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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꿈이 있었다> 표지
 <그들은 꿈이 있었다> 표지
ⓒ 검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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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은 비가 많이도 내렸다. 도시든 시골이든 물난리를 겪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같은 물난리를 겪는데도 바라보는 시각차가 무척 크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물난리엔 텔레비전과 신문이 야단법석하며 매일 떠들어댄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넨 그저 한번 지나가 흘겨보듯 어쩌다 방송에 나온다.

한우 동네로 유명한 전북 정읍의 산외마을엔 400밀리리터가 넘는 물폭탄이 떨어져 난리가 났는데도 방송에는 별 비중이 없다. 이런 현상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방송도 빈부격차를 따져 방송한다고.

예전에 한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는 계급이나 계층이 존재할까?"

이 질문에 많은 친구들이 분분한 의견을 냈다. 그 중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는 계급사회가 아니다. 계급은 신분의 귀천이 있는 옛날에나 있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평등하지는 않다.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말의 평등이지 실제 평등은 아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른 취급을 당한다. 한마디로 계급은 없지만 계층은 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노예 해방을 선포했지만 미국의 백인들은 여전히 흑인들을 하류계급으로 취급했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동물처럼 대했다. 버스에 타더라도 흑인은 앞에 앉을 수 없었다. 백인들이 드나드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백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흑인들을 무시하고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 모욕과 폭력에 흑인들은 그대로 당하곤 했다. 특히 북부보다 남부지역이 더욱 심했다.

이런 불평등하고 잘못된 사회를 비판하며 흑인들의 권익을 위해 살다간 흑인 목사가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다. 그가 백인들에게 멸시당하고 억압당하는 흑인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다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많은 미국인이나 사람들이 킹 목사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것은 단순히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백인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폭탄을 터트려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를 거침없이 행했을 때 비폭력 방법을 선택했다. 1956년 1월 30일,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폭탄이 터졌을 때 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비폭력으로 폭력에 대항해야 한다! 증오에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에 대한 비폭력적 사랑, 이것이 결국은 흑인들을 해방시켰고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했다. 그리고 이것이 킹 목사를 위대하게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킹 목사가 교회 안에서만 흑인들의 자유와 권익을 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흑인이 자유를 얻는 것이 망상이라고 생각하는 흑인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꿈과 희망을 설파했다. 감옥에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비폭력과 사랑을 외쳤다. 때리면 맞았다.

"우리는 비폭력으로 폭력에 대항해야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마틴 루터 킹 목사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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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꿈이 있었다>는 이렇게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소설은 남부기독교지도자협의회(SCLC) 대표였던 킹 목사와 그의 친밀한 협력자였던 랠프 애버내시 목사, 와이엇 워커 목사 등 실존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은 흑인 탄압이 가장 심했고 KKK단이 가장 극성을 부린 지역, 남부 버밍햄을 배경으로 흑인들의 투쟁과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한 KKK단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흑인 소녀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말들이 나온다. 킹 목사는 흑인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랑의 군대에 가입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드리 잭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믿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손에 무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평화의 전사였습니다. 그분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위해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킹의 이 말은 한국 교회에 들려주는 말로도 들린다. 가난하고 힘없고 고통 받는 이들의 편이 아닌 있는 자들의 대변인이 된 듯한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 현장의 모습은 무시한 채 교회 안에서 예수님만을 찾는 이들에게 킹 목사의 말은 어떻게 들릴까.

실제 킹은 자신의 설교가 행동임을 보여주기 위해 감옥행까지 감수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학대하고 멸시하고 동물 취급하는 백인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렇지만 극우 백인우월주의 자들인 KKK단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상이고 모범이라며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 조국을 구하소서! 우리 조국이 지구상에 영원히 존속하도록 도와주소서! 이 땅에 성스런 애국주의의 불꽃을 일으키소서! 민족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대마법사에게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들은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지 모른다. 예수는 오직 백인만을 위해 세상에 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흑인은 공존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몰아내야 할 존재라고 믿는다. 이들은 스스로 선과 미를 추구하는 공동체로서 민주적이고 정의롭다고 외친다. 그래서 자신들의 행위는 어떤 잘못도 없다고 믿는다.

7월 10일 오전 2시 40분경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186일째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만나러가는 '희망 버스' 참가자들을 향해 경찰이 최루액과 색소를 섞은 물대포(살수차)를 발사하며 해산작전에 나서고 있다.
 7월 10일 오전 2시 40분경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186일째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만나러가는 '희망 버스' 참가자들을 향해 경찰이 최루액과 색소를 섞은 물대포(살수차)를 발사하며 해산작전에 나서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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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 장면들...

이런 현실 속에서 흑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체념 속에서 살아간다. 백인들과 대항하다간 맞아 죽거나 가게가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킹은 이런 흑인들을 설득하고 도와주며 비폭력 저항 운동을 펼치고 결국 승리한다. 그러나 그 승리 과정은 순탄치 않다. 경찰은 KKK단과 연결되어 있다. 백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모른 척한다. 흑인들은 작은 잘못도 가차없이 처벌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21세기 우리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 같은 부분이 있다.

마이크에서 '물을 뿌려!' 하고 명령이 떨어지자, 호스에서 물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물줄기는 강력한 칼처럼 시위 군중을 꿰뚫었다. 세찬 물줄기에 많은 아이들이 쓰러졌다. 아이들은 쓰레기처럼 아스팔트 위에 나뒹굴었다가 주차된 차에 부딪혔다. 몇몇 아이들은 물벼락으로 옷이 찢어졌다.

흑인들은 '자유'라는 글씨가 쓰인 피켓을 들고 평화롭게 시위를 했다. '우리는 언젠가 자유로워 지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흑인들을 향해 백인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소방호스로 가차 없이 물을 뿌려댄 것이다. 이런 물벼락에 시위에 참여한 어린이들은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다.

노예의 후손과 노예 주인의 후손이 조지아주 붉은 언덕에서 형제처럼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으로 초췌해진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바뀌고, 자식들이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 이루어졌다. 킹 목사의 작으면서도 큰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후기에서 흑인들이 완전한 평등권을 얻기까지의 길은 요원하다고 말한다. 흑인들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향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은 그런 면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꿈이 있었다>는 저자가 당시 상황을 상상하고 킹 목사와 관련된 많은 자료를 참고로 한 소설이다. 킹 목사는 1963년 8월 28일.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나'가 킹 목사의 꿈이라면 이 소설 '그들'은 흑인들을 의미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킹 목사의 꿈이나 흑인들의 꿈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황은 다를지라도 가난한 자와 부자,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이 심한 현실은 결국 우리의 다른 꿈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그들은 꿈이 있었다>(토마스 야이어 씀, 이선희 옮김, 검둥소 펴냄, 2006년, 344쪽, 9500원)



그들은 꿈이 있었다

토마스 야이어 지음, 이선희 옮김, 검둥소(2006)


태그:#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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