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신선봉에서 항리마을에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해무가 걷히기 시작하더니 섬등반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잠깐, 겨우 머리만을 빼죽 내밀던 섬등반도는 다시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가거도
 가거도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그 찰나의 순간, 벼랑 위를 날렵하게 뛰어다니는 염소들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그 모습을 여행자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갈증만 심하지 않았다면 그 한갓진 그림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가거도 섬등반도 운해
 가거도 섬등반도 운해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타박타박 걸어 항리마을로 내려왔다. 우선 물을 구해야했다. 가장 가까운 민가를 찾았다. "여보세요. 계세요." 몇 번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까 산에 오르기 전에 보았던 민박집이 문득 떠올랐다.

비탈길을 겅충겅충 뛰어내려 한달음에 큰길로 나왔다. 벼랑 끝에 민박집이 희미하게 보였다. '물이 있을 테지. 아마 있을 거야. 분명 가게였잖아."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며 빠른 걸음으로 민박집으로 다가갔다.

가거도
 가거도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이리저리 민박집 안을 살펴보았다. 불행히도 가게가 아니었다. 주인을 불렀다. 어두운 방안에서 중년의 사내가 나왔다. 물이나 맥주를 파느냐고 여행자가 묻자 가게가 아니라서 팔지는 않고 대신 물은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물이 어디 있느냐고 간절히 묻자 "바로 뒤에 있네요."하고 태연히 말했다. 얼마나 급했으면 바로 뒤에 있는 수도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수도를 향해 바로 큰절을 올렸다. 한참을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나니 주인도 어지간히 목이 말랐나 보다 하는 표정으로 여행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주인을 어디서 보았다는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어디서 보았을까? 한참 기억을 더듬었더니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예전 인간극장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그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거도
 가거도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아픈 다리도 쉴 겸 민박집 옆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섬등반도의 해무가 걷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한몫 하였다. 그러나 안개는 더욱 짙어질 뿐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벼랑 끝에서 희미한 길을 밟고 한 쌍의 부부가 나타났다. 오후에 잠시 보았던 부부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들과 작별했다.

고갯길을 올랐다. 길은 모습을 숨겼지만 가파른 본래의 성미까지는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겨우 가라앉았던 숨이 다시 차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고르느라 고개를 돌렸다가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가거도
 가거도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가거도 회룡산 운해
 가거도 회룡산 운해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구름이, 구름이 산을 넘고 있었다. 아니 폭포수를 쏟아 내듯, 해일이 몰아치듯,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기세로 섬등반도를 넘고 있었다. 그 장대한 움직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운해를 지리산에서도, 설악산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처럼 감동적인 적은 없었다. 아무 기대를 하지 않고 방심을 하다 무장해제를 당한 이처럼 여행자의 몸은 신들린 듯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가거도
 가거도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겨우 정신을 차려 보니 섬등반도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구불구불한 길도 보이고 양옆에 도열해 있는 전봇대와 산 위의 초소 같은 건물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람이 세차게 부는가 싶더니 다시 구름이 산을 삼켜버렸다.

민박집이 있는 대리마을까지 6km 남짓, 그래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냥 구름바다를 천천히 걷기로 했다. 내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구름바다를 언제 또 걸어보겠는가.

가거도
 가거도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고갯길을 벗어나니 다시 평탄한 길이다. 길 아래는 온통 구름바다, 노란 유채꽃만이 남아 여행자가 갈 길을 이야기해주었다. 해가 구름 위로 솟아났다. 산 너머로 지기 위해 해는 다시 솟아야 했던 것이다.

거거항으로 이어지는 긴 길이 보인다. 그 끝에 회룡산이 보인다. 거대한 용이 산능선을 넘는가 싶더니 선녀봉 봉우리는 차마 삼키지 못하고 내뱉는다. 저 봉우리를 넘어야 숙소에 도착한다. 시간은 이미 일곱 시를 향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가거도
 가거도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마음은 급한데 걸음은 자꾸 느려진다. 눈은 앞을 향하는데 고개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나 언제 이런 길을 걷겠는가. 구름 위를 걷는다는 것, 그건 분명 행운이었다. 더 이상의 말은 이 행복을 거추장스럽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산줄기 끝에 선 소나무 한 그루에 넋이 빠져버렸다. 그 고고한 자태에 해무마저 시샘을 했다. 살짝 건드려 보기도 하고, 옷자락으로 유혹을 해도 듣지 않자 급기야 하얀 치마폭으로 덮어버린다. 그런데도 소나무는 꿈쩍을 하지 않는다. 예의 그 모습으로 다시 꼿꼿하게 서 있다.

가거도
 가거도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선녀봉 아래 삼거리에 이르자 주위가 캄캄해졌다. 비가 한두 방울 내리기 시작했다. 점퍼를 꺼내 우의를 대신하였다. 카메라도 가방에 집어넣었다. 전속력으로 걷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리막길이었다. 경사가 심해 몸이 자꾸 앞으로 쏠린다. 시멘트길에 피로한 발을 달래려 뒤로 걸었다. 비는 점점 굵어지고 짙은 안개에 옷은 흠뻑 젖었다.

불빛이 보였다. 가로등과 창문으로 비치는 집집마다 켜진 불빛이 무척 반가웠다. 대리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저녁 9시가 넘어서였다. 출장소 마당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아따, 인자 오시오. 그 먼 길을 걸어왔소. 전화를 했으면 나가 데리러 갔을 텐디." 사내주인이었다. 그의 말에는 걱정과 따듯한 인정이 묻어있었다.

민박집으로 들어가니 여주인이 놀란 표정으로 뛰어나왔다. 어두워져도 여행자가 나타나지 않자 산에서 길을 잃어버린 줄 알고 방송을 할 참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도 그녀의 말을 거들며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부연하여 설명했다.

여주인이 챙겨준 저녁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맛을 보라고 도톰한 민어회를 내놓았다. 소주 한 병을 시켜 순식간에 비워버렸다. 식당에 모인 마을 주민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방으로 들어갔다.

잠은 의외로 오지 않았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그 황홀했던 구름바다가 계속 눈에 아련했다. 다시 민박집 사내주인을 만나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입이 귀에 걸릴 즈음 방으로 올라왔다. 짙은 안개로 아쉬운 여행이 될 거라는 처음의 우려는 기우였을 뿐이었다. 내일은 가거도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이런저런 가거도 그림을 상상하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밤중에 가거도 숙소 도착
 한밤중에 가거도 숙소 도착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렸습니다. 다만 블로그에는 사진만 실었고 다시 글을 작성하여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가거도, #구름바다, #회룡산, #섬등반도, #운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