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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다섯 번째, 이번엔 광주·전남·전북입니다. [편집자말]
고대 소설이나 설화에 나오는 인물과 내용을 정 반대로 가정하면, 재미있는 상황과 결론을 접할 수 있다. 가령, 서울로 간 이몽룡이 과거에 영영 급제하지 못했다면? 또는 과거에 급제했더라도 전라북도 남원에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면? 그럼, 춘향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흥부전><홍길동전> 등도 마찬가지다. <흥부전>에서 놀부가 아우가 되고 흥부가 형이라면, <홍길동전>에서 길동이가 서자가 아닌 양반가의 태생이었더라면, 결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 없는 일이다. 그래도 가끔은 가정을 해보고 싶을 때가 많다. 가령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후백제 견훤이 고려 왕건을 이겼더라면'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했더라면' 등을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전북 진안 죽도.
 전북 진안 죽도.
ⓒ 진안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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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은 전국 광역단체 가운데 상대적으로 빈곤한 지역이지만, 예전에는 사정이 달랐다.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였고, 해안과 섬 지역의 어촌도 내륙 못지않은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전라도는 나라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지방 물산이 풍부하고, 산지의 군현도 계곡물로 관개를 하여 흉작이 적고 수확이 많다.(중략) 군산도는 전라도 만경 바다 복판에 있으며, 역시 첨사가 관할하는 진영이 설치되어 있다. 그 복판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 있어 배를 댈 만하고, 앞은 어장이어서 매년 봄·여름에 고기잡이 철이 되면 각 고을 장삿배가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어 바다 위에서 거래를 한다."

풍요롭고 살기 좋았던 곳... 인구 유출이 가장 많다니

풍요는 지명에서도 묻어난다. 전북의 중심지 전주(全州)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완산(完山)이었는데, 전주와 완산의 '전(全)'과 '완(完)은 모두 '온전하다'는 뜻을 지녔다.

또 전주는 조선 이씨 왕조의 발상지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그리고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가 있다. 예전에는 호남의 물산이 전주에 집결해, 다시 한양으로 배송되었다.
전주는 나라살림의 40%가 넘는 물산을 중앙에 조달하는 호남의 수부였다.

반면 전주를 벗어난 전북 서부의 평원지대, 즉 지금의 새만금문화권은 양반과 부호에게 천대받고 수탈당한 농민과 천민들의 삶터였다. 전주가 만선의 풍요를 싣고 정박한 배라면,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인 금만평야와 서해바다는 그 풍요의 원천이었다. 그곳은 전통사회에서 가장 광대한 농경단지였으며, 가장 넓은 서민문화권이기도 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 250만 명이 넘었던 전북 인구가 매년 줄어 2000년 들어 190만, 2005년도엔 180만, 최근엔 170만 명대로 줄었다.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이유는 경제적 낙후와 이로 인한 경제활동 어려움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각종 경제지표가 전국 최하위권인 전북은 수도권 인구 유입엔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지난 2004년 한 해 동안 수도권으로 순 이동한 전북 인구는 3만7000명으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에도 수도권으로 이동한 2만8000명 중 60%는 서울로 주소지를 옮겼는데, 통계청 조사결과 서울 인구 가운데 전북 출신이 3번째로 많다.  

인구 감소 탓에 '나 홀로 졸업학교'도 지난해 9곳에 달했다. 전북도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졸업생이 1명인 초·중학교는 9곳, 2명인 학교는 9곳, 3명인 학교는 21곳이었다. 이들 학교를 포함해 졸업생이 5명 이하인 학교는 전체의 10.2%인 77곳에 달했다. 졸업생이 적은 곳은 대부분 농어촌의 벽지 학교다. 한때 풍요롭고 살기 좋기로 소문난 고장이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것은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탓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배제돼 지역발전이 지체됐고, 국내 대표적 농도라는 특성상 산업화의 그늘에 머물러야했다.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던 1960~1980년대에는 값싼 농산물을 공급하는 식량기지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농산물 수입개방의 제물이 되기도 했다.

이런 전북의 상황을 역사 등의 '가정'을 통해 돌아본자.

[#가정 1] 훈요십조...'배역'이 아닌 '배려'였다면

KBS 드라마 <태조왕건>에 등장했던 궁예(왼쪽)와 왕건(오른쪽).
 KBS 드라마 <태조왕건>에 등장했던 궁예(왼쪽)와 왕건(오른쪽).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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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낙후 원인을 정치적 차별과 산업화 과정의 소외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원인을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찾는 학자들도 있다. 

김성환 군산대 교수는 <새만금 문화권>(정보와 사람 출판, 김성화 외)이란 책에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에 맺혔던 원한을 그대로 백제 지방에 쏟았다"며 "그것이 고려시대에서는 풍수설과 곁들여 한 층 더 깊어져, 고려 왕건은 마지막 남은 후백제 세력이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이 못내 마땅치 않았다"고 해석했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지역차별과 정책 소외의 근원을 찾았다. 

943년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남긴 10가지의 유훈인 훈요십조 제8조가 없었더라면, 호남의 정치적 차별과 소외는 없거나, 덜했을 것이라는 역설적 주장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전한 훈요십조 8조는 "차현(車峴) 이남의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이라고 돼 있다.

