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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해서 저녁식탁에 내놓을 요량으로 치커리를 씻고 있는데 휴대폰이 운다.

"술 한 잔 할 수 있어?"

물어오는데 손에 붙잡고 있는 치커리와 가스불 위에서 끓고 있는 냄비의 물이 보인다.

"어쩌냐? 나 이제 막 저녁 준비하는데."

나물 데치는거 아니면 그냥 두고 나갈 수도 있으련만 부엌 사정이 영 아니다.

"그럼 다음에 하지 뭐."

힘없는 목소리로 끊어 버리는 친구의 전화가 내내 마음에 남아 있어, 사나흘 후 내 쪽에서 전화를 했더니 지금 퇴근 중이란다. 저녁 일곱 시 무렵 만날 시간 약속을 잡고 보니 시간이 좀 넉넉하다. 밖엔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딱히 할 일도 없는 터라 그냥 집을 나서 근처 비엔날레공원 한 바퀴를 돌아보자 싶어 집을 나섰다. 습도도 높고 기온도 높은 탓인지 걷기엔 그다지 좋은 날이 아니다.

"열흘 동안 그새 세 번째 일자리야"

친구는 고깃집에서 일했다. 일은 손에 익었지만, 텃새가 심해 더 다닐 수가 없었단다. 사진은 드라마 <온에어>의 한 장면.
 친구는 고깃집에서 일했다. 일은 손에 익었지만, 텃새가 심해 더 다닐 수가 없었단다. 사진은 드라마 <온에어>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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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포기하고 그냥 약속장소로 향했다. 오후 여섯시 무렵의 술집은 한산하다. 생맥주 한 잔을 시켜 놓고 숨을 돌리고 있는데 모자를 푹 눌러 쓴 친구가 바쁘게 들어선다.

"일자리 알아보는 중이라더니 구했나 보네."
"한 열흘 간격으로 그새 세 번째 일자리야. 처음엔 한약방에서 약 달이고, 청소하는 잡일이었고, 두 번째는 식품회사 그리고 지금은 고깃집 서빙이야."
"그런데 뭔 일자리를 그렇게 자주 옮겨?"
"그러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네."
"고깃집 일은 할 만해?"
"일이야 할 만하지."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던 모양이다. 세상 속에 섞여 산다는 건 다르게 말해 사람들 속에 섞여 산다는 말인데 어딜 가나 몸으로 버텨내는 노동보다는 사람 관계가 그 직장에 오래 머물 수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한단다.

이 친구는 제법 얼굴이 곱상하고 첫인상이 꽤 맑아 보이는 편이다. 하기는 내일이면 오십 줄에 앉는 아줌마 얼굴이 고와야 얼마나 곱겠냐마는. 하여튼 내가 본 바로는 찌든 기색 없이 뭐 순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제법 고깃집 일에 손이 붙는 느낌이 드는 중이란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얼굴도 순하고 착해 보여서 고깃집 사장님이랑 손님들은 꽤 좋아라 하는데 같이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종업원들 때문에 다시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란다.

언뜻 생각하기엔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무슨 일이 일어나랴 싶지만 이 사람들이 하루 이틀 입사가 빠른 순서대로 서열을 정해 놓고 굉장히 엄격하게 간섭을 해 댄다는 것이었다. 일은 손에 붙어 그다지 다른 일을 찾아 볼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먼저 들어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텃세를 이겨 낼 배짱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들 심해?"
"너무 힘이 들 만큼 심해. 오늘 그만둔다고 하니까 사장이 어찌나 서운해 하는지. 사람 구하는 일이 장사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고 하면서 좀 있어 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사실대로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냥 집에 일이 있어서 못한다고 했다니까."
"그렇구나. 어디서나 사람관계가 가장 힘든 법이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로 두어 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더 이상 술 생각도 없어져 버린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흐린 밤하늘엔 별하나 보이질 않는다. 

