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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와 가혹행위는 군기강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일까? 최근 해병대 총기사건을 계기로 폭력적인 병영문화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오마이뉴스>는 '폭력으로 녹슨 국방' 기획 기사를 통해 전근대적인 한국군의 현실을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할 예정이다. [편집자말]
 지난 6일 강화도 해병대 해안소초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희생된 병사들의 합동영결식 한 해병대원이 눈물을 닦고 있다.
 지난 6일 강화도 해병대 해안소초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희생된 병사들의 합동영결식 한 해병대원이 눈물을 닦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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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은 형무소와 지옥 사이에서 지옥 쪽에 더 가까웠다."(옛 일본군 병사 모리가네 센슈)
"아들이 '부대 생활보다 구속된 지금이 마음은 더 편하다'고 말하더라."(해병대 총기사건 공모혐의로 구속된 정아무개 이병 어머니)

닮았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자신의 군 생활에 대해 회고했던 옛 일본군 병사의 고백은 60여 년의 세월을 넘어 2011년 7월의 한국 군대의 자화상과 너무도 닮아 있다. 물리적·심리적 폭력의 강도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우리 군에서 근절되지 않고 있는 병영폭력의 뿌리는 제국주의 일본 군대에서 기인했다.

지난 18일 해병 2사단에서 열린 '해병대 병영문화 혁신 대토론회'에서는 해병대 장병들이 구타·가혹행위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결과는 놀라왔다.

총기사고 전에는 (구타·가혹행위가) '필요하다'가 46%, '해서는 안 된다'가 54%로 답변이 나왔으나 사고 후에는 '필요하다'가 25%, '해서는 안 된다'가 75%였다는 것이다. 구타·가혹행위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총기사고 전에 견주어 29% 늘었지만 구타·가혹행위에 대해 여전히 해병대원 4명 중 1명은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군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타와 가혹행위 등 이른바 사적제재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타가 없으면 군대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일까?

구타와 가혹행위가 일상화되었던 옛 일본군

 1943년 3월 10일, 옛 일본육군이 제 38회 육군기념일을 맞아 내놓은 포스터. 총검을 꽂은 일본병사가 미국과 영국 국기를 짓밟고 있다.
 1943년 3월 10일, 옛 일본육군이 제 38회 육군기념일을 맞아 내놓은 포스터. 총검을 꽂은 일본병사가 미국과 영국 국기를 짓밟고 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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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직후 중앙정부의 직할군대의 성격으로 근대식 군대가 창설됐다. 이때 만들어진 일본군은 편성과 장비에서는 근대 군대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장병들의 구성은 서구와 같이 국민군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전국 각지의 번(藩)을 중심으로 모아진 봉건적 무력집단을 흡수해 만들어졌던 일본군의 중추부는 봉건적 질서를 축으로 하는 옛 무사계급 출신자들에 의해 구성됐다.

무사계급 출신을 주체로 만들어진 군대에 불안감을 느꼈던 메이지 정부는 1873년 1월 '국민 개병제'를 내걸고 징병제를 시행했다. 그런데 징병제 군대의 중심이 된 농민 출신 병사들은 토지개혁에 의해 자립한 자영농이 아니라 봉건적 질서 속에 속박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근대국가를 표방한 메이지 정부의 징병이 과거 봉건지배층이 강요했던 부역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이들에게 근대 군대의 병사로서 그 직무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수행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강제동원에 대한 불만이나 반발을 누르기 위해서 지나칠 정도의 엄격한 군기에 의한 억압이 불가피했던 것은 일본 군대의 숙명이었다. 창설 초기부터 일본군에게 내려졌던 '육해군 형률'(1871), '보병내무서'(1872), '군인훈계'(1878), '군인칙유'(1882) 등은 충실, 용감, 복종 등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교의로 장병들의 의식을 통제하려 했다.

특히 군인칙유에서는 '오로지 한 마음으로 본분을 지키고, 의(義)는 산보다도 무거우며 죽음은 새털보다도 가볍다고 각오하라. 그 지조를 깨고 실패해 오명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문구로 개개 병사들을 협박하고 있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절대가치로 삼아 개인의 생명조차도 전적으로 군대 질서 속에 매몰 시켰던 것이다.

가족관계를 군대 질서로 도입... '사랑의 매' 낳아

이런 움직임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고, 일본이 팽창 정책을 추구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동시에 상부로부터의 일방적인 강제에 대한 반발을 고려, '병영은 고락을 함께 하고 생사를 같이 하는 군인의 가정'이라는 가족주의가 군대 내 질서로 도입된다. 가족 관계속 지배·복종이라는 관계를 군대 내에 들고 와 군내의 반발을 흡수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중대는 가정이다. 중대장과 부하를 부모와 자식 관계로 연결시켜 고참군인과 신참군인을 형제와 같은 관계를 가지게 할 필요를 절규해서 끝내 목적을 달성하고, 중대는 군대 내의 한 가정이 되었다."

