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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공부 재미에 흠뻑 빠지신 이경서 할머니
 한글공부 재미에 흠뻑 빠지신 이경서 할머니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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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 여사의 하루라는 내용으로 나의 일정을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어떤 일정이 있었나요? 자, 누가 발표해 볼까요?"

"네, 저는요. 아침에 일어나서 야채주스 갈아 먹고요. 학교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장 일곱 바퀴 돌고, 집에 와서 밥 먹고 아침마당 보다가 복지관에 왔습니다."

6월, 30도를 웃도는 초여름 날씨가 무색할 만큼 뜨거운 향학열을 불태우는 현장이 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주변에 있는 마포평생학습관의 문자해득교실이다. 질문하는 선생님(류갑현, 75세)이나 대답을 하는 학생들이나 모두가 머리가 하얀 노인이지만 배우고자 하는 진지함과 열정은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 보인다.

이들은 서울시교육청에서 올 4월부터 실시한 문자해득프로그램에 참여해 늦깎이 한글 공부를 하는 '백발의 초등학생들'이다.

"숙제 내줄게요. 오늘 배운 김 여사의 하루를 보시고 여러분도 나의 하루 일정표를 적어 오세요. 그리고 지난번 갔던 현장학습 소감문 오늘 내지 못한 분들은 목요일에 내시고, 늦어도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꼭 내셔야 합니다. 그럼 마치고 인사합시다. 반장."

"차렷, 경례!"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 교실을 빠져나간 후 늦깎이 공부의 매력에 빠져 있다는 이경서(1932년생, 79세)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한글 공부를 하는 지금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를 '하라버지'로 알고 죽을 뻔했다"

"정말 행복해요. 그전에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힘들고 여러 가지로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친구가 공부하러 다닌다고 해서 호기심에 따라와 봤더니, 정말 아주 좋은 거예요. 이걸 몰랐으면 태어난 보람도 없을 뻔했어요."

할머니의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군. 해방 1년 반 후 가족이 월남해 서울 마포구에 터를 잡고 지금까지 마포구를 떠나 살아 본 적이 없으니, '마포구 원주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고향은 이북이라 논농사는 거의 없고 콩, 팥, 수수, 기장 같은 잡곡 농사를 많이 지었어요. 보릿고개... 보릿고개... 해도 배고픈 건 모르고 살았는데, 학교는 다녀보지 않았어요. 우리 마을에는 학교도 없었지만, 학교에 다니는 여자애들도 없었어요. 그리고 그땐 공부해야겠다 하는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아. 별로 불편한 걸 못 느꼈거든요."

남존여비의 관습이 남아 있던 그 시절의 부모님들은 딸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이름 석 자 제대로 쓸 줄 몰라도 애 잘 낳고, 밥 잘하고, 남편과 시부모 잘 모시면 좋은 처자, 좋은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로 배운 여자를 비하하기 일쑤였다. 

30도를 웃도는 더위도 무색한 할머니 초등학생들의 면학열기
 30도를 웃도는 더위도 무색한 할머니 초등학생들의 면학열기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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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가본 일은 없지만 이경서 할머니는 글을 전혀 모르는 정도는 아니다. 대여섯 살 무렵 다녔던 교회 주일학교에서 잠깐이지만 글을 배운 적도 있고, 열 살 언저리에는 야학도 몇 번 나가봤다. 그래서 받침이 많거나 뜻이 어려운 단어가 아니라면 아쉬운 대로 읽을 수는 있어 말 그대로 '까막눈'은 아니었다.

"하지만 쓰기는 잘 못해요. 지금도 어렵지만 전에는 '할아버지'하면 '하라버지' 이렇게 소리 나는 대로 썼거든요. 신문을 봐도 그렇고 뭐든지 쉬운 글자는 읽어도 어려운 말은 잘 몰라서 그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예를 들자면 '난중일기'가 뭔지 그런 것도 몰랐는데, 여기서 공부하면서 배웠어요. 글을 배우니까 세상이 달라 보여요. 평생 그런 재미, 그런 뜻도 모르고 살다 죽을 뻔했잖아요."

