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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진행 중인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 앞에서 시위대들이 시민들을 향해 '99%가 1%보다 크다'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진행 중인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 앞에서 시위대들이 시민들을 향해 '99%가 1%보다 크다'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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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99%'는 '1%'의 탐욕에 저항한다."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의 구호다. 이 안에 시위대 수천 명의 다양한 요구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 때문에 구체적이고 단일한 요구사항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점거 자체만으로도 이미 가진자 만을 위한 미국식 자본체계를 거세게 뒤흔들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의 핵심 구호가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점령한 사람도, 점령지도 없다. 광화문에서, 여의도에서, 대학가에서 사람들은 말한다. "1%의 특권층이 아닌 99%의 서민을 위해 투표해 달라"고. '나경원 대 박원순'의 프레임에서 '1% 대 99%'의 프레임으로 옮겨가는 양상이다.

"나경원은 0.1% 특권층" vs. "좌익의 선동, 나경원 안 찍으려면 투표 마라"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 앞에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복지 예산 축소로) 아이의 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 앞에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복지 예산 축소로) 아이의 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 최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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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맞선 쪽에서는 '나경원 대 박원순'의 프레임을 고수하려고 안간힘이다. 네거티브 전략으로 재미를 보더니, "박원순이 네거티브의 원조"(이주영 한나라당 정책위의장)라고 맹공격한다. 예상대로 색깔론이 등장했다. "나경원 안 찍을 거면 투표하지 말라"는 '물귀신 작전'도 서슴지 않는다.

"10년을 망치고도 반성할 줄 모른다. 이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특권세력, 1%만을 위한 한나라당 정권을 심판하고 서울시민 99%가 행복한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나흘 앞둔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야권단일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이날 유세에는 민주당 등 야4당 지도부, 참여정부 인사, 시민 등 3000여 명(경찰 추산)이 참여해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 그들 역시 대한민국을 "1%를 위해 99%가 희생해야하는 특권과 반칙의 국가"라고 규정하며, 현 정부를 성토했다.

'1%의 탐욕에 대한 99%의 분노'를 이끌어내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먼저였다. 손 대표는 지난 21일 "지금 대한민국은 1%를 위한 사회로 전락하고 있다"며 "10·26 재보선은 99%를 위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재반격의 날"이라고 말했다.

김진표 원내대표는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의 강남 고급 피부클리닉 이용에 대해 "99%의 국민은 '억' 소리 내고 쓰러질 형편"이라고 비난했고, 이인영 최고위원은 다이아몬드 반지 축소신고 의혹까지 거론하며 "나 후보는 대한민국 0.1%의 기득권으로 특권과 부유의 향유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몰아붙였다.

여의도뿐만이 아니다.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등 43개 청년·대학생단체는 지난 19일 기자회견에서 "이명박·오세훈 전 시장이 재임한 지난 10년간 뉴타운 재개발로 1% 부자만 배불렸고 청년들은 고시원·반지하·옥탑방으로 내몰렸다"며 "1%만을 위한 서울시정의 최대 피해자는 청년층"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88만원 세대'들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 첫 깃발을 든 사람들도, 대학 졸업 후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불안한 미래를 견디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미국판 88만원 세대'였다.

노동자들도 나섰다. 민주노총과 산별연맹 대표자들은 박원순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노동자들의 계급투표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오직 99% 민중의 분노의 대상인 1% 특권층이거나 그들과 결탁한 자들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에서 한 시위대가 '진짜 영웅의 적은 기업의 탐욕'이라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에서 한 시위대가 '진짜 영웅의 적은 기업의 탐욕'이라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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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한나라당은 '좌파 진영의 집권 시나리오'라는 걸 제시하며 색깔론으로 맞섰다. 차명진 전략기획본부장은 "민주화·복지화라는 (민주당) 목표가 종북 좌파의 부속품이 돼도 좋은가"라며 "종북 조종사·공무원이 널렸는데, 종북 시장까지 허락하겠느냐"고 말했다.

