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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 줄게, 새 책 다오!'. 중고 책을 기부하면 공부방 아이들에게 새 책을 선물합니다. 오마이뉴스는 CJ도너스캠프, 인터넷서점 알라딘과 함께 오는 11월 30일까지 '책 나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애독서'는 이 캠페인 가운데 하나로, 명사들이 감명깊게 읽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연재 기사입니다. 친필 사인을 담은 명사들의 추천 애독서는 책 나눔 캠페인에 참여했던 기부자 분들께 추첨을 통해 선물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박윤우 '도서출판 부키' 대표.
 박윤우 '도서출판 부키' 대표.
ⓒ 도서출판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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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가운데 감명 깊고 인생에 영향을 주었던 책을 한 권 선정'하란다. 그것도 1년에 수십 종의 책을 펴내는 출판사 사장에게. 생각해 보니 난감하기 짝이 없는 요청이다.

51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을 지내며 겪은 수많은 사건과 그 각각의 사건을 겪으며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이뤄진 온갖 화학적 변화는 논외로 하고, 책으로만 따져도 오늘의 나는 수많은 책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 한 권, 많아도 두세 권만 뽑아내라니….

하지만 처음에 별 생각 없이 그러겠노라고 승낙한 상태이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판이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한 번 해보자. 이렇게 마음먹고 그간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감명 깊고 인생에 영향을 주었던 책을 한 권' 고르기 시작했다.

의외로 그간 좋아한다고 공언해 오던 많은 작가들이 계속해서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김유정을 비롯한 한국 소설가들이 삭제되고, 로버트 하인라인을 비롯한 SF 거장들이 삭제되고, 존 그리샴을 비롯한 추리물 내지는 하드보일드물의 대가들이 삭제되고, 로버트 하일브로너를 비롯한 경제학의 대가들이 삭제되었다. 걸작 고전들도 여지없이 삭제되었다. 문학에서는 도스토옙스키가 삭제되고, 헤르만 헤세가 삭제되고, 에밀 졸라가 삭제되고, 제인 오스틴이 삭제되고, 랠프 엘리슨이 삭제되고, 사상가로는 마르크스가 삭제되고, 파스칼이 삭제되고, 존 스튜어트 밀이 삭제되고, 존 듀이가 삭제되었다.

경제 대공황으로 쑥대밭 된 미국 농민들의 모습, 마지막에 남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희한하게도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일순간에 쑥대밭이 된 미국 농민들의 모습이었던 셈이다. 갑자기 몰아닥친 공황에 가뭄까지 덮치고, 거기에 대자본에 의한 농업 기계화 바람까지 불면서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된 미국 중서부 농민들은 결국 은행에 땅을 넘기고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캘리포니아를 찾아 떠난다. 솔직히 열여덟 시절 <분노의 포도>를 읽을 때는 그 이주 행렬의 신산스런 삶이 일면 부럽기도 했다. 1970년대 우리는 자가용을 꿈도 꿔보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나, 고향에서 밀려난 미국 농민들에게는 어쨌거나 차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일자리만 있다면 달려가 온 가족이 달라붙어 일을 해도 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그들 앞에서 판매가 되지 않아 (경제학적으로는 유효 수요 부족으로) 버려지는 오렌지와 돼지들. 그리고 그 위에 배고픈 사람들이 먹지 못하도록 뿌려대는 석회…. 그 장면의 섬뜩함은 아주 오래도록 내 무의식을 지배했던 것 같다.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경제학 책을 꾸준히 그렇게 열심히 읽은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어쩌면 나는 자본주의를,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미워하는 모순된 감정을 모두 <분노의 포도>에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이주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과 물을 청하는 이주민들을 냉대하는 휴게소 관계자들의 태도는 가진 자의 오만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가게 앞에 줄지어 선 누추한 이주민들 때문에 고객들이 발걸음을 돌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점에서 감히 지금도 뭐라 나무라지 못하겠다.

또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텐트촌에 머무르는 이주민들이 자식들의 결혼에 앞선 상견례에서 변변한 먹을거리 하나 제대로 앞에 놓지 못한 채 인사를 나누면서도 자신들의 집안이 자영농으로서 얼마나 뼈대가 있는지를 예의 바른 언사에 담아내는 모습을 차마 비웃지도 못한다. 내세울 건 자존심밖에 없는 적빈(赤貧)의 삶이 뼈저리게 다가와서이다.

그래서 기다린다, 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기를

<분노의 포도>를 읽은 열여덟 이후 나는 주로 '딴짓'을 하며 살았다. 세상이 움직이는 구조를 알면 세상을 편히 살고 세상이 편하게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을까 하여 철학책을 뒤적거렸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개선해나가다 보면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갈까 하여 제4의 권력 언저리에도 있어 보고, 이런저런 책에라도 빠져 있으면 신간이라도 편할까 해서 책 만드는 일에 뛰어드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분노의 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발전은 단순한 양적 발전을 넘어 질적 발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정통 경제학이 내는 목소리에 항상 의문을 품는다. 예컨대 케인스가 말을 이랬다저랬다 바꾼다고 비판한 분에게는 그 덕택에 사람들이 고통을 덜 겪었다면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되묻고 싶고, 케인스적인 유효 수요 관리 정책은 지금의 고통을 나눠서 장기화시킬 뿐이라는 분에게는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이 줄어들기만이라도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따지고 싶다.

그렇다. 나에게 '읽은 책 가운데 감명 깊고 인생에 영향을 주었던 책 한 권'은 마땅히 <분노의 포도>여야 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분노의 포도>를 내가 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다린다. 언젠가 <분노의 포도>의 저작권이 만료되어 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기를.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출판사를 꾸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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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우 '도서출판 부키' 대표가 추천하고 기증한 책

<분노의 포도 1, 2>
존 스타인벡 지음 | 민음사 | 2008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 실업자가 1000만 명이 넘었던 시기, 가뭄과 농업 환경의 변화까지 겹쳐 결국 은행에게 땅을 빼앗기고 미국 중부의 오클라호마주에서 서쪽 끝인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해야만 했던 조드 일가의 삶을 다뤘다.

중심 인물인 톰 조드는 살인죄로 4년간 복역 후 가석방되어 오클라호마의 집으로 돌아오며 모래 바람 때문에 말라버린 옥수수와 비어있는 농가들을 발견한다. 집에 돌아와보니 가족들은 가뭄과 트랙터의 등장으로 오클라호마에서 농장을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로 가는 먼 여정 동안 조드 일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톰의 형은 어디론가 사라지며, 여동생의 남편은 가족을 떠난다.

그러나 어렵게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조드 일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을 하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노동자들과 노동 착취를 일삼는 지주들이었다. 조드 일가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이 열악한 상황속에서 절망을 거듭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성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서 피어나는 강인한 생명력과 희망의 냄새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1939년 발표된 이 책은 지주, 은행, 경찰의 노동자 탄압을 생생히 고발하며 출간 당시 금서로 지정될만큼 부유층의 거센 반발을 받았지만 현실을 직시한 가치를 인정받으며 1940년에는 퓰리쳐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태그:#나의 애독서,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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