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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파일을 준비하는 보살들
 초파일을 준비하는 보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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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오른쪽 뒤로는 응진당이 있다. 응진당은 석가모니 부처님음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 그리고 16나한이 모셔진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751년 중수한 조선 후기 건축으로 보물 1183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벽면에 수묵으로 그린 나한벽화가 있다고 하는데 스님이 예불을 드리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스님은 죽비로 손바닥을 치면서 특이한 방식으로 절을 한다.

응진당 옆 만하당에서도 스님들이 뭔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 만하당과 달마전은 선방으로 스님들의 수행공간이다. 나와 아내는 이따가 응진전을 다시 찾기로 하고, 세심당과 감로당을 지나 부도전으로 향한다. 중간에 공양간인 안심료가 있는데 보살님들이 모자를 쓴 채 나물을 다듬느라 정신이 없다. 초파일 공양에 쓰일 나물인 모양이다.

 부도밭
 부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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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남쪽으로 1㎞가 안 되는 곳에 부도밭이 있다. 그런데 부도밭으로 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는 약간 등산을 하는 기분이다. 10분 남짓 가니 한참 공사 중인 암자가 보인다. 부도암(浮屠庵)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부도밭은 지키는 암자로 최근에 지은 것 같다.

나는 암자보다 먼저 부도밭으로 향한다. 부도밭에는 21기의 부도탑과 5기의 탑비가 세워져 있다. 부도에는 탑명이 흐릿하거나 없어서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5기의 탑비는 그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데, 낭암(朗巖)대사, 벽하(碧霞)대사, 설봉당(雪峰堂)대사, 송파(松坡)대사, 금하(錦河)대선사 비석이다. 이 중 설봉당대사 부도에는 설봉당이라는 이름이 있어 부도와 탑비가 한 쌍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설봉당대사 부도탑과 탑비

 설봉당대사 탑비
 설봉당대사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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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당대사 부도탑과 탑비는 예술성에서 나의 시선을 끈다. 우선 탑비의 귀부가 특이하고 탑의 조각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탑비를 보면 비석받침인 귀부가 고개를 높이 들고 있다. 그래서 힘이 있고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이수에 해당하는 비석 덮개는 유교식으로 비교적 간결하게 처리했다.

비문을 보니 '유명조선국 설봉당대사 비명'이라고 적혀 있다. 조선 영조 15년(1739)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金鎭商)이 글을 지었다. 이 비문에 따르면 대사는 1678년 호남땅 낭주(朗州)에서 태어나 달마산 보현암에서 1738년 입적하였다. 대사는 16세에 달마산에서 출가하여 회정(懷淨)이라는 법명을 받고 화악 문신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법맥으로 따지면 서산대사의 5세손이다.

 설봉당대사 부도탑
 설봉당대사 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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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젊어서는 경전과 글공부에 매진하여 시와 문장에 일가를 이뤘다고 한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불법이 글 많이 읽어 되는 것이 아니라면서 선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리고 호남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며 회포를 풀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대사는 죽음에 이르러 "사람의 나고 죽음이 주야가 바뀌는 이치와 같거늘 무엇이 슬프더냐"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겼다.

떠다니는 구름 온 곳이 없듯       浮雲來無處
가는 곳 역시 알 수가 없네.        去也亦無蹤
구름 오고감을 자세히 살펴보니  細看雲去來
단지 하나 허공이 있을 뿐.         只是一虛空

 부도탑 조각: 거북
 부도탑 조각: 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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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탑 조각: 도마뱀
 부도탑 조각: 도마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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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탑 조각: 게와 물고기
 부도탑 조각: 게와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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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도탑 조각: 오리
 부도탑 조각: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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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의 부도탑 역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크게 지대석, 하대석, 탑신석, 옥개석으로 나눠지고, 지대석과 하대석 사이에 복련석을, 하대석과 탑신석 사이에 앙련석을 넣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이 8각형의 하대석이다. 이들 각 면에 조각을 했는데 이들이 거북, 도마뱀, 게와 물고기, 오리다. 그리고 한 면에는 연꽃을 조각했다. 모두 물가에 사는 동식물로 불가와 인연이 있는 것들이다. 이들 중 거북과 게는 대웅보전 주춧돌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아마 미황사가 바다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유난히 물과의 인연을 강조한 것 같다.

4각형의 탑신석에도 조각이 있다. 정면에는 문비가 있고 그 위에 설봉당이라고 새겨 넣었다. 좌우에도 문비가 있으며, 뒷면에는 도깨비 문양이 있다. 도깨비의 툭 튀어나온 눈과 입 밖으로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가 인상적이다. 머리 위의 뿔과 턱 좌우의 수염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래서인지 이들 부도탑 중 가장 인상적이다.  

보제존자 낭암대사와 벽하대사

 낭암대사비
 낭암대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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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눈이 가는 비석이 보제존자 낭암대사 탑비다. 제일 앞에 있고, 돌의 재질도 좋고 새겨진 글자가 가장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 비석은 조선 헌종 때인 1840년 세운 것으로 승정원 좌부승지 김대근(金大根)이 글을 썼다. 낭암대사는 1761년 전라도 낭주 땅에서 태어나 13세에 출가하였다. 30세에 송암대사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서산대사의 8세손이다.

