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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靑春)은 푸른(靑) 봄(春)이라는 뜻이다. 봄은 겨우내 잠들어 있던 만물이 따사로운 햇볕 아래 깨어나 생명력을 뽐내는 계절.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젊은 시절을 청춘이라 부르는 것은 그 시기가 봄처럼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생명력이 약동하는 순간이라는 뜻이리라.

 

청춘이 늘 푸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초조할 때도 있고, 어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때론 좋아하는 이성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해 속만 태우고, 믿었던 친구와 다투기도 한다. 그렇게 나름의 고민과 상처를 경험하며 어른이 된다. 그러나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들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것이 청춘이 갖는 힘이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는 주인공 강철의 어린 시절을 통해 조금은 어리고 어설펐던 학창시절, 그래서 더욱 그립고 아련한 청춘의 추억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청춘의 기억


소설은 강철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오면서 시작한다. 서울 생활은 녹록하지 않다. 키 큰 아이들은 키 작은 아이들을 얕보고 괴롭히기 일쑤고, 서울 선생님의 매타작은 시골 선생님보다 심하다. 시골에서는 반 1등이었지만, 서울에 오니 10등 안팎으로 밀려난다. 공부, 싸움, 키까지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기에 '나만의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쓰기에 매달려 본다. 고달픈 생활이지만 좋은 벗과 고민을 나누며 견딘다. 이성에 눈을 뜨며 누나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가 그리는 청춘의 여러 장면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체벌이다. 1960~1970년대에 학교를 다닌 기성세대라면, 이 대목에서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 만하다. 선생님들은 '곡괭이 찍기', '고양이 발목치기', '자동빵 시스템' 등 다양한 체벌을 구사하는데, 그중에서도 최악은 친구끼리 증오하게 하는 '마주 보고 때리기'다.

 

수학교사 합죽님은 때리는 대신 아랫도리를 더듬어 굴욕감을 주기도 한다. 2011년의 학교 현장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기에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청소년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체벌과 학생인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무거운 소설은 아니다. 강철과 그의 친구들은 평범한 10대 학생일 뿐이다. "나는 신사입니다"를 네 글자로 줄이면 "신사임당"이라는 시답잖은 말장난을 하고, '나무늘보로 변신'해 여자 목욕탕을 훔쳐보기도 한다. 강철이 여자 목욕탕을 훔쳐보려다 떨어져 다치는 장면은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는 기존의 성장소설이 그러하듯 평범한 청춘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게 만든다.

 

사회적 금지에 대한 도전


<토메이토와 포테이토>가 다른 성장소설과 구별되는 점은 개인의 추억을 회고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모순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3선개헌 반대 시위를 그린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위해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을 넘어 서울 시내 고등학교까지 번진다.

 

강철의 고등학교 선배들도 3선개헌 반대 시위에 동참하는데 교사들은 시위를 막으려 한다. 그러나 단상에 선 학생은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총을 맞겠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시위를 말리던 교사는 그 말을 듣고 '나는 데모를 막을 수밖에 없지만 너를 훌륭한 제자로 기억하겠다'고 답하는데, 그 말이 강철의 귀에는 '상상하고 싸우라'는 말로 들리는 것이다.

 

'상상하고 싸우라'는 구호가 좀 뜬금없다. 짐작건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프랑스 68혁명의 구호 '상상력에 권력을'을 염두에 둔 것 같다. 68혁명은 드골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에 저항하는 정치혁명이었지만, 정치혁명을 넘어서 기존의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는 문화혁명이기도 했다.

 

68혁명 세대가 몰두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마약이었는데, 마약을 하는 것은 기득권이 금지한 것을 행함으로써 기존 가치관 자체에 도전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말하자면 68혁명은 '모든 사회적 금지에 대한 도전'이었다. 저자는 '상상하고 싸우라'는 구호를 통해 우리의 운동 역시 정치혁명을 넘어 문화혁명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상상하고 싸우라!


이 책을 읽으며 몇 권의 성장소설이 떠올랐다. 성순이 누나를 동경하는 장면에서는 '386세대의 허구적 자서전' <새는>이 생각났고, 꾀꼬리의 자태에 매혹되는 장면에서는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까지 읽으니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가 이 책과 가장 가깝다는 생각이다.

 

<남쪽으로 튀어!>의 주인공은 중학생 지로지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아버지다. 지로의 아버지는 아나키스트로 국민연금 납부를 거부하고, 국민연금을 받으러 집으로 찾아온 공무원에게 "체제에 빌붙어 사는 개 따위와 말을 섞을 마음은 없어" 같은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골치 아픈 사람이다.

 

지로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며 무슨 사고나 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지로와 독자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의 싸움에 공감하게 된다. 체제가 부당하게 개인을 억압하는 이상,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산다는 것은 세상과 불화하는 과정이다. 자주 깨지고 세상에 패배하지만, 더러는 이기기도 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상처받으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성장한다. 괴로운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며 싸우는 것, 그것이 진짜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하다. 상상하고 싸우는 것. '나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68혁명의 구호처럼 모든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는 것. 체제가 정해놓은 틀을 벗어나 그 너머를 상상하고, 체제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는 것. 이제 금지된 행동을 시작할 때다.

덧붙이는 글 |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강병철 씀, 작은숲 펴냄, 2011년 9월, 308쪽, 11800원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 강병철 성장소설

강병철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작은숲(2011)


태그:#강병철, #68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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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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