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른 새벽, 아침이 깨어나기 전의 희끄무레하고 푸르스름한 빛도 좋고, 한낮의 찬란한 태양빛도 좋지만, 저녁 이내 깔리고 어둠이 뒤덮기 전까지의 검푸른 빛을 나는 좋아한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 해가 설핏 기울고 땅거미지면서 어둠으로 물들기 직전의 그 박명의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깜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환하지도 않은, 푸르스름한 저녁. 산그늘 짙어지고 소리 없이 내리는 저녁, 별처럼 사람 사는 지붕아래 하나둘씩 별이(불빛) 돋아나는 시간. 사락사락 고즈넉한 그 무엇이 가슴에 내려앉는 듯 조금은 쓸쓸해지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하루분의 피로를 안고 직장 나간 가장이 퇴근할 시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흩어져 있던 식구들이 모여드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겸허한 시간이고 쉼을 얻는 시간이다. 저마다 개성 강한 화려한 색색으로 눈이 시렸던 한낮의 들끓음도 식어지고 색도 빛도 옅어지면서 절제되고 밖으로 치닫던 마음이 안으로 침잠하며 생각의 여백이 넓어지는 시간. 관조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는 시간이다. 들썩이고 쿵쾅거리던 모든 상념들, 뜨겁게 혹은 시끄럽게 들끓던 상념들이 잦아들면서 고요해지는 시간. 마음이 낮아지고 적요해지는 그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가끔, 남편과 함께 저녁산책을 나선다.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서. 가까운 골목을 한 바퀴 빙 돌기도 하고 옆에 있는 산책로를 걷기도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날엔 큰 길 건너 공터가 있고 자전거도로가 있는 곳까지 좀 멀리 간다.

 

그날도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대문 밖으로 나가 골목길을 벗어나 차가 쌩쌩 달리는 길을 건너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가서 차도를 다시 건넜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넓디넓은 분지(?)엔 저녁 바람이 솔솔 불었다.

 

겨울 지나 봄 가시고 유월, 칠월로 접어들어 해는 더 길어졌다. 저녁을 먹고 산책하러 나와도 아직 어둠은 저만치 멀다. 산들산들 부는 사람이 상쾌해 저녁산책하기에 딱 좋은 저녁이다. 탁 트인 평야. 바람은 거칠 것 없이 마음껏 길게 펄럭이고 자갈돌과 흙으로 섞인 땅 위에는 연두 빛 풀들이 돋아 삭막해 보이는 평야를 융단을 깐 듯 생기를 입혀주고 있었다.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넓은 평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쌩쌩 달렸다. 여기 저기 산책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보였다. 길이 탁 트여 가슴 후련하고 드넓게 펼쳐진 평야가 만든 여백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두 바퀴 저어 가는 길.

 

어느새 땅거미지고 한낮의 햇살아래 밝게 빛나던 사물들은 점점 빛이 바래져갔다. 땅거미지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이기심과 욕망과 욕심, 그 지꺼기들이 쓰레기처럼 밀려든 냄새나는 우리 삶의 자리를 가만히 숨겨주듯 어둠은 장막을 쳤다.

 

얼마쯤 자전거를 타고 달렸을까. 산그늘은 더욱 짙어지고 해가 꼴깍 넘어간 서산 위에 붉게 물드는 저녁놀. 브레이크를 잡고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짧은 찰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노을이 복숭아 빛으로 하늘가를 물들이고 있었다. 어둠에 싸이는 오봉산 한 귀퉁이에 깔리는 저녁놀.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에 한동안 말을 잃고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점점 노을빛 희미해지면서 하늘은 잉크 빛으로 물들었다. 커텐으로 가리듯 여윈 빛마저 갈무리하고 푸른 공기는 어느새 어둠으로 짙어져갔다.

 

오봉산 자락 아래 기댄 사람 사는 지붕아랜 전등불이 별처럼 돋으면서 은하수처럼 아련했다. 저만치 등 뒤에는 동신어산, 옆과 앞에는 오봉산 능선이 펼쳐져 있었다. 우린 자전거 위에 앉은 채 어두워지는 저녁풍경에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밀레가 '만종'을 그릴 때의 느낌이 이랬을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둠이 찾아오면서 밝아지는 가로등 불빛 아래 자전거에서 내려서 걸었다. 너도나도 텃밭하나쯤 끼고 있는 집집마다엔 불빛이 창문을 넘었다.

 

고즈넉한 저녁풍경...나는 이 아름다운 저녁풍경을 볼 때마다 삶은 살아 볼만한 거다 생각하곤 한다. 세상엔 험한 일, 괴로운 일도 많지만 그래도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가. 매일 선물처럼 어둠을 깨치고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온다. 반복되는 듯한 날들 속에서 사람들은 그 고마움을 잊고 살기도 하지만, 매순간 순간이 경이로움이 아닌가. 이 시간에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은 어제의 것이 아니고 오늘, 바로 오늘 이 시간 내게로 온 것들이 아닌가.

 

그 시간은 쉼이다. 이른 아침 학교 갔던 아이들도 직장 나갔던 어른들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온 식구들이 저녁 불빛 아래 모여들 시간, 하나둘씩 지붕 아래 전등불 켜지고 달그락거리는 저녁 짓는 풍경. 수증기 올라오는 국과 찌개가 식탁 위에 올라올 시간. 혹은 막 저녁상을 물리고 거실에 모여들 시간. 밤도 낮도 아닌 밤으로 가기 직전의 시간. 나는 그 경계를 좋아한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던가. 나는 이 경계에서 사유의 꽃을 피운다. 쨍한 햇살 아래서 온종일 긴장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면서 한시름 놓고 큰 숨 한 번 내쉬는 시간. 온종일 먼지 날리며 일하던 손을 탁 놓고 퇴근을 서두를 시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탁 앞에 모여들 시간...마음 한 자리 여백이 점점 넓어지는 시간. 나는 그 푸른 경계를 좋아한다.


태그:#저녁풍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