이런 의도는 1920년대 일본군에 가족주의를 도입한 실질적 책임자였던 다나카 기이치의 연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목적의식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족주의를 도입함으로써 문제해결을 시도했던 것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았다. 천황제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가족국가관을 군대 안으로 들여옴으로써 예전보다 더 상관의 존재를 절대화하는 결과를 빚게 된 것이다. 즉 상관의 명령은 일왕의 명령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구타와 같은 사적제재(린치)가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고 또 빈번하게 행해지고, 폭력이 군기유지라는 명분으로 합법화됐다.

 일본 군인들의 내무생활 지침을 담은 '군대내무서'(1908년 제정, 1943년 군대내무령으로 대폭 개정)에서는 군대를 '一大家族'으로 간주했다.
 일본 군인들의 내무생활 지침을 담은 '군대내무서'(1908년 제정, 1943년 군대내무령으로 대폭 개정)에서는 군대를 '一大家族'으로 간주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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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상태, 병기손질, 내무생활, 태도 등 장병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장교는 부사관을 구타하고 부사관은 고참병을, 고참병은 신참병을 구타하는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상급자가 지시한 것에는 옳고 그름을 떠나 일체의 비판과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군인들의 내무생활 지침을 담은 '군대내무령'(1908년 제정된 '군대내무서'를 1943년에 개정)은 11항에서 "명령은 겸손하게 지키고 실행한다. 결코 당부당을 논하거나 그 원인과 이유 등을 질문하는 것을 불허한다"고 명기되어 있을 정도였다.

폭력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일본군을 갉아 먹었다. 병사들은 아침, 저녁으로 군인칙유에서부터 군대내무령까지 갖가지 암기사항을 기계적으로 외워야 했다. 또 몸이 아픈 것은 정신상태가 해이해진 것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져 '기합을 넣는다'는 미명하에 또다시 폭력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 측면에서 노예 상태에 다름 아니었던 일본군대의 강요된 군기는 강제력이 사라지면 여지없이 붕괴했다. 강제력이 없어졌을 때 자발성이 결여된 병사의 전투의지 또한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군의 병영문화 속에는 해방 전의 일본군 폐습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편제와 제도는 미군의 그것을 차용했으면서도, 고압적 군대문화를 가진 옛 일본군 출신들이 군 창설을 주도했던 까닭이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우리에게 악습을 남겨주었던 일본의 병영문화는 과거와 사뭇 달라진 지 오래다. 현재 일본 자위대의 모습에서 옛 일본군의 고질적 폐습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구습에서 '환골탈태'한 자위대... 병사끼리는 경례 않는 미군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은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를 만들면서 철저한 인적청산으로 옛 일본군 장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또한 서구식 '문민통제' 원칙에 따라 경찰예비대의 참모조직을 모두 경찰 등 민간인으로 채웠다. 이와 함께 모병제를 채택한 자위대가 대원 확보를 위해 벌여온 '매력 있는 자위대 만들기'는 억압적 문화를 없애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 인권 존중 의식이 뿌리내리고, 숙소 등 병영생활 여건이 크게 향상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형식상 정식 군대가 아닌 자위대와 남북대치 상태에 있는 한국군을 기계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과거 비인간적인 구타와 가혹행위가 일상화되었던 옛 일본군의 모습에서 '환골탈태'해 새로 태어날 수 있었던 자위대의 의식적 노력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겸허하게 경청해봄 직하다.

또 사적관계에서는 위계질서를 따지지 않는 미군의 병영문화도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미군의 경우 장교에게만 경례를 하고 이병에서 상사까지 서로 경례하지 않는다. 미군은 직책에 의한 지휘 계통을 철저히 확립하고 있고, 병사들끼리는 서로 간섭을 최소화하고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구조여서 사적 제재는 필요하지도 않고, 발붙일 공간도 없다. 일각에서 주장하듯 병영문화가 바뀐다고 해서 전투력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미군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해병대 총기사건이 보여주듯 우리 군에서는 아직도 '고참은 하느님과 동기다', '억울하면 군대 일찍 오지 그랬느냐'는 식의 비합리적 의식이 남아 있고, 이것이 구타와 가혹행위, 집단 따돌림의 배경이 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정부 당시 '군인복무 기본법'을 추진하는 과정이 보여주 듯 '병장과 이등병이 서로 친구 하자는 것이냐', '군대를 보이스카우트로 만들려는 것이냐'는 등의 시각이 군은 물론 우리 사회 전반에도 폭넓게 깔려 있어 병영문화 개선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남아있는 한 군내 폭력 근절을 위한 군 당국의 거듭된 다짐도 결국 구두선(口頭禪)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군 기강과 병사의 인권을 대립적 개념으로 파악하는 군 수뇌부의 인식전환과 아울러 국민적 관심과 이해로 군이 시대적, 사회적 변화에 맞게 스스로 변화하도록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총기사건#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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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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