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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마닐라의 옛 스페인 사람들 거주지인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안에는 아주 특별한 곳이 있다. 나는 그 곳을 찾아 가족과 길을 나섰다. 우리가 탄 차는 인트라무로스 성벽의 북문을 통해 인트라무로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미군의 폭격을 견디어낸 스페인 양식의 건물들이 남아서 역사의 자취를 풍기고 있었다.

마닐라에 남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 인트라무로스 입구. 마닐라에 남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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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입구에는 총을 든 경비원이 서 있는데, 총에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총기 소유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자유로운 이곳 필리핀은 공공건물이든 개인 소유의 건물이든 경비원들은 모두 실탄이 든 권총과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다. 심성 착한 필리핀 사람들에게 인정을 느끼다가도 시내 곳곳에서 총기를 든 경비원들을 보면 움찔해지곤 한다.

인트라무로스 레알 스트리트의 돌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살구빛과 회색 석재가 아름다운 예쁜 성당, 성 어거스틴 성당(San Augustin cathedral)이 눈 앞에 들어왔다. 어거스틴은 4세기에 이탈리아와 알제리에서 활동했던 서방교회의 신학자로서 서양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성인이었다.

수많은 지진과 폭격에도 살아남은 세계문화유산이다.
▲ 성 어거스틴 성당. 수많은 지진과 폭격에도 살아남은 세계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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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에는 이 성당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표지판이 자랑스럽게 서 있다. 성 어거스틴 성당은 인트라무로스 내의 스페인 식민시대 초기 건축물 중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 어거스틴 성당은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인트라무로스 내부의 마닐라 대성당이 규모면에서는 필리핀에서 최고지만 미군의 폭격 후에 재건되었기에 성 어거스틴 성당의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건립된 지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성 어거스틴 성당을 흔들었던 재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우선 1571년에 대나무로 처음 지어졌던 성당 건물은 1574년, 1583년에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사라졌다. 그 후 1587년에 석재를 이용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무려 20년이 지난 후인 1607년에 바로크 양식의 석조 성당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 이후 1645년~1970년에 성 어거스틴 성당에는 7차례의 지진이 엄습했다. 그러나 수많은 지진 당시에도 성당은 놀랍게도 전혀 건물이 손상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마닐라를 재로 만들어버린 1945년 2월의 미군 폭격에도 성 어거스틴 성당은 꿋꿋이 견뎌내었다. 파괴되지 않는 이 성당은 그래서 '기적의 교회'라고 불린다. 성 어거스틴 성당은 자연재해와 인간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내 눈앞에 아름다운 자태를 손상 받지 않은 채 드러내고 있었다.

성당 입구 외벽 석재는 오랜 세월의 때가 묻어 있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성당 문을 들어섰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니 거대한 성당의 문이 흑단목(黑檀木)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고급스럽고 광택이 뛰어난 검은 나무의 정문은 단단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최고급 소재로 지어졌고 오랜 역사를 버텨 왔기에 이 성당문은 명품으로 남게 되었다.

성당 입구에서는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성당 내부에 1973년에 세워진 성 어거스틴 성당 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성당박물관의 유물을 만나러 갔다. 성당 내부 곳곳에서는 오랜 세월이 남긴 흔적이 고색창연하게 묻어났다. 성당 박물관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유화, 프레스코화와 조각 등 여러 귀한 유물이 남아 있다.

천사나 악마나 표정이 너무 천진난만하다.
▲ 악마를 죽이는 천사상. 천사나 악마나 표정이 너무 천진난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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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들은 당시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것들이었다. 유물로 남은 여러 인물상을 보고 있으려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 목상은 마치 아시아 출신인양 몸이 작고 단아하다. 왕관을 쓴 인물상의 얼굴도 마치 인형의 얼굴 같이 천진난만하다. 악마를 칼로 찌르는 날개 달린 천사의 얼굴은 마치 어린 학생들이 그린 그림의 얼굴 같이 착하게만 보인다.

성당 박물관의 예수상과 사도상은 유럽에서 보던 조각 스타일과는 많이 다르다. 유럽 가톨릭 동상들의 정교함보다는 아시아적인 단순함과 작은 규모가 눈에 띈다. 아무래도 수천 년 필리핀 땅에서 전해 내려온 조각과 조각술이 아니고 유럽의 조각상을 필리핀인들이 흉내 내다 보니 작품의 예술적 깊이가 떨어지는 것 같다.

유물로 남은 것 중에는 성가대가 행사 때마다 찬송가를 부르던 성가대석이 남아 있는데 성당의 수도사들이 직접 조각한 것이다. 그 옆에는 바로크 양식의 설교단이 있고 당시 스페인 시대의 가톨릭 신자들이 입던 예배복도 진귀하다. 18세기에 만들어진 귀중한 파이프 오르간은 장관이다.

