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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이 풍화되었다."  -천양희, <너에게 쓴다>-

 

잘 지내시는지요.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해 여름에 이곳으로 이사 온 뒤 어느새 일년이 다 찼습니다. 시나브로 계절은 바뀌고 이곳에서 여름과 가을과 겨울 봄을 맞았고 다시 여름을 맞이하였습니다. 저는 이곳에 살면서 사계절을 뚜렷이 보고 소리로 듣고 느낍니다. 처음엔 변두리 지역이라 겁 많은 저는 사물도 사람도 일단 의심하고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곤 했었지요. 차음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좋은 것들을 새록새록 발견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곳에선 사계절을 뚜렷하게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강 건너편에 살 땐 강가에 나가 강변산책을 자주 했었는데 이쪽 강 건너로 이사 온 뒤에는 또 다른 것으로 마음 때를 씻고 헹구곤 합니다. 이곳엔 오봉산이 집 뒤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가가호호마다(거의) 내남없이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크고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고 한갓진 마을입니다. 어느새 일 년 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는 마음과 정신에 내려앉은 온갖 찌꺼기를 걸려내지 못하고 몸속에 숙변을 쌓듯 그렇게 꽉 채운채로 냄새피우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쁜 삶 속에도 일부러라도 여백을 마련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요. 가쁜 숨을 깊게 내쉬며 관조하는 시간이 있어야 내가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고 또 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천지에 널린 대자연의 경이를 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바라보는 숲과 나무와 각양 채소와 풀들...그 모든 것이 경이로움입니다. 봄이 오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고 땅을 갈아엎어 파종을 하고 죽은 듯 한 마른 씨앗들이 땅을 헤집고 새순을 틔우고 잎이 나고 가지가 무성해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그렇게 꽃이 피고 지고 열매 맺는 경이를 아시는지요.

 

하룻밤만 자고 나면 어제와 달라진 어린 생명들을 바라보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대자연의 위대함에 놀랄 뿐입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 작은 생명들의 들숨과 날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것들의 맥박이 느껴집니다.

 

어려서부터 시골서 나고 자랐지만 미처 몰랐던 것들, 왜 이제야 보이는 걸까요. 이 작은 것들의 변화는 제게 매일의 기적이요 변화로 다가옵니다. 생명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비로소 눈 열고 보는 눈이 조금은 열린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변화...매일이 기적임을 체험합니다. 오늘도 숨 가쁘게 살아가는 도시생활자들은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감동입니다. 마음 낮추고 몸 키 낮추어서 가파른 숨도 잦아진 뒤에야 보이는 것들입니다.

 

봄이 오면서 앞 다투어 피었던 봄꽃들이 지고, 초록은 부지런히 산허리를 감아 돌며 타고 연두빛 물결로 천지를 물들였던 오월도 가고 유월도 막바지입니다. 이곳에서 보낸 봄은 황홀했습니다. 매화꽃, 개나리꽃, 목련꽃 등 꽃 먼저 피는 봄꽃들 피고 진 뒤 5월엔 향기 높은 아카시아 꽃 온 산허리를 감싸고 흐드러지게 피어 온 마을에 아카시아 향기로 황홀하게 했었지요.

 

하얀 찔레꽃 덩달아 피어 두 꽃은 5월 내내 향기로웠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지면서 풋보리와 밀은 누렇게 익었고 새들은 점점 더 많이 날아와 새벽을 깨우는 나날들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계절은 자랐고 해는 더 길어졌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면서 이웃 사람들의 텃밭의 작은 변화의 기척을 예민하게 지켜보고 감지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깜짝깜짝 자주 놀랍니다. 콩 꽃, 오이꽃, 나팔꽃, 가지꽃, 민들레꽃, 엉겅퀴꽃, 클로버꽃...하룻밤만 자고 나면 꽃이 피고, 또 하루 자고나면 열매를 맺습니다. 보리수 열매도 붉게 익었고 벚나무엔 버찌도 농익어 후르륵 후르륵 떨어졌습니다.

