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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음주 방송으로 사고를 친 뉴라이트 출신의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이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애쓰다가 마침내 건수 하나를 잡았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신 의원은 1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39년부터 1941년까지는 기업체 모집,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조선총독부 알선,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 형식이었다"면서 "박 후보의 할아버지가 1941년에 징용영장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 주장"이라고 주장했다.

 

또 "박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갔다면 모집에 응해서 간 것이지 형의 징용영장을 대신한 것은 아니다"라며 "박 후보의 입양이 형제의 병역면탈을 노린 '반(反)사회적 호적쪼개기'였음이 명백해 졌다"고 열을 냈다.

 

'모집' '알선' '징용'이라는 전문용어까지 동원한 것을 보면 꽤나 신경을 쓰서 건수를 올린 것 같다. 그런데 어쩌나. 그게 건수가 되지 못함을! 그가 겨냥한 화살이 영 과녁을 잘못 겨냥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틀렸는지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다.

 

[오류 하나] 한국 정부, '모집'도 강제동원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첫째, 일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제징용은 모집, 알선, 징용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지, 전문적으로 구별해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다. 이 말은 일반 사람들 속에는 모집, 알선, 징용 모두가 강제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강제성에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강제징용이라는 말은 틀렸다. 징용은 징용일 뿐이지 앞에 '강제'라는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징용 그 자체가 '징용령'으로 규정한 강제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의 군 입대처럼 그것을 거부하면 일부 특권층을 제외하면 예외 없이 감옥에 가야하기 때문에 강제니 아니니 하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일반 사람들은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쓴다. 즉 자발성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르고 있으며, 이 강제징용에는 1939년부터의 모집까지 포함돼 있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일제의 노동력 강제동원은 모집→알선→징용으로 발전했으며, 한국정부는 이들에게 모두를 강제동원피해자로 인정하고 있다.

 

본인이 한 때 없애려고 혈안이 됐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에서도 모집·알선·징용을 모두 강제동원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음을 벌써 잊어먹었는가. 국가기구가 법으로 정해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있는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정치공세를 하고 있어,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 회복운동을 지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매우 불쾌하다.

 

어쩌면 알고서도 트집잡기 한 것이 아닐까 의심마저 든다. 피해자와 유족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역사의 비극을 함부로 정치공세에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류 둘] 장남 대신 차남이 대신 동원된 것도 당시 일반적 현상이었다 

 

둘째, 그래도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모집이 강제라 해도 형을 대신해서 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그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당시의 일기를 통해 확인해보자.

 

<정강일기>라는 한 유생의 일기에 따르면, 1941년부터 북한지역 공사, 일본 공장, 남양 등지의 '역부 모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되는 기사가 자주 나온다. 1943년에는 면리원들이 마을을 수색해서 공장에서 일할 만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사람을 '마치 죄인 다루듯이' 잡아갔다. 월 평균 1회로 모집이 강제되자 관지리 마을 주민들은 제비뽑기를 해서 대상자를 선정해서 대응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선정된 청년이 도망하기 때문에 면리원들이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연령 해당자면 무조건 잡아갔다. 쉽게 말해 모집 단계에서 신청자가 적자 그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마을별로 강제로 인력을 동원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선순위는 자연히 돈 없거나 '빽' 없는 농민들부터였다.

 

그리고 1941년 이후 전쟁이 태평양으로까지 확대되자 부족해진 군사력과 노동력을 조선에서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조선인들은 도망하거나 집안을 이을 장남 대신 차남이나 삼남이 대신 동원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일기의 주인공도 장남에게 징용령이 떨어졌으나 피신하는 바람에 주재소에서 직접 동생을 강제동원하는 형태로 머리수를 채웠다. 이걸 피하기 위해 가족 전체가 피신하는 내용도 심심찮게 나온다.

