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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놀이삼아 지내던 시절, 기다림이라는 낭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추억 가운데 하나, 봉숭아물 들이기.

지금처럼 비닐이 흔치 않던 시절에는 손톱을 감쌀 재료도 변변치 않아 나뭇잎이나 헝겊 따위로 싸매 밤새 자고 일어나면 어디로 빠져 달아났거나, 손톱이 아닌 손가락에만 붉은 물이 들어 다시 들이면서도 한여름 어린아이들과 처녀들의 연례행사였다.

시나브로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어디론가 바삐 내달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이 이런 여유를 잃게 했고, 문방구에서 봉숭아물 들이기를 모방한 염색상품을 파는 씁쓸한 세상이 돼 버렸다. 여름 꽃을 손톱에 담아 겨울을 맞는 서정이 뜻밖에도 한 아파트 단지에서 되살아 나고 있다. 

아이는 손톱에, 엄마는 손가락에

태어난지 18개월된 세연이가 언니 품에 얌전히 안겨 생애 첫 봉숭아물을 들이고 있다.
 태어난지 18개월된 세연이가 언니 품에 얌전히 안겨 생애 첫 봉숭아물을 들이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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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마다 무명실 메어주는 이 사람은 행사를 처음 제안한 동네 아주머니 이영숙씨, 아이들 손톱보다 먼저 물든 그녀의 손가락.
 손가락마다 무명실 메어주는 이 사람은 행사를 처음 제안한 동네 아주머니 이영숙씨, 아이들 손톱보다 먼저 물든 그녀의 손가락.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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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물을 들이는 의미가 뭔지 아니?"
"…"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거잖아."

지난 9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산성주공아파트 관리사무소 회의실이 부산하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열리는 봉숭아물 들이기 행사 때문이다.
   
어릴적 기억을 되살리며 자녀들과 함께 온 엄마들이, 엄마가 동행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부녀회 회원들이 손톱에 잘 찧은 봉숭아를 올려놓아주고 비닐로 감싼 뒤 무명실로 동여맨다.

"답답하다고 금방 풀르지 말고, 낼 아침에 빼야 돼. 그래야 예쁘게 들어."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손톱 열개에 모두 들이고, 남자 아이들은 무슨 멋인지 새끼 손가락만 들여달라는 요청이 많다. 주공아파트에 살지 않는 아이들까지 어떻게 알고 몰려들었다.

"얘는 세광아파트에 살아요."
"어, 그래? 이거 주공에 사는 아이들만 들여줘야 하는데…. 안 그러면 벌금 내는데…. 에라, 인심 썼다. 대신 우리 주공 아이들 놀러가면 사이좋게 지내야 해." 

이날 행사를 주관한 이 아파트부녀회 회원들과 관리사무소 직원들은 '친구따라 주공에 온' 이웃 아이들까지 살뜰하게 챙기며 추억인심을 베풀었다.

유모차를 밀고 온 새댁이 "우리 애기 손톱은 너무 작으니 제 손톱에 들여주세요"하니 그것도 마다않는다.

"근데 그 손으로 저녁밥은 어떻게 짓나? 덕분에 외식해야 것네."

처녀시절 봉숭아물 들이던 기억이 새롭다며 초등학생 손녀의 손을 잡고 행사장을 찾은 최은자(66)씨는 오랫만에 같이 들여보라는 제안에 "손이 뵈기 싫어서 난 안돼. 그냥 보기만 해도 젊어지는 것 같아 좋아"라며 한발짝 뒤로 물러선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추억여행을 시켜주고 아이들에게는 이쁜 추억 하나를 보태주는 이 작은 행사는 지난해 주민 이영숙(53)씨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아이들이 활짝 핀 꽃잎과 싱싱한 이파리를 따고 있다.
 아이들이 활짝 핀 꽃잎과 싱싱한 이파리를 따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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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온 꽃잎들을 잘 펴서 말리고…. 준비 과정도 즐거운 놀이다.
 모아온 꽃잎들을 잘 펴서 말리고…. 준비 과정도 즐거운 놀이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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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양이 필요한데다 계속 비가오는 바람에 며칠 전부터 꽃잎과 이파리를 따서 꾸들꾸들 말린 뒤 냉동실에 보관해 뒀다가, 행사일 아침 백반과 섞어 찧고, 무명실과 비닐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준비하고 있다.
 많은 양이 필요한데다 계속 비가오는 바람에 며칠 전부터 꽃잎과 이파리를 따서 꾸들꾸들 말린 뒤 냉동실에 보관해 뒀다가, 행사일 아침 백반과 섞어 찧고, 무명실과 비닐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준비하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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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에 봉숭아 꽃이 참 많거든요. 그 예쁜 꽃이 지고 만다니 아깝다는 생각에 제안을 했는데 생각보다 호응이 컸어요. 덕분에 이렇게 이웃들이 함께 모여 얼굴도 보고 아이들도 기뻐하니 너무 좋잖아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밀려드는 아이들의 손톱에 연신 봉숭아를 올려놓아주는 이씨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손가락 안쪽에는 붉은 물이 들어 있다.

448세대가 사는 산성주공아파트는 젊은이들이 많다. 여성인 이혜윤 관리소장과 부녀회(회장 박혜정) 임원들은 한달에 한 번 등산을 하고, 주민들간에 정을 나누는 등 '아파트 같지 않은 마을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날 행사에 온 아이들에게도 부녀회비로 마련한 간식을 나눠줘 기쁨을 배가시켰다.

"너, 나 없이 어울려 사는데 다 내 자식 같잖아요."

이미연 총무가 사람좋게 웃으며 말한다.

아이들의 손톱에는 짙은 주황색이, 엄마들의 두 손가락 안쪽에도 그 비슷한 색깔이 곱게 물드는 8월의 기분좋은 풍경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봉숭아물들이기, #아파트문화, #봉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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