어린 시절에는 여자는 글 같은 건 몰라도 살림만 잘하면 된다는 여성비하의 시대적 배경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는 자식 키워가며 어려운 살림 꾸려가느라 제대로 된 한글 교육을 받아 볼 기회가 없었던 이경서 할머니.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 가는 여학생 보면 부럽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어린 시절 즐겨 불렀다는 구전동요 한 자락을 들려주신다.  

"어머니 나 학교 보내주세요.
깜장치마 흰저고리 책보를 끼고
학교에 가는 것이 나는 부러워~~♪"

담 넘어 학교 가는 여학생들을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어린 시절의 할머니 모습이 그려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한글 공부를 시작한 요즘, 할머니는 부러운 게 하나도 없다. 세상이 좋아져서 당신 같은 노인들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왔고, 배움을 통해 80년 가까운 인생을 살면서도 몰랐던 우리글,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알게 되니 당신 인생에서 요즘같이 보람 있고 행복한 날들이 또 있었나 싶다는 것이다.

이제는 읽는것도 쓰는 것도 어느정도 자신이 생겼다는 이경서 할머니
 이제는 읽는것도 쓰는 것도 어느정도 자신이 생겼다는 이경서 할머니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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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해요. 학교에 오면 선생님이 내 이름을 매일 불러주고 학생이라고 해주시고. 얼마나 좋은지 몰라. 내가 매일 그러잖아. 학습관에 공부하러 오면 열여섯 살 여학생이 된 것 같다고. 소풍 가는 날에는 애들처럼 마음이 들떠서 전날 잠도 못 자요. 얼마나 좋은지."

"79년 인생에서 한글 배우는 지금이 가장 행복"

열여섯 소녀처럼 수줍게 얼굴을 붉히시는 할머니. 요즘 할머니는 소녀답게 시(詩)의 세계에 흠씬 빠져 계신다.

"글을 몰랐을 때는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는데, 이제 글을 알고 나니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어제는 정지용 생가로 현장학습 다녀왔어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생각해 봐요. 예쁠 것도 없는 아내가 맨발로... 그땐 어려워서 신발도 없었잖아.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정지용의 시 <향수>의 한 구절을 단숨에 외워내시는 79세 문학소녀 김경서 할머니. 한글을 배워가며 한글의 맛과 멋에 흠뻑 빠진 할머니에게도 걱정이 하나 있단다. 얼마 후면 졸업반으로 올라가고 일정한 시험을 거쳐 초등학교 학력 인정서도 받게 된다지만 막상 졸업한다니 아쉬움과 서운함이 앞서는 것이다.

"졸업반으로 올라가야 한다는데 난 졸업반이 싫어요. 지금 내 나이에 인증서가 뭐가 필요해. 나는 그냥 우리 반 친구들과 선생님과 오래오래 공부하면 좋겠어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중학교 공부한다지만 수학도 어렵고 영어도 어려워서 중학교는 엄두도 못 내거든요. 나는 그냥 딱 지금처럼만 공부하면 좋겠어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일흔아홉에 시작한 공부가 얼마나 좋으면 벌써 졸업을 걱정할까. 다리가 성하고 몸을 움직여 스스로 나올 수 있는 날까지는 공부를 쉬고 싶지 않다는 할머니. 90세, 100세까지  건강해서 미래의 어느 날, 할머니가 쓰신 시를 감상할 날이 오길 바라본다.

무학력 성인을 위한 문자해득 프로그램은? 
서울시교육청(교육감 곽노현)은 지난 4월부터 초등학교 15곳, 문해 교육기관 16개 기관 총 31개 기관에서 초등학력 취득이 가능한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무료로 운영되며 외부기관에 따라 3만 원의 수업료를 받는 곳도 있다.

만18세 이상 저학력, 비문해 성인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각 단계 중 자신의 수준에 맞는 단계부터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고, 3단계부터 이수할 경우 최소 1년 만에 초등학교 졸업학력 취득이 가능하다.

수업은 한글과 초등 1∼2학년 과정을 배우는 1단계와 초등 3∼6학년 교과를 반영한 2·3단계가 있으며 각 단계의 이수 기간은 1년이다.


태그:#서울시교육청, #문자해득프로그램, #비문해교실, #곽노현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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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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