여기서 차현 이남과 공주강외를 해석하는 시각이 분분하나 '차령산맥과 금강 아래 지역'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물론 당시 역사는 철저하게 승자주의적 시각에서 기술되었기에 얼마든지 위조됐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어느 지역이든 간에 한 나라를 개국한 왕이 훗날의 왕들에게 특정 지역을 가리켜 "'배역'하니 등용하지 말 것"을 엄하게 강조한 대목에서 정치적 차별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다. 만약 훈요십조에서 '배역'을 이유로 등용하지 말라는 주문대신 '배려'란 표현을 썼더라면? 이후 호남의 역사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가정 2] '정여립 사건'... '평등·상생'으로 조명됐더라면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다산초당 출판, 신정일 저) 책 표지.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다산초당 출판, 신정일 저) 책 표지.
ⓒ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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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선조 22년), 조선왕조 최대 옥사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000여 명의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대 피바람이 분 이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사가들은 이 사건을 "정여립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로 기록했다.
옥사의 공식문건인 <기축옥안>은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소실돼 당시의 기록은 단편적이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과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의 '선조조고사본말', 저자 미상의 <대동야승> 등에 일부가 전해진다.

기축옥사는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의 주도로 동인 세력을 탄압하는 당쟁으로 비화되었는데, 그 희생자들 대분이 호남의 동인들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를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정여립의 모반에서 비롯된 최대 옥사"라고 해놓고 정작 모반 자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정여립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론'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 체제하에선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지닌 사상가였다. 평등주의와 개혁·상생을 주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주에서 첨정을 지낸 정희증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통솔력이 있고 명석했으며, 제자백가에도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1570년(선조 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이 된 그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했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에 가담하여 왕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신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전북 진안군 죽도에 서실을 세워 활쏘기 모임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렸다.

1589년(선조 22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은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밀고했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한다. 그의 아들은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는데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인물들이 바로 정철 등의 서인이었다.

동인의 명사 중에서 이발·이호·백유양·유몽정·최영경 등이 단지 정여립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처형됐고, 정언신·정언지·정개청 등이 유배됐다. '정여립 옥사'는 2년에 걸려 처리되었고, 이때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다. 문제는 그 후 전라도가 '반역지향'이라 불리고, 인재 등용에 제한이 가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당시 옥사가 '모반'인가, '혁명'인가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다산초당 출판, 신정일 저) 저자 신정일씨는 "역모사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며 "때문에 지금 알려진 역사의 반대편에 선 인물들은 악인으로 낙인이 찍혀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름조차 남지 않게 됐다"며 밝혔다.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귀천의 씨가 없다. 천하는 백성들의 것이지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며 정여립을 단순한 혁명가가 아닌 동양의 위인으로까지 드높였다.

그는 또한 기축옥사를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반정사건으로 규정한다. 이를 계기로 선비들이 관용의 정신을 잃고 죽고 죽이는 당쟁으로 비화됐다고 본다. 정여립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제대로 기록되기만 했더라도 '반역'이란 딱지는 붙지 않았을 것이다. . 

[#가정 3] 폭정·가렴주구에 저항... 동학농민혁명 성공했더라면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홈페이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홈페이지.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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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이 꿈꾸었던 '대동'의 꿈과 차별, 수탈에 저항하는 지역 에너지는 다시 동학농민혁명의 불길로 타올랐다. 전북 정읍 고부에서 불씨가 지펴져 1년여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정신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됐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가 전라도라는 점에선 시선이 곱지 않다. 당시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여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했다. 또 조선시대 내내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폭정에 시달렸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했다. 동학농민혁명은 반침략·반봉건을 지향하고 외세와 집권층에 도전하며 개혁운동으로 전개됐다.

이는 전봉준이 천명한 4개 항의 행동강령에서도 나타난다. 첫째,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셋째, 일본 오랑캐를 내쫓아 성도를 밝힐 것. 넷째,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를 모두 죽일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사가들은 초기에 '민란', '동학난' 등으로 표기하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점점 격상시켰다. 이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했더라면 정여립이 꾸었던 자유·평등·개혁과 상생·대동의 꿈 등은 이뤄졌을까?

[#가정 4] 홍길동이 꿈꾸던 '율도국'이 부안 위도가 맞다면

만화영화 <홍길동> 포스터.
 만화영화 <홍길동> 포스터.
ⓒ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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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군 보안면의 우동리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이 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살았던 장소다. 한때는 '우반곡'으로 불렸던 곳이다.

이에 대해 김성환 군산대 교수는 "허균은 바로 이 지역에서 <홍길동전>을 저술하고, 동지들과 돌려 읽으며 부당한 차별과 탐학에 대한 저항의식을 나누었다고 추정된다"며 "훗날 혁명에 실패해 심문을 받을 때, 허균의 동지들은 그가 부안에 머물면서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까.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 <홍길동전>에는 허균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주인공인 길동은 홍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나 늘 천대를 받고 자란다. 그는 총명한 재주에 학식이 뛰어나 호풍환우하는 법과 둔갑술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멸시를 참지 못하여 집을 뛰쳐나와 적굴에 들어가 괴수가 되어 활빈당을 조직한다.

그는 각 지방의 탐관오리들과 토호들의 재물을 탈취하고, 가난한 양민을 돕다가 조정의 회유로 부득이 병조판서까지 되었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 난징으로 가다가 율도국에 정착해 이상적 왕국을 건설한다. 이 소설에는 저자 허균의 삶이 일부분 투영된 듯하다. 

<홍길동전>은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 주목 받았다. 무엇보다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율도국이라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현실의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특히 여기서 율도국의 실제 모델이 바로 그가 작품을 쓴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 부안 위도라는 설이 있다.  

불의에 저항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주의, 상생과 변혁을 갈망했다는 점은 홍길동, 정여립, 전봉준에게서 모두 찾을 수 있다. 그들의 활동 무대도 비슷하다. 그들의 정신과 꿈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곳. 그곳에 흐르는 피는 '반역'이 아닌 자유·평등·상생·개혁이 아닐까? 



태그:#동학농민혁명, #정여립, #홍길동, #훈요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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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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