필리핀에 스페인 군대와 가톨릭을 가져 왔다.
▲ 스페인 범선 모형 필리핀에 스페인 군대와 가톨릭을 가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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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들이 최초로 필리핀에 도착할 때 타고 왔던 범선들도 작지만 옛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당시 저 멀리 유럽에서 출발했던 범선은 아시아까지 식민지를 찾아온 스페인 군대의 선박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종교, 가톨릭도 이 범선을 타고 탐욕스러운 스페인군과 함께 왔었다. 그런데 필리핀인들에게 오랜 세월동안 가톨릭이 이토록 환영받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 어거스틴 성당은 필리핀의 훌륭한 역사박물관이다.
▲ 중국 도자기실. 성 어거스틴 성당은 필리핀의 훌륭한 역사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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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역사가 오랜 만큼 골동품들도 예상 외로 많다. 중국과 교역을 통하거나 중국 화교들이 가져 온 중국 명, 청 시대의 도자기들도 전시실에 가득하다. 변변한 역사박물관이 없는 마닐라에서 이 성 어거스틴 성당은 훌륭한 역사 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 성당이 필리핀 역사 유물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이 필리핀에 남기고 간 건축물 중에서 가장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 이 성당이고 그 내부에 남은 유물들도 가히 국보급들이다. 그래서 필리핀 여행을 한다면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이 성당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성당의 중앙 예배당으로 들어섰다. 중앙 예배당은 이곳이 필리핀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이 화려함은 성당 천장에 수도 없이 조각된 조각 작품들 덕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조각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여보, 저 천장의 조각, 조각이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봐 봐. 조각이 아닌데? 조각이 아니라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이야, 그림!. 괜히 속은 느낌이 드는데. 사람을 이 정도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도 참 대단하다!"

천장의 천장화와 샹들리에가 화려하기 그지없다.
▲ 중앙예배당. 천장의 천장화와 샹들리에가 화려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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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천장의 조각은 조각이 아니라 화려하고 장엄하게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벽면을 손으로 만져보니 입체적으로 보이던 조각이 반질반질한 평면으로 만져졌다. 그 그림들은 너무나 세밀한 음영을 가지고 있기에 마치 튀어나온 입체적인 조각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성당의 천장과 벽면에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은 성 어거스틴 성당이 지진 후에 석조로 재건축될 당시에 그려졌다. 이 그림들은 2명의 이탈리아 화가들이 직접 이 성당에 와서 남긴 명작들이었다.

밖에서 본 성당은 작아 보였지만 안에서 보니 아주 컸다. 바로크 양식의 성당 내부는 역시 화려할 뿐만 아니라 성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스러움을 더 빛나 보이게 하는 것은 어디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샹들리에다. 1880년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들여왔다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과거와 다름없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이곳에서 성스러움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이 성스러움 속에서 성 어거스틴 성당은 필리핀 최고의 결혼식 장소로 꼽히고 있다. 갖은 지진과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성당은 기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으뜸의 결혼식 장소가 된 것이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신자는 적어도 태어날 때, 학교 갈 때, 결혼할 때는 성당에 간다고 한다. 인구의 대부분인 95%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성 어거스틴 성당은 불멸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회랑에도 스페인 식민지 당시의 유화와 조각상이 남아 있다.
▲ 성당의 2층 회랑. 회랑에도 스페인 식민지 당시의 유화와 조각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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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족을 데리고 성당의 2층까지 올라가 보았다. 성당을 둘러보면서 나는 이곳에 식민지를 만들었던 스페인의 흔적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스페인의 마지막 총독이 필리핀을 떠나면서 미국에게 항복을 한 곳도 바로 이 성당이고, 이 스페인 성당은 스페인 식민지 역사의 종말과도 함께 했지만 스페인 식민지의 역사는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럽 스타일의 성당 안에서 야자수가 필리핀임을 알려준다.
▲ 성당의 중앙마당. 유럽 스타일의 성당 안에서 야자수가 필리핀임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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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안에 만들어진 스페인 성당 안에서 나는 유럽의 한 성당에 들어서 있는 것 같은 묘한 감흥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성당의 회랑과 중앙마당에 언뜻언뜻 보이는 야자수를 보면서 이곳이 필리핀이라는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

유럽에서 많은 성당 답사에 질렸던 신영이는 성당을 나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신영이는 빠른 걸음걸이로 계단을 이미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가족을 따라 계단을 내려왔고 성당 밖으로 나왔다. 멋진 성당이지만 신영이와 아내의 여행 적성에는 맞지 않는 모양이다.

성당 밖 인트라무로스의 반질반질한 돌길에는 여름의 뜨거운 햇빛이 내려 쪼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70편이 있습니다.



태그:#필리핀, #마닐라, #인트라무로스, #성 어거스틴 성당,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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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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