 

이곳엔 산딸기 재배도 흔한 것 같습니다. 집 안과 밖에 온통 산딸기를 재배하는 집도 보입니다. 산책길 양쪽 가에다 재배하는 산딸기나무들은 처음엔 빨간 막대기를 꽂아놓은 것처럼 볼품없이 서 있었는데 새순 돋고 잎이 무성해지더니 어느 날 수줍고 앙증스런 하얀 꽃을 피웠습니다.

 

이내 꽃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어린 연두빛 산딸기가 열리더니 붉게 익어 이젠 절정입니다. 따고 또 따도 계속 산딸기는 많이 나고 익고 또 농익어 농부의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곧 다 지겠지요.

 

산책길엔 유난히 크고 우람해서 시원한 그늘과 산책길 운치를 더해주는 나무들이 몇 그루 있습니다. 느티나무, 벚나무, 자귀나무 살구나무 등입니다. 어느 날엔가는 산책길을 걷다가 벚나무 아래 까만 열매들이 떨어져 발에 밟히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열매지? 의아해했지만 그냥 지나치기를 몇 번, 어느 날 아침 어떤 아주머니가 길가에 앉아서 그 까만 열매를 줍고 있는 것을 보았답니다.

 

알고 보니 벚나무에 열리는 열매 '버찌'라는 열매였고 그 열매의 효능도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피로회복과 식욕증진, 불면증, 감기예방 등등 벚나무 가지나 껍질, 열매까지 버릴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알고 보면 자연 속에 다 해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엔 자귀나무에 자귀꽃이 피었습니다. 벚나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자귀나무는 넉넉한 여백이 느껴지는 가지에 잎이 무성하고 생김새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넓게 가지를 뻗어 가지와 가지사이에 여백이 많은 이 나무는 '애정목'이라고 한다는군요. 며칠 전엔 한 두 송이 자귀꽃이 피었더니 오늘 아침 산책길에 다시 만난 자귀나무엔 자귀꽃이 가지마다 피어 흐드러졌습니다. 연분홍빛 섬세한 꽃잎들은 여느 꽃과 또 달라 신비합니다.

 

자귀꽃은 밤만 되면 서로 꼭 끌어안고 자는 것처럼 보여서 야합수, 합환수, 합혼수, 유정수라고도 부르기도 한답니다. 자귀나무를 집 주위에 심어놓으면 가정에 불화가 없어지고 이혼을 하지 않으며 부부 사이에 늘 화목하고 백년해로한다고 믿고 그렇게 전해져 내려온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중국에 '두고'라는 사람에게 조씨라는 현명한 아내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인은 해마다 5월 단오 날이면 자귀나무의 꽃을 따서 말렸고 그것을 베개 속에 넣어 두었다가 남편이 불쾌해 하는 기색이 보이면 이 꽃을 조금씩 꺼내어 술에 넣어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일명 합환주라고 부르기도 하다네요.

 

이것을 마신 남편은 곧 전과 같이 명랑해졌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해져서 일가화합의 묘약으로 다투어 본받았다고 합니다. 자귀꽃에 대해 검색해봤더니 그 효능도 다양하고 탁월하네요. 자귀꽃은 진정양, 권위약으로 쓰고 배당체인 알비토신은 자궁수축 작용이 있으며 껍질 달인 물은 최산 작용이 있다고 합니다.

 

매일 매일이 새날입니다. 이 시간, 바로 지척에서 참새소리 부엉이 소리 간헐적으로 들려옵니다. 비는 오다가다 이젠 흐리기만 합니다. 벚나무에 버찌는 까맣게 익어 떨어지고 자귀꽃은 막 피어 흐드러졌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대자연 속의 크고 작은 생명들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제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이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생명의 경이를 느끼며 오늘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거실 안에 있는 작은 화분 속에서, 텃밭에서, 산책길 옆에서 숲속에서...생명들의 들숨과 날숨, 맥박 뛰는 소리 힘차게 펌퍼질하는 이 계절에 소식 전합니다. 지금 이곳엔 자귀꽃이 한창입니다.


태그:#자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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