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취이이~익!! 압력밥솥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금 시각은 밤 11시. 평소 책가방이 땅에 닿기도 전에 "배 안 고파요"를 전주곡처럼 던지는 11살 아들 녀석이 배고프단다. 낮에 산 롤케이크도 있고 만두도 있는데 밥타령을 하고 난리다. 엄마를 귀찮게 할 작정인 게 분명하다.

 

불쌍한 척 나를 응시하는 아들 녀석을 외면한 채 <여인의 향기> 6회를 본 후 밥을 안쳤다. 말로만 듣던 본방 사수를 한 거다. 그것도 6회를 처음으로. '다 부셔버릴 거야'를 외치던 <청춘의 덫> 이후로 몇 년 만이란 말인가.

 

드라마와 담을 쌓은 건 아이를 낳고부터다. 엄마가 된 후, 내 인생의 밤 시간은 아이들에게 저당 잡혔다. 밤 9시부터 분위기를 띄워, 세상에서 자는 게 젤 힘들다는 표정으로 잠든 모습을 보기까지 '애들 재우기'의 노력은 참 다채롭기도 했다.

 

불을 꺼보기도,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따뜻한 우유를 주거나 화를 내보기도, 샤워를 시키거나 이도저도 안 먹히면 '그래 한 번 끝까지 놀아보거라' 했다. 허나 쌍으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정말이지 순수하게 놀았다. 새벽 2시가 넘도록 말이다.

 

'안 되면 포기하라'는 좋은 말이 있는지라 일치감치 밤 프로와는 담을 쌓은 거다. 친구들이 간혹 '까도남' 현빈의 매력에 열을 내더라도 조용히 침묵으로 일관했던 나. 어쩌다 걸려든 재방을 봐도 사오정 출신의 난 도통 내용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런 내가 드라마에 꽂혔다. 오늘 같이 본방사수를 못하면 편성표를 찾아가며 이야기의 맥을 놓치지 않기 위한 살벌한 노력을 해대고 있다. 케이블의 재방영으로 마지막까지 집중했던 드라마가 <내 이름은 김삼순>이었으니, 김선아식 드라마가 내 스타일인가 보다.

 

드라마라면 외려 남편이 꿰고 있다. 평소 집에 와선 숨만 쉬더니 어느 순간부터 시선이  진지해진 걸 느꼈으니 바로 드라마에 집중하는 거였다. 이제 그도 드라마의 재미를 아는 게다.

 

<여인의 향기>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이연재(김선아)와 재벌 2세 김지욱(이동욱)의 관계가 주를 이룬다. 서른넷의 여행사 직원 연재가 담낭암 선고로 6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는 이야기의 시작은 처음부터 쓰나미였다.

 

거기다 10년 동안 자존심 삼키며 충성했던 직장에선 도둑으로 몰리고 이기적인 상사에게 모욕까지 당하지만 상사의 얼굴에 사표를 집어던지며 아쌀하게 때려쳐 주신다. 역시 김선아다. 2회부터 밀려드는 카타르시스란.

 

물론 시한부 여인과 재벌 2세의 러브라인이라는 좀 뻔한 느낌을 부인할 수 없다. 허나 연재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살벌한 의사 채은석(엄기준)이 이제 막 고백을 할 참이고 지욱의 재벌가 약혼녀(서효림)가 연재에게 칼을 갈지만 이 역시 극의 흥미를 돋우고 있다.

 

주인공을 받쳐주는 탄탄한 조연들의 연기와 그들 각자의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역시 케이블로 섭렵한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능력 있지만 재수는 없는 피디 엄기준의 매서운 눈초리는 의사의 눈매로 되살아나 나름 엉뚱한 재미를 더하고 재벌가의 약혼녀 임세경(서효림) 역시 사랑하는 남자에게 이용 당하는 나름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극의 중심이 되는 말기암 선고의 연재. 그녀가 더 애처로운 것은 이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왔다는 거다. 배운 거 없고 가진 거 없는, 그래서 상사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꾸역꾸역 삼키며 적금을 부었더랬다. 배운 거 모자라고 딱히 능력 없는 자, 돈이라도 있어야 숨 쉬는 세상이니 말이다.

 

암 선고를 받고 나서야 남들처럼 살고 싶어지는 연재에게 마음이 간다. 안경 벗고 느닷없이 쭉쭉 빵빵한 미녀가 돼 버려 거리감은 좀 느끼지만 말이다. 살이 올라 예쁘게 통통한 파티쉐에서 마른 시한부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배우 김선아.

 

말기 암 환자를 연기해야 하기에 피나는 노력으로 10kg의 살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재벌 2세 강지욱과의 만남에 설레지만, 시한부라는 어두운 진실에 그 씩씩하고 당당한 목소리 끝이 조금씩 움츠러든다. 그래서 순간순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만 그리지 않은 것은 김선아의 힘이다. '김삼순'스럽거나 <발리에서 생긴 일>(이것도 케이블로 봤더랬다)의 '하지원'스럽기도 한, 당찬 시한부 김선아. 그녀는 자신의 분위기로 극을 이끌어간다. 재벌남의 이동욱 역시 돈만 많은 남자의 무미건조한 눈빛에 물이 올랐다.

 

고졸에 편모. 목구멍이 포도청인 이의 다른 말일 수 있다. 10년 넘게 한 직장을 다닌 나도 그랬다. 직장생활이 고되고 사는 게 진짜 맘 같지 않았다. 매일 술을 마시고 몽롱한 상태로 출근해야 맘이 편할 때도 있었다.

 

연재는 잘 해내고 있었다. 여행사에서 일을 하다 도둑으로 몰리고 암 선고를 받기 이전까지는. 태클을 시작한 인생을 풀기란 어렵다. 그것이 암세포라마면 더더욱.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적는 이연재와 그가 꼬셔 보고 싶었던 재벌 2세 강지욱. 아직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인 그들의 러브 라인은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연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순간에 알게 될 6개월 시한부의 시간. 두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지게 될 죽음의 준비가 어떻게 펼쳐질지 주목된다. 느닷없이 순수한 웃음을 주는 대사나 극의 감정선을 최고조에 달하게 하는 음악 역시 드라마에 힘을 싣는다.

 

물론 연재는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죽기로 예정됐지만 신약 시험이 성공적이거나 16부의 마지막이 끝나기 전까지 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덜 힘들게 사랑을 이루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하며 견디길 바란다.

 

로맨틱 코미디<여인의 향기>는 재벌가의 뻔한 이야기도, 소시민의 비루한 일상도, 그 둘의 사랑이야기도 아닌, 누구나 겪게 될 죽음과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태그:#여인의 향기, #김선아 , #이동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