"텃새? 그럴 짬이 어딨어...다른 사람 신경 쓸 틈도 없어"

그리고 한동안 그녀를 잊고 있었다. 아니 잊었다기 보다는 연락이 끊긴 채로 지냈다. 그러다가 사나흘 전 그 친구한테서 '한잔하자'는 전화가 왔다. 마침 봄비도 개고 바람도 시원한지라 누가 나 좀 안 불러내주나 하고 있던 참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그이를 만나러 갔다.

"얼굴이 왜 그래?"
"나 좀 말랐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3년째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터라 이 친구는 살아가는 일이 좀 고달픈 편이다. 무슨 일이든 직업을 가져야 하는데 고깃집을 그만 둔 후론 그다지 일자리 구하기가 순조롭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이번에 들어간 곳은 전자제품 조립하는 회사라는데 일이 참 힘들다고 했다. 종일 형광등 불빛 아래 서서 조립을 해야 하는데 자꾸 눈앞이 부옇게 흐려진다고 했다.

"거긴 지난번처럼 텃세 같은 건 안 해?"
"그럴 짬이 어디 있어. 각자 맡은 일 하느라 다른 사람 신경 쓸 틈도 없는 걸."

처음에 그 회사를 들어가선 굉장히 놀랐단다. 공장의 규모도 어마어마하고 거기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단다. 그렇게도 많은 여자들이 그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줄 몰랐었단다. 처음엔 자신의 사물함도 못 찾아서 헤매 다니기도 하고 작업장을 못 찾아서 헤매고 다닐 때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도 했었단다.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이라는 걸 새삼 다시 깨닫고 있는 중이란다.

안쓰러운 마음에 멀거니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내게, "그런 얼굴까지 할 건 없고,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뭐" 그러면서 웃는다.

"요즘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동안 내 남편이 가족들을 위해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싶고, 나 같이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여자가 세상에 나가서 돈벌이 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힘이 드는 일인 줄 몰랐다니까."
"야근은 안 해?"
"왜 안 하겠어, 하지."
"그러고선 얼마나 벌어?"
"월 120 정도, 그것도 3개월 수습딱지 떼야 가능하대."

"나이 50되면 사는 게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돈 버는 일에선 그다지 쉬운 일이 없겠지만 이 친구 참 고단해 보인다.

"어서 세월이 갔으면 좋겠어, 애들 학교라도 마치면 좀 나아지려나."

고단한 이 친구에게 해 줄 말이 별로 없다. 안주로 시켜 놓았던 치킨이 다 식어 있는데 별로 손도 대지 않았다.

"난 나이 50쯤 되면 생활비 걱정같은 건 없을 줄 알았어. 기반 다 잡아 놓고 아이들 커가는 거 보면서 느긋할 줄 알았다니까. 고깃집 일 다닐 때 예쁘게 차려 입은 여자들이 끼리끼리 낮 시간에 몰려와서 고기 먹고 술 한 잔씩 하고 그러는데 그네들이 참 부럽더라고. 얼마나 팔자가 좋으면 저러고 다니나 싶고. 내게도 그러고 다닐 날들이 있을까?" 
"있겠지, 왜 없겠냐." 

그러면서 친구의 시선을 피해 다른 곳을 본다. 조금씩 손님이 들기 시작하는 술집에 앉아서 할 말이 끊긴 채로 창 밖을 보고 있는데 피곤한지 친구가 하품을 한다. 아차, 이 친구 고단하지 싶어 그만 일어서는데,

"이거 싸 갈까?"
"그래 싸달라고 하지 뭐."

다 식어버린 치킨을 싸서 손에 들고 저만치 멀어져 가는 친구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 한참동안을 우두커니 서서 힘없이 걸어가는 친구의 등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5월의 저녁바람은 속없이 훈훈하다.


태그:#친구,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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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부이자 직장인 입니다. 주변의 이야기나 일하면서 느끼는 일들을 써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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