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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지기 친구들은 모일 때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20년 지기 친구들은 모일 때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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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IMF 사태로 직장을 잃은 뒤, 자격이 되는 곳마다 이력서를 넣은 끝에 내가 다시 취직한 회사와 가까운 곳에 친구 J가 다니던 회사가 있었다.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날 J가 진지하게 제안을 했다.

"우리 같이 귀농하지 않을래?"
"귀농? 시골에서 농사짓는 것 말이지?"


귀농이란 말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술김에 둘은 굳은 결의를 했지만, 나는 아내를 설득하지 못한 반면 J는 그의 아내를 설득해 어느 종교단체에서 주관하는 귀농학교를 같이 다니며 귀농할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J가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매일같이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하던 어느날 겪은 유체이탈 때문이다. 그때 그가 지하철 위에서 내려다 본 사람들과 자신의 모습이 흡사 만(卍)자와 같은 자세로 꼼짝 못하고 갇혀있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도시적인 삶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 것이다.

귀농을 준비하며 초보귀농자를 노리는 브로커의 농간에 전 재산인 전세보증금 2500만 원을 날릴 뻔하다 아내와 귀농 선배의 충고로 마음을 돌리는 위기도 겪은 끝에 J는 아내와 5개월 된 아들을 안고 강원도 평창의 외딴 빈집으로 귀농했다. 물 맑고 공기좋은 자연에 둘러싸인 집은 가끔씩 놀러오는 친구들에게는 낙원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새 삶을 살아가야 하는 J에게 귀농생활은 생각했던만큼 쉽사리 풀리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통장의 잔고는 줄어들었다.

그러다 귀농 2년쯤 드디어 그에게도 농사지을 2000평의 땅이 생겼다. 열심히 일하는 J를 본 지역주민이 자신의 땅을 적은 돈만 받고 빌려준 것이다. 그동안 마을일과 농사일을 대가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뛰어다닌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그 지역에 펜션붐이 일면서 제대로 농사를 시작도 못해보고 땅을 돌려줘야 했다. 그 땅이 다른 사람에게 팔리게 된 것이었다.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더이상 가난한 귀농자가 머물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귀농 실패 후 서울로 다시 돌아와야 했던 J...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산중턱의 비탈을 깎아서 집을 짓고 밭을 만들었다.
 산중턱의 비탈을 깎아서 집을 짓고 밭을 만들었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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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J 가족은 2000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처갓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됐다. 귀농 전 근무했던 외국회사에 다시 다닐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그들에게 위안이었다. 하지만 J는 포기하지 않고 맞벌이로 3년만 돈을 모아 다시 귀농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끝에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해 다시 가족을 데리고 강원도 화천으로 두 번째 귀농을 했다. 친구는 이번엔 처음부터 땅을 구입했다. 그나마 땅값이 싼 산중턱의 비탈을 중장비로 다져 조립식주택을 지었다. 하지만 J의 집이 마을과 떨어진 탓에 전기와 전화 등을 설치하는 데 필요한 설치비용 수백만 원까지 내야했던 것은 큰 부담이었다.

내 땅을 갖고 정착한 만큼, 이곳에서 뿌리를 내려야 했고 평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민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를 맺었지만, 농사를 짓는 것만으로는 경제적으로 부족했기에 다른 일도 찾아야 했다. 집 뒷산에 장뇌삼을 뿌리고 벌통을 놓기도 했으며 공공근로와 같은 관공서에서 내주는 일을 임시적으로 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때마침 화천에 한옥학교가 생기면서 한옥짓는 기술을 배워 목수일을 할 수 있었고 5~6년은 자급자족하는 삶을 이어갔다.

이젠 귀농해 정착했다며 친구들은 귀농재수생 J를 격려하기도 했지만, 몇 년 전부터 근심어린 그의 고민을 조금씩 듣게 됐다.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이율이 저렴한 귀농자금을 대출받은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외 급한 곳에 목돈 쓸 일이 몇 번 생기면서 다른 대출을 받은 것이 점차 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산중턱에 집을 짓고 보니 산사태 염려때문에 집 뒤편에 중장비를 동원해 콘크리트 옹벽을 세워야 했고, 평소 잇몸이 좋지 않던 것을 방치하다가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는 말에 1000만 원에 가까운 치료비용도 들여야 했다. 또 인적이 드문 시골이다 보니 자동차 없이는 옴싹달싹 못하는 환경 탓에 트럭을 구입하는 등에 큰 돈이 들었지만 들쭉날쭉한 시골살이 수입으로 원금상환은 엄두도 못내고 이자만 겨우 갚아나가고 있었다.

아들의 귀농생활 위해 집까지 판 아버지... "먼 길 돌아오느라 힘들었다"

눈이 내리면 걸어서 산중턱까지 올라가야 한다.
 눈이 내리면 걸어서 산중턱까지 올라가야 한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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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돈이 좀 필요한데 가능하겠어?"

2년 전 J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 혼자서는 감당할 액수가 아니었기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서 십시일반 형편껏 돈을 모아 보내줬다. J는 급한불은 껐다며 아버지가 집을 팔기로 했으니 몇 달 후면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혼자서는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었던지 J는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J의 아버지는 아들을 돕기 위해 살던 집을 팔고, 전세로 옮기셨다.

올해로 화천에 귀농한 지 10년째인 J. 친구는 집을 자주 비우게 되는 목수일보다 아내와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원래 귀농의 목적도 그러했기에 이제는 처음 계획했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지금 J는 집주변의 땅을 일궈서 수세미 오이를 재배해 효소를 담그고, 가마솥에 콩을 삶아 메주를 띄워 장을 만든다. 올해부터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음알음 찾아온 이들에게 매달 정기적으로 농산물 등을 직거래로 보내주는 사업을 시작해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제야 자신들이 가야할 길을 찾은 것 같다는 J의 아내는 너무 멀리 길을 돌아온 것 같아 억울하기도 하지만 비싼 수업료를 내고 공부한 셈 친다며,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

J 내외는 첫 귀농에 이어서 두 번째 귀농 역시 험난한 길을 돌고 돌아서 오느라 너무 힘들었다며 마음만 앞선 귀농보다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먼저 차곡차곡 해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더불어 빚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경험을 돌이켜보며 귀농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직도 빚 청산이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마음의 짐을 많이 덜어낸 J에게서 예전처럼 패배주의에 젖어있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얼마 전 휴가 때 친구들과 찾아갔더니 친구 J 부부는 산림을 관리하는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고 있었다. 지역의 산림조합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앞으로는 자격을 갖춘 인력을 우선적으로 선발할 것이라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또한 한옥 짓는 목수기술을 살려 집 주변 땅에 직접 지은 황토방으로 민박을 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힘든 길을 돌아 귀농 10년만에 자신들의 행복을 꾸려나가고 있는 J부부에게 희망의 박수를 보낸다.



태그:#귀농, #펜션, #농사,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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