보수성향의 신문인 <동아일보>는 한술 더 뜬다. 김순덕 논설위원은 24일자 34면 '무너지는 그리스, 赤旗(적기)가 펄럭입니다'라는 칼럼에서 "무식한 대학생들은 지금의 '반값 등록금'이 미래 자신들의 연금인 줄 모르고 트윗질이나 하면서 청춘을 낭비하고 있다"고 했다. '88만원 세대'를 향한 '1%'의 조롱처럼 들린다. 그런데 '반값 등록금'을 약속한 쪽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었다. 그는 또 "미국의 개입으로 적화통일에 실패했다고 통탄하는 세력이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야권연대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고 있다"며 '색깔론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동복씨(전 국회의원-북한민주화포럼 대표)는 지난 23일 <뉴데일리>에 '서울 젊은이들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칼럼을 게재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소위 '1% 대 99%'의 대결구도로 몰아가고 있는 범야 세력의 선전은 사실과는 엄청나게 다른 좌익 세력 특유의 기만적 선전, 선동입니다…(생략) 젊은이 여러분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너무 미워서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나라당 후보가 너무 미워서 어떠한 경우에도 그에게 투표할 수 없을 경우 여러분이 취할 수 있는 선택 가운데는 차라리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차선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99%를 위해 투표소를 점거하라'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 중 한 학생이 "당신(1%)의 연봉이 20년동안 갚아야 할 나의 학자금 대출보다 많다"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뉴욕 맨해튼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 중 한 학생이 "당신(1%)의 연봉이 20년동안 갚아야 할 나의 학자금 대출보다 많다"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뉴욕 맨해튼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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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등록금을 내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이렇게 절규했다. 미국의 청년 실업률은 전체 평균 실업률인 9%를 훨씬 뛰어넘어 12%를 기록했다. 생존권과 미래를 위협받은 미국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이유다. '80대 20'으로 상징화되던 빈부격차가 이제 상위 '1%'와 하위 '99%로 구분 지어질 만큼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됐다.

"금융자본가들은 탐욕을 중단하라", "은행들은 구제 금융을 받았지만 우리는 쫓겨났다", "가난한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억만장자들", "공정한 분배, 일자리를 창출하라"

2008년 금융위기의 주범들은 억대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정치권은 부자감세를 추진하는 도덕적 해이를 보였다. 양극화·청년실업으로 희망을 잃어가는 미국의 모습이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한 분노의 물결은 '시카고를 점령하라', 'LA를 점령하라'로 이어지더니, 전 세계 80여 개국 1500여 개 도시로 확산됐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는 이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성을 갖는 사회적 어젠다로 자리를 잡았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에서 한 시위대가 탐욕스러운 부유층 '1%'를 상징하는 돼지 가면을 쓴 채 시민들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뉴욕 맨해튼 자유광장(주코티파크)에서 한 시위대가 탐욕스러운 부유층 '1%'를 상징하는 돼지 가면을 쓴 채 시민들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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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금융의 심장부인 여의도의 탐욕은 훨씬 심각하다. 금융권의 집단부실화로 인한 외환위기는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불러왔고 많은 국민들이 대량실업, 가계파탄, 소득격감으로 지금까지 고통 받고 있다. 막대한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은 금융권은 '공적자금=눈먼 돈=공짜자금'이라며 흥청망청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양극화·청년실업, 그리고 중산층의 붕괴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규제완화라는 명목으로 독점자본의 보호막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규제와 견제를 해체함으로써 시장만능주의가 금융과 자본의 탐욕을 키웠다. 골목상권의 밥그릇을 넘보는 유통재벌, 노동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임의적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대기업, 교육이 아니라 돈벌이에 여념 없는 사학재단 등 대한민국 '99%'의 분노가 '점거'로 발현될 여지는 충분하다.

광장에, 거리에 진을 치고 땅을 구르는 것은 무슨 거창한 혁명을 꿈꾸거나 미래 사회에 대한 숭고한 비전을 가져서가 아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가슴을 쳐 보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위기 앞에선 논리가 필요하지 않다.  

사실 '점거'라는 시위 형태는 뉴욕의 월스트리트나 이집트의 타히리르 광장보다 우리나라가 앞서 있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매장을 점거했고, 평택 대추리 사람들이 초등학교를 점거했고, 미국산 쇠고기 파동 당시 촛불소녀들이 서울 광장을 점거했고, 용산 철거민들이 남일당을 점거했다. 그리고 지금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은 35미터 높이의 크레인을 점거하고 있다.

애초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1% 대 99%'의 싸움으로 시작됐다.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이를 찬성한 대다수의 서울시민들에게 내몰려서 치러지게 된 선거다. 보수주의자인 이명박 대통령, 오세훈 전 시장, 나경원 후보에게 복지는 인간답게 살 '권리'가 아니라 귀찮게 구는 거지에게 던져주는 '시혜'이고 '동냥'이다.

서울 인사동 한 술집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99%를 위해 투표소를 점령하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서울 인사동 한 술집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99%를 위해 투표소를 점령하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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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양극화와 청년실업으로 생존권을 위협받는데도 정치권은 '99%'의 고통을 이해하고 보듬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안철수 현상'이 나타났고, 정당이 아닌 시민의 후보가 선출됐다. '1%'에 버림받은 '99%'의 저항이다. 그래서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나경원 대 박원순'이 아니라 '1%'대 '99%'의 싸움이다. 네거티브 비방전으로 그 본질이 감춰졌을 뿐이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선거가 다시 제 위치를 찾았다. 이제 투표하는 일만 남았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는 빵과 치즈를 저장하고 모포와 침낭을 챙기면서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인사동의 한 술집에 붙은 포스터는 '99%를 위해 투표소를 점거하라'고 한다. '1%'와 '99%'의 싸움, 누가 이길까?


태그:#서울시장, #월스트리트 점령, #이명박, #안철수,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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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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