도올의 '매력' 때문이다. 나 역시 기독교 신자다. 내가 먼지가 수북하게 쌓였던 성서를 다시 꺼내 읽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다른 시야를 얻게 된 것도 순전히 그의 덕이다. <요한복음 강해> 같은 그의 저작은 한마디로 나를 '개안'시켜 준 책이다.

'교양'마저도 정부 입장을 홍보해야 합니까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대학 시절 학점 딴답시고 잠깐 펼쳐봤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도 다시 불붙었다. <대학> <논어>도 다시 꺼내 읽었고, 지금은 비록 해석본이긴 하지만 원문과 대조해가며 <맹자>를 만나고 있는 중이다. 그 고전 읽기의 재미를 과연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이번 강의를 통해 <중용>을 맛보고, 그 어렵다는 <주역>도 언젠가는 도전해 보리라 이내 마음먹은 참이다. 이젠 수업시간 입시에 목 매단 고등학생 제자들에게도, 심지어 초등학생 아들 녀석에게도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주저 없이 동양고전을 추천할 정도가 됐다.

종교 단체가 나서서 강의 내용을 꼬투리 삼아 '이단'이라고 꾸짖었다면 이처럼 황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강의가 열리고 있는 대학측에서 기독교를 비방했다고 문제 제기했다면 모를까, 방송사 측에서 특정 종교 비방 운운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백 보 양보한다 해도 종교적 중립을 엄연히 지켜야 할 EBS가 스스로 기독교 방송임을 인정한 꼴이다. 이번 조치는 모든 공중파 방송이 시나브로 권력의 시녀가 돼가는 현실에서 그나마 양질의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고 평가 받아온 EBS마저 쓰러져가는 징후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더 어이없는 것은 교과부 관련 부분이었다. 도올 선생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번은 대학평가를 하는데, 교과부에서 부실학교라 규정할 때 취업률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서, '그러면 대학이 무슨 대학이 되느냐. 추계예대와 같은 학교는 얼마나 좋은 학교인데 (평가를 그렇게 받았다)', 그런 얘기도 다 자르더라. 사사건건 그랬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이번 결정에 '외부 압력은 전혀 없었다'고 강조하는 EBS는 이 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교양 강의조차 정부의 입장을 반영하고 심지어 대변하는 홍보물로 여기는 듯하다.

사실 방송사 측이 내세운 이유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도올이 현 정부의 4대강 사업과 대기업 편중 정책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미운털이 박힌 결과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만약 표현이 거칠다면 시청자들이 판단할 것이며, 종교 비방이 문제라면 해당 종교 단체와 교리 논쟁을 벌이면 된다. EBS의 이번 결정은 도올 선생의 말처럼 "정치적 압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EBS의 도올 퇴출, 역사의 퇴행입니다

EBS가 TV 특강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 방송을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26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가 EBS 방송 퇴출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벌이자, 지나가던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EBS가 TV 특강 '도올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 방송을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26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가 EBS 방송 퇴출에 항의하며 1인 시위를 벌이자, 지나가던 시민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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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를 권력의 입맛대로 사유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역사의 퇴행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본연의 역할은 깡그리 잊은 채 이웃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그저 '시끄럽다'고 일축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방송사가 시청자들에게 지적 영감을 준 대중 철학자더러 '불온하다'고 낙인찍고 내쫓는 사회가 돼버렸다.

불과 몇 년 만에 말 한마디 하고 글 한 줄 쓰면서도 권력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세상이 됐다. 내로라 하는 유명 인사들조차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하루아침에 추풍낙엽처럼 잘려나가는 판국에 이 땅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할까. 과거 군사정권 시절이 이랬을까 싶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부터 시작해 가수, 개그맨을 지나 이제는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현 정부에 밉보인 사람들은 모두 내쫓기는 '순결한' 방송이 판을 치고 있다. 게다가 이런 현상에 대해 '침묵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EBS도 여느 방송사처럼 예능 프로그램이 활개 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차라리 다음 개편 때 아예 방송사들 모두 '땡이 뉴스'를 신설하는 것은 어떨까.


태그:#도올의 중용강의, #교육방송(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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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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