 

이것이 현재 학계가 이해하고 있는 일제 말기 강제동원의 실태이자 역사적 사실이다. 요약하면 ▲ 1941년의 모집도 법률상으로나 실체상으로나 강제동원에 해당하며, 일반인들은 통칭해서 '징용'으로 부르고 있으며 ▲ 강제동원의 대상이 사람을 대신해서 동생이 동원된 사례는 당시 흔히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검증을 하려면 좀 더 공부를 한 뒤 검증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신지호 망언 규탄 성명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을 또 한번 짓밟는가

 

 

언론 보도에 따르면 10월 11일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는 기업체 모집,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조선총독부 알선,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 형식"이었으며 "박원순 후보의 할아버지가 1941년에 징용영장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작은할아버지가 사할린으로 갔다면 모집에 응해서 간 것이지 형을 대신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박원순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가 1941년 강제징용 됐다는 말은 거짓말"이며, "할아버지 대신 강제징용을 간 작은 할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양자로 갔다"는 박원순 후보의 설명은 병역면탈을 노린 '반(反)사회적 호적쪼개기'였음이 명백해 졌다"고 박후보를 비난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며 망발이 아닐 수 없다. 신 의원의 말대로 일제강점기 한국인에 대한 동원은 모집-알선-징용 3단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 의원의 주장과 달리 징용만이 강제동원이 아니었으며, 1939년 모집 단계부터 강제동원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가 설치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강제동원 피해에 따른 보상지원대상자를 "1938년 4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사이에 일제의 의하여 군인·군무원 또는 노무자 등으로 국외로 강제동원 되어 그 기간 중 또는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 행방불명된 사람, 부상으로 장해를 입은 사람" 단 "사할린 지역의 경우는 1938년 4월 1일부터 1990년 9월 30일까지의 기간 중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미 강제동원 피해자의 사례조사나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일제는 모집단계에서 인원이 부족해지자 할당량을 책정해 강제로 끌고 갔음이 너무나 많은 자료에서 나타나고 있다. 징용은 국민징용령이라는 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당시 또는 지금의 피해자나 유족들은 모집이나 알선 단계에서 사실상 징용과 다름없이 강제되었다는 의미에서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일본의 재일학자는 이를 강제연행이라고 불렀으며 한국에서는 강제동원으로 입법화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관행적으로 강제징용이라 통칭했던 것이다. 신 의원이 거론한 2009년 고등법원 판결문도 본래 판결취지와 달리 악용되었지만, 그러한 문서를 악의적으로 뒤지기 이전에 국회가 입법한 강제동원 관련법이나 강제동원관련 국가기구의 보고서라도 보길 바란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난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작자가 고작 선거 비방용으로 역사의 상처를 제멋대로 휘젓는 처사에 대해 피해자와 유족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제사 상속 때문에 장남 대신 차남이 간 경우가 수두룩한 것은 상식에 속한다. 강제동원지원위원회가 소장한 피해자나 유족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 강제동원 된 이들이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하자 많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내들은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해 홀로 유자녀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오거나, 부득이 재혼을 했더라도 남편이 생사불명인 상태에서 정상적인 재혼을 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도 많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호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마디로 강제징용은 끌려간 자만이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며, 남아있는 가족까지 가정과 가족관계의 파괴라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처 여지껏 고통받고 있다. 우리는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를 표명하는 것이 함이 아니다. 박원순 후보의 사례는 많은 유족들이 동시에 겪은 민족사의 비극이고 지금도 진행되는 아픔이다. 그러한 아픔을 살뜰히 보듬지 못할망정 '병역기피'라는 치욕적인 정치모략으로 몰아가는 것은 유족들을 또 한 번 짓밟는 처사이다. 

 

더구나 신 의원의 1943년 10월부터 강제징용이 시작되었다는 발언은, 1943년 이전의 이른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들이나 1941년 이전 살인적인 추위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사할린 등지의 강제동원피해자들을 돈 벌러 갔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처사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더구나 이는 국민징용령 실시 이전은 모두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한 것이니 어떠한 법적 책임도 없다는 일본정부의 입장을 사실상 대변하는 것이다.

 

권력에 눈이 멀고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조국도 민족도 역사도 몰각하는 이 얼빠진 작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신지호의원은 한국의 국회의원인지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지 이번 기회에 명확히 밝히길 바란다. 한국의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한다면 민족 앞에 공식 사죄할 것이며, 일본의 대변인이라면 조속히 일본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아울러 이러한 신지호 의원의 입장에 맞장구를 치는 한나라당도 이러한 인식이 당의 공식 입장인지 명확하게 밝혀주길 요구한다.

 

2011년 10월 11일

 

한일시민선언실천협의회소속 단체 일동

 

나눔의집, 독도수호대,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거사청산위원회, 시베리아삭풍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 전국역사교사모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정신대연구소, KIN(지구촌동포연대), 1923간토한일재일시민연대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입니다.


태그:#신지호, #강제동원, #서울시장 보궐선거, #박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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