사십여 년 동안 두륜산과 월출산 그리고 달마산에서 법회를 열어 선풍을 진작하였다. 스님이 말하는 선의핵심은 지혜다. "분별은 지식이고 분별하지 않음이 지혜이니, 지식에 의지하면 물들고 지혜에 의지하면 깨끗해진다. 물듦에는 나고 죽음이 있지만 깨끗함에는 부처도 없다." 무술년(1838) 8월 26일에 중암(中庵)에서 병이 들었으며,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세상을 떠났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듯 나 또한 하나로 돌아간다. (萬法歸一 吾亦歸一)"

 낭암대사비 측면 조각
 낭암대사비 측면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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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하대사비는 1764년(甲申) 여름에 세웠고 글을 쓴 사람은 동강(桐岡) 이의경(李毅敬)이다. 비문에 따르면, 스님은 1676년 영암에서 태어났고 법명은 대우(大愚)이다. 환성대사에게 선법을 전수받아 서산대사의 6세손이 되었다. "삼장 경교 외에도 자부(子部) 사부서(史部書)에 널리 통달하였고 만년에는 선송(禪頌)을 즐겨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구곡각운(龜谷覺雲)의 염송설화(拈頌說話) 가운데 간혹 잘못된 곳이 있음을 지적하며 직접 바로 잡아 기록하기를 노년까지 그치지 않을 만큼 지식이 뛰어났다." 1763년 열반하면서 제자 스님에게 차를 한잔 가지고 오게 하고는 다음과 같은 게를 지었다.

세상에 나서 타향에 붙어살다가  生來寄他界
죽어 고향으로 돌아가노라.        去也歸吾鄕
오고가는 흰 구름 속에              去來白雲裏
드디어 평상심을 얻었도다.        且得事平常

송파대사와 금하대선사

 송파대사비
 송파대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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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대사와 금하대선사비는 다른 세 개의 비석과 달리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 중 송파대사비가 유교식으로 소박하고, 금하대선사비가 불교적으로 조금 더 장식적이다. 송파대사비는 벽하대사비와 함께 1764년에 세웠고, 글도 같은 사람인 이의경이 썼다. 송파대사는 1686년 영암에서 태어났고 법명은 각훤(覺暄)이다. 설봉대사의 제자가 되었으니 서산대사의 6세손에 해당한다.

사십여 년 간 여러 절을 유람하며 법을 펼쳤고, 말년에는 명적암으로 돌아와 마음 닦기에 힘썼다. 스님이 세상을 떠난 해는 분명치 않고 8월 초 7일이라고만 나온다. 그가 남긴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허깨비 같은 이 몸뚱이 꿈의 집이로세,  幻身夢宅歟
물에 비친 달 허공의 꽃이로구나.         水月空花也
자네 한번 봐 보게나,                         請君試但看
어디에 오고 감이 있던가.                   何處有來去

 금하대선사비
 금하대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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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하대선사비 역시 1764년에 세웠고, 글도 이의경이 썼다. 금하대선사는 1696년 금성 장산도에서 태어나 1739년 구천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님의 법명은 우한(優閑)이었으며 그 때문에 한보살(閑菩薩)이라 불렀다. 여기서 한은 스님이 인자하고 순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님은 설봉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오대산에서 인허선사 해안로부터 심인을 전수받았다. 그는 활동영역을 호남으로 한정하지 않고, 영남과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까지 넓혔다. 선사는 평생을 자비와 자애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의미에서 금하대선사는 평생토록 보살도를 행한 스님이다.   

달마산 산행을 포기하다.

 미황사 사적비
 미황사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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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들을 보고 부도암 앞으로 가니 미황사 사적비가 보인다. 그런데 불사를 하느라 땅을 돋워 사적비가 땅 아래로 한참 내려가 있다. 나는 비를 보기 위해 계단을 내려간다. 조선 숙종 18년(1692) 병조판사 장유가 글을 짓고 두인(杜忍)이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을 통해 우리는 미황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부도암에는 또한 물을 담던 그릇인 석조(石槽)가 있다. 석조의 크기로 보아 미황사가 한 때는 아주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보고 아내와 나는 달마산을 오를 요량으로 산길로 접어든다. 목표는 471m봉까지 오른 다음 달마산 능선을 타고 북쪽에 있는 489m 불썬봉까지 가는 것이다. 한 7부 능선까지 오르자 전망이 탁 트이면서 저 아래로 부도전과 미황사가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멀리로는 진도 쪽 바다가 보인다.

 달마산에서 내려다 본 서해안 풍경
 달마산에서 내려다 본 서해안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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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돌려 능선 쪽을 바라보니 깎아지른 암벽들이 불끈불끈 솟아 있다. 이곳에서 한 10분 정도 오르면 능선에 이를 것 같다. 그런데 아내가 너무 힘들어한다. 무릎이 시원치를 않아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700m대 산까지는 올라갔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500m대 산도 어려운 모양이다. 아쉽지만 산을 내려온다. 아내는 내려오면서 더 조심을 한다. 무릎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부도전까지 내려오다 이곳 해남에 사는 분을 만났는데 초파일이 가까워 미황사를 찾았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물가에 자생하는 물봉선도 알려주고, 이곳에 가재도 산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찾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몇 개 돌을 들춰도 가재는 나오지 않는다. 아내와 나는 이곳이 그 정도로 깨끗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고개를 넘어 미황사로 돌아간다.


#부도밭#설봉당대사#낭암대사와 벽하대사#송파대사와 금하선사#달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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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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