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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시나 내 님은...귀를 활짝 열고 귀기울이는...
▲ 능소화... 언제 오시나 내 님은...귀를 활짝 열고 귀기울이는...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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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괴로운 것은/그리움이었다./사랑도 운명이라고/용기도 운명이라고/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별들도 강물 위에/몸을 던졌다'   -정호승 시 '새벽편지'

정호승 시인은 '새벽편지'란 시에서 그리움을 죽음보다 괴로운 것이라 했습니다. 박인환은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라고 노래했고, 황지우 시인은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모든 발자국이 네 것이었다고 '기다림'에 대해 가슴 조이는 듯 썼지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살다보면 그리움 하나씩은 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손닿지 않는 별처럼 그리움 하나 간직하고 살고 있네요. 그것도 세월이 가면 낡은 흑백사진처럼 낡고 흐려지겠지만 말입니다.

그리움이란 뭘까요?! 색에 비유한다면 어떤 빛깔일까요? 연분홍빛일까, 노란빛일까. 그립고 그리워 그리워하다 멍든 보랏빛일까. 붉디붉은 장미 빛일까. 저마다 간직한 그리움의 빛깔도 다채롭겠지요.

능소화
▲ 빛과 그림자... 능소화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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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담벼락에 수줍은 듯 얼굴에 홍조를 띤 소녀의 뺨처럼 자태가 고운 능소화가 꽃을 피운 지 여러 날째입니다. 능소화가 피면서 여름 장마도 시작되었지요. 작년 이맘 때 피었던 능소화가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워냈습니다. 이따금 길을 걷거나 산책을 하다가도 능소화에 이끌려 남의 집 높은 담장 아래 멈추어 서있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고 또 저렇게 보고 햇빛을 받고도 보고 빛을 등지고도 보고 또 봅니다. 맑은 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핀 능소화와 흐린 날 비오는 날에 보는 능소화의 표정은 사뭇 다릅니다.

궂은 날 계속되다 모처럼 날이 맑은 날엔 하늘을 배경으로 한 능소화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서 이웃 담벼락 밑 능소화 앞에 갔습니다. 능소화는 살랑살랑 불어대는 바람에 남실거리고 하늘은 맑았지요. 맑았다 흐렸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늘빛에 따라 꽃은 빛과 그림자를 만들며 꽃빛깔도 이채롭게 바뀌었습니다. 황홀한 빛깔, 빛의 잔치였습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빛이 있을 때와 햇빛이 구름에 숨을 때 꽃은 표정을 달리했습니다. 맑은 하늘, 쨍한 햇살을 받고 있는 능소화가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 보이고 흐렸다 맑았다 하는 하늘 표정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능소화의 표정에 한참을 서 있었답니다.

...모처럼 맑은 날 맑았다 흐렸다 하는 하늘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잔치...
▲ 능소화... ...모처럼 맑은 날 맑았다 흐렸다 하는 하늘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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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담벼락도 어림없다. 그리움은 담을 넘고...
▲ 능소화... 높은 담벼락도 어림없다. 그리움은 담을 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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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을 활짝 열어 멀리 내다보는 것 같은 능소화를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애잔했지요. 얼마 전에 능소화에 얽힌 전설을 듣고서야 왜 그렇게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복숭아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답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앉게 된 소화는 궁궐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 번도 찾아오질 않았다 합니다. 결국 그녀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기거하게 되었는데 여전히 소화는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답니다. 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다가 돌아가지는 않을까 싶어 담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을 넘어 쳐다보며 안타까운 기다림의 세월만 흘렀습니다.

어느 여름 날, 긴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결국 상사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잊혀 진 구중궁궐의 이 여인은 초상조차도 치러지지 않았다는군요. 하지만 담장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한 '소화'의 유언을 시녀들이 그대로 시행했고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온갖 새들이 꽃을 찾아 모여드는 때 빈의 처소 담장에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발자국 소리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다 합니다. 그것이 바로 능소화라 합니다.

오감을 활짝 열고 귀를 기울이고...
언제 오실까 내님...
▲ 능소화 오감을 활짝 열고 귀를 기울이고... 언제 오실까 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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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전설에 불과하지만 슬픈 얘기입니다. 다시 보니 능소화는 정말 귀를 활짝 열어놓고 귀 기울이고 있는 듯한 표정입니다. 아무리 다른 소리가 들려와도 들리지 않고 오직 님의 발자국 소리에만 가 있는 귀, 온몸이 한 개의 귀가 되어서 오감을 열고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능소화의 그리움. 높은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내민 덩쿨은 능소화의 마음자리이겠지요. 한발짝 두발짝 내딛다가 담장을 넘어 고개를 꺾어 멀리 내다보려고 발돋움하는 능소화. '하늘도 능멸하리만큼 담장을 넘어보려고 키가 크는 꽃', 이제나 저제나 님이 오실까 밤낮 기다리는 여인의 기다림이 읽혀졌습니다. 오늘 다시 바라보는 능소화는 그래서 더욱 애틋합니다.

실연당한 여인보다 더 불행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라고 누가 그랬던가요? 그 어떤 형벌보다 그 누구도 내게 귀 기울이지 않고 관심 기울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무관심이 가장 큰 형벌이듯이.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 받지 못한 요즘 사람들 중에는 욱 하는 분노와 적대감을 참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를 죽이기도 하는 것처럼. 또 급히 시들어버리는 것처럼, 무관심과 잊혀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불행해 합니다.

온몸이 귀가 되어 담장을 넘어 귀를 활짝 열고 있는...
▲ 능소화... 온몸이 귀가 되어 담장을 넘어 귀를 활짝 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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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능소화를 사람들은 왜 울안에 심을까요? 능소화에 얽힌 슬픈 전설도 있지만, 옛날엔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던 꽃이라고도 하네요.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라고 합니다. 구중궁궐화, 금등화라고도 한다는군요. 능소화는 또 일명 어사화라고 해서 문과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귀향길에 오를 때 말을 타고 머리의 관에 꽂았던 것이기도 하답니다. 수줍은 새악시 볼처럼 홍황색 꽃이 어여뻐서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것 때문에 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부터 능소화가 예뻐서 작은 마당이라도 있으면 이 꽃을 심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꽃에 얽힌 슬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차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움만으로, 기다림만으로 발돋움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막막한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조금은 아는 까닭이겠지요. 그냥 이웃집 능소화를 내 것인 양 보고 지내려합니다. 아니면 그 어떤 감정도 색깔이 다 빠져나가고 무색무취가 되었을 때면 용기를 낼 수도 있겠지요.

시나브로 피고 지고 피고 지는 꽃들, 그 꽃시계로 계절을 읽는 요즘입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엔 다시 소낙비 내려 또 한 번 숲을 적셨습ㄴ다. 긴 여름 장마에 건강하시고 늘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태그:#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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