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왜 하필 아리랑일까. 왜 그토록 김기덕은 아리랑에 목을 맬까. 어째서 한 맺힌 목소리로 절규하듯 아리랑을 불러대는 걸까, 왜, 왜?

아리랑(2011) 포스터 김기덕은 이 다큐영화에서 분열된 자아와 대화를 나누고, 자기 그림자랑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친다.

▲ 아리랑(2011) 포스터 김기덕은 이 다큐영화에서 분열된 자아와 대화를 나누고, 자기 그림자랑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친다. ⓒ 김기덕필름

김기덕 감독이 <비몽>을 찍고 한참 뒤에야 다큐영화 <아리랑>을 내놓았다. 근 3년만이다. <아리랑>에서 김기덕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완전히 까발린다. 제 영혼을 거의 온전히 내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도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니 상처받은 한 마리 물고기인가. 아무래도 좋다. <아리랑>은 김기덕이 제 영혼을 가감 없이 드러낸 한 편의 다큐다. 사람한테, 거대자본에게 철저히 모욕 받은 한 예술가의 처절한 울부짖음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림에 제 영혼을 바쳐 머리가 반쯤 망가져버렸다고 고백했듯이 김기덕은 사람들한테서 받은 상처에 너무나 깊이 빠진 나머지 이성을 반쯤 놓아버렸다. 미쳐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위선을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밖으로 불러냈다는 말이다. 그는 <아리랑>에서 몇 번이나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계산기 두드리는 영악한 어른이라면 어찌 카메라 앞에서 제 울분을 곧이곧대로 쏟아낼 수 있으며, 어찌 제 분노를 거친 욕으로 분출할 수 있으랴. 김기덕은 이것저것 재고 계산하는 어른이 아니라 속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는 아이로 돌아가 울음을 터뜨리고 욕을 쏟아낸다. 한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는 왜 상처로 너덜너덜해졌을까. 무슨 상처가 그리 많아 카메라 앞에서 자기를 발가벗겼을까. 자칭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기득권자들)이 보면 틀림없이 조롱을 해대고 나설 텐데. 무슨 건수라도 잡은 양 득달같이 달려들어 김기덕을 욕하고 비웃어댈 텐데. 정녕 이 위정자들은 또 대놓고 김기덕을 웃음가마리로 만들 텐데. 그걸 알면서도 왜 김기덕은 더는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그로테스크한 자화상을 그렸을까. 사상 유례가 없는 이 영상 자화상을?

김기덕 감독 자신을 오롯이 드러낸 영화 <아리랑>


많이 알려져 있듯이 한 젊은이는 김기덕을 찾아와, 가르침을 달라고 비오는 날 종일 무릎을 꿇었다. 김기덕은 그를 받아주었다. 그런데 젊은이는 김기덕이 준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 이름을 알리더니 얼마 뒤 김기덕을 배신하였다. 거대자본이 김기덕한테서 이 젊은이를 빼앗아갔다. (김기덕 감독은 젊은이가 자기를 배신한 게 아니라 그저 떠나버린 거라고 말한다. 떠나버린 거라고.)

이 젊은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김기덕에게서 등을 돌렸다. 상처는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더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김기덕은 결국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깊숙이 침잠해버린다. 산골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을 난다.

물이 꽁꽁 얼어 나오지 않는 그 첩첩산중에 칩거하면서 김기덕은 영화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욕망과 자연을 벗하며 은둔자로 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너무도 외로운 이 고독자는 급기야 분열된 자아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는 분열한 자아랑 대화를 하기에 이른다. 심지어는 그림자랑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울분을 속 시원히 토해낼 친구 하나 조차 없는 것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아리랑>은 김기덕의 자화상이다. 그는 붓 대신 카메라로 자화상을 그렸다(한때 그는 파리를 여기저기 방랑하며 화가 생활을 한 적도 있다). 28살로 생을 마감한 에곤 실레가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며 자화상을 그려댔듯이, 그 영원한 아이가 자기 모습을 추악하게 때론 격하게 때론 날것으로 그려냈듯이 김기덕도 자신을 격하게 때론 추악하게 때론 날것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아리랑'이라고 이름 붙였다.

게다가 에곤 실레는 제 몸을 뒤틀리게 그리길 좋아했다. 이중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심지어 자위를 하는 모습까지 그렸다. 거기엔 자기의 밑바닥까지 보여주고픈 욕망, 자기를 끝간데없이 까발리고 싶은 욕망이 배어 있다. 위선 떨지 않고 가장하지 않는 솔직한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픈 예술가적 욕망이 숨어 있다. <아리랑>에도 김기덕의 그런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에곤 실레의 이중자화상 (1915) 체념한 듯 다소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과 저항하듯 눈을 치켜뜬 얼굴. 자아가 이중으로 분열된 모습이다.

▲ 에곤 실레의 이중자화상 (1915) 체념한 듯 다소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과 저항하듯 눈을 치켜뜬 얼굴. 자아가 이중으로 분열된 모습이다. ⓒ 에곤 실레


분노의 노예된 자신을 총살했으니, 이제 깃털처럼 가벼워질까

"시골 와서 텐트 치고 사니까 좋냐? 너 폐인 됐다고 기사 떴어, 인마!"

김기덕은 시종 자신을 다그치고 몰아붙이고 그게 또 서러워 울음을 터뜨린다. 아무래도 김기덕의 내면을 줄곧 지배하는 것은 분노와 증오심이다. 김기덕은 분열된 자아랑 대화를 나누면서 인생은 다 그런 거 아니냐고 꽤나 이성적으로 반문하면서도, 그동안 모욕 받고 상처 받아온 감정 앞에선 도무지 어쩌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김기덕은 사람과의 따듯한 관계 안에서 치유받기를 원하나 그 옆엔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제 힘으로 치유를 하려고 시도한다. 스스로 자아를 분열시키고, 그 분열된 자아랑 대화를 나눈다. 그래도 뭔가 불만족스러워 제 그림자랑 대화를 한다. 하지만 좀처럼 치유가 되지는 않는다. 결국 그는 총을 만든다. 자신을 증오와 저주의 감정 속으로 몰아넣는 분노를 없애고자 총을 겨눈다.

탕, 탕, 탕, 탕! 그가 쏜 것은 그를 배신한 사람도, 그를 모욕한 자본도 아니다. 배신자와 자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증오하는 김기덕 자신이다. 그러니까 김기덕 자신의 '성난 자아'를 쏜 것이다. 분노와 저주와 증오로 한데 뒤엉킨 그 끔찍한 자아를 말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김기덕 스스로도 새된 목소리로 토해내지 않았던가. '너희 같은 쓰레기를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을 쏘아죽이겠다.'고. 즉 너희 같은 쓰레기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 쓰레기를 자꾸 기억해냄으로써 고통 속에 허우적대는 자기 자신을 쏘아죽이겠다고 말이다. 아, 분노와 증오심의 노예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술로 허송세월하는 자신을 총살하였으니 이제 김기덕은 깃털처럼 가벼워질 일만 남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김기덕은 아리랑으로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상을 받은 뒤, 유럽에 남아 있으면서 <아멘>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이제 영화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논란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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