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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은 기본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항교 등과는 달리, 서당은 지방의 선비나 백성들이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의 장소로 설립을 한다.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295호로 지정이 된 '갈천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서당은 대개 7~8세의 어린 학동들인 남자 아이들이 입학을 하여, 15~16세가 될 때까지 공부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현재 초, 중급 정도의 학습과정인 유교 경전을 주로 공부하게 된다. 19세기에 들어 근대교육이 도입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던 서당은, 그 기원을 삼국시대부터로 보고 있다.

 

임훈이 세운 갈천서당

 

서당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는, 사림파가 등장하여 향약을 보급하고 마을마다 지역민의 교화에 힘쓰던 16세기 초반부터이다. 갈천서당은 선조 6년인 1573년에 갈천 임훈이 처음 문을 연 서당이다. 임훈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이곳 갈계리로 내려와, 아우인 임운과 함께 갈천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는데 여생을 바쳤다.

 

처음으로 갈천서당이 문을 연 것은 1573년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고종 15년인 1878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지난 5월 20일 무주, 거창의 답사 길에 만난 갈천서당. 옆으로 내가 흐르는 곳에 세워진 갈천서당은 참으로 단아한 모습이다. 크지 않은 이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학동들은 자연을 만끽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공부를 하다가 머리라도 식히고자 했다면, 냇가에 발을 담그고 앞으로 펼쳐진 갈계숲을 거닐지는 않았을까? 강당과 대문으로 구성된 이 서당은 참으로 아담하기 그지없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절로 학습의 효과가 뛰어날 것만 같다.

 

조선시대 서당연구에 좋은 예

 

갈천서당은 조선시대 서당연구에 좋은 예로 꼽힌다. 정면 다섯 칸, 측면 한 칸 반의 크지 않은 맞배지붕으로 꾸며진 서당은 앞으로 솟을대문을 두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두 개의 비가 보인다. 임훈과 임운, 두 형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이다.

 

서당을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한 칸의 방을 드리고, 두 칸 대청과 두 칸의 방이 이어진다. 집은 참으로 간소하고 장식을 하지 않아 겸손함이 배어있다. 자연석 주초를 이용하고 사각의 기둥을 세운 건물은 역시 자연석으로 몇 단의 기단을 쌓았다. 지금은 주변이 너른 평지에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찾기에 용이하다.

 

 

글 읽던 학동은 보이지 않고

 

두 칸 대청의 뒤로는 판문을 달았으며 몇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대청 좌측 위에는 향약과 서책 등을 보관하는 나무로 짠 보관함이 보인다. 방 정면 밑으로는 연도를 내고, 굴뚝이 없는 연기구멍을 내었다. 아담하고 선비의 모습처럼 단아한 갈천서당. 아마도 이곳에서 글을 읽던 학동들의 마음도 이처럼 단아하지 않았을까?

 

 

서당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본다. 바쁜 농사철이라 그런지, 앞으로 지나는 경운기의 소리가 마치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처럼 들린다. 예전 이곳에서 학습을 하던 학동들은 솟을삼문 앞 들판에서 모심기를 하던 농부들을 바라보며, 절로 글이 떠올랐을 것만 같다. 처음 문을 연 지 450년, 지금의 서당이 지어진 지 130여년. 갈천서당은 지금도 아이들이 공부를 하기에 딱 어울릴 듯한 장소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티스토리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갈천서당, #유형문화재, #거창, #갈계리,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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