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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6월 5일부터 6월 26일까지 공연되는 신시컴퍼니 연극 <산불>은 얼핏보면 시대극으로 보이고, 한편으로는 이념극으로 보인다. 이번 <산불> 공연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인 고 차범석 선생 5주기 기념 특별공연으로 사실상 인간본연의 욕구와 갈등이 전쟁상황을 어떻게 이끌고 가는지 치밀하고 탄탄하게 보여주는 대형 연극이다.

 

배경은 1950년대 전쟁직후 두메산골로 마을의 모든남자들이 강제징집되었고, 마을에는 졸지에 과부가 된 아낙들 뿐이다. 평화롭고 한적한 산골마을이 아니라, 배고프고 외롭고 이념으로 대립하는 산골마을이다. 극은 여인들의 이야기이고 구체적인 전투장면도 없다. 하지만 갈등구조는 명확하다. 무대에 등장하는 이장댁 양씨네(강부자 역)와 최씨네(권복순 역)는 서로 이웃집이면서도 이장은 인민군을 지지하고 최씨네는 국군을 지지한다. 이토록 모든것이 예민하다.


극의 초반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집안에 남자가 없으면 일곱살 어린애부터 늙은 할매까지 모두가 저 잘난척이다." 이동네에 유일한 남자인 이장댁의 시어른은 노망이 나서 틈만나면 소리지르며 밥타령이다. 시어른 김노인(이인철 역)이 등장할 때마다 관객은 애처로우면서도 사는데 제일 중요한 '밥타령'에 웃음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날, 문제의 핵심인 '젊은남자' 규복(조민기 역)이 등장한다. 선생이었다는  규복은 실수로 북한군을 쫓아가서 인질로 잡혔다가 도망나왔단다. 이장댁 며느리이며 지식인이고 곱고 고운 점례는 다리를 다친 규복을 인적드문 뒷산 대밭에 숨겨주고 치료해주고 먹을것을 준다. 자연스레 남녀간의 정분이 싹튼다.

 

참으로 대단하고 대담한 점례이다. 극 초반에 마을 과부 셋이 모여서 사월이가 온 몸으로 홀로 사는 외로움과 서글픔을 토로할 때, 초연하고 점잖게 산골에서의 아낙의 생활을 다짐하던 점례였다. 그러한 점례가 왠 남정네를 1년씩이나 치료해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느냐 말이다.

 

그러기를 1년여, 점례가 규복에게 국군에 자수를 권유하며 이후 산골을 떠나 규복과 둘이 새삶을 살 것을 희망하던 즈음, 드디어 이 극의 핵심 갈등이 찾아온다. 이웃집 사월이네가 점례와 규복의 밀애를 목격하였다.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점례는 규복을 사월이와 함께 돌보아주며 지내기로 하는 실로 엄청난 거래를 한다. 한 남자를 두 여자가 나누어 사랑을 하기로 한 것이다.

 

1막의 마지막 장면은 이 계약으로 점례가 참으로 한스럽게 마루대청에 쓰러져 흐느끼는 장면이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 남자를 남도 아닌 이웃집 사월이와 함께 사랑하기로 하다니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운명의 장난 아닌가.

 

2막이 시작하며 마을은 여전히 1막과 똑같지만 한가지, 사월이가 점점 야위어간다. 헛구역질을 하면서. 쌀려네는 남녀가 한밤중에 뒷산 대밭에 드나들더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자기도 똑똑히 봤다며 이장에게 일러바치고, 이장은 최씨에게 사월이를 의심하는 이야기를 한다. 최씨는 분개하며 사월이를 다그치고, 이 때 마을에 국군이 들이닥치며 뒷산을 수색하며 불을 지른다.

 

점례와 사월이가 함께 사랑하는 규복이 있는, 2년동안 지냈던 그곳에 불이 난다. 점례는 안된다며 오열하고 어느새 사월이는 양잿물을 마시고 죽었다. 무대는 붉은빛 산불로 뒤덮이고 관객석도 붉은 조명아래 처연한 무대에 공감하며 온 극장이 붉은안개빛이다.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

 

이토록 전쟁직후 남겨진 참혹한 상황을, 어쩌면 전쟁보다 더 잔혹한 잿더미를, 붉은빛으로 표현한 연극 <산불>은 이번 공연에서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1962년 국립극장의 의뢰로 씌여졌으며 지금까지 연극, 영화, 드라마, 뮤지컬, 오페라, 창극 등 여러 장르로 지속적으로 공연되어 온 바 그 생명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전쟁직후의 갈등상황을 어쩌면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들로 설정하고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사랑하는 당시로선 극단적인- 지금도 극단적인- 상황으로 그려냄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더없이 무겁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잊은 것 같다. 한국전쟁 후 60년을 지금 6월을 지내며, 우리는 너무나 풍요로워졌다. 어마어마한 지난 세월 겨우 60년이지만, 엄청나게 변하였고 정말 과연 풍요로워졌을까. 아무튼 연극 <산불>은 우리 마음을 불질러놓았다. 

 

차범석 선생과 임영웅 연출, 그들과 이 연극과 인연깊은 출연진들 강부자, 권복순, 조민기, 장영남, 서은경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무대도 이 연극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디자인, 조명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마치 16:9 와이드 스크린을 보는 듯한 이 무대의 시간흐름이 남성관객들에게는 느리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아낙들의 삶과 갈등은 여성 관객들에게 보다 많은 호응을 얻었다. 확실하고도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주제 '전쟁'과 그 치밀한 대본 덕택도 있었으리라. 또한, 극 전체에서 간막의 피아노 음악(김기영 음악감독, 피아노)과 허밍하는 보컬(이유정)은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연극의 장면 사이를 환기하며 마치 무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태그:#산불, #강부자,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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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전공하고 작곡과 사운드아트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대학강의 및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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