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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 열사의 장례는 5월 25일이었다. 장례는 7일장으로 하고 명칭은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 고 박승희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정했다. 장례위원장은 오종렬 선생(현 한국진보연대 고문)이 맡았다. 장례위원과 준비위원은 다른 열사 장례와 비교하면 천주교 쪽이 가세해 수가 많았다.

 

실질적인 장례 준비는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이 담당했다. 박승희 열사가 학생이었고, 그해 오월 최초의 분신이었으며 또 여성이어서 관심과 준비 정도, 그리고 준비에 임하는 자세는 보는 이들을 엄숙하게 할 만큼 열성이었다. 대형 영정은 물론 열사도와 대형 걸개그림이 추가되었고 만장 또한 다른 열사 장례 때보다 많았다.

 

외형상 차이도 있었지만 그보다 학생들의 각오 역시 다른 장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도청 노제를 쟁취하겠다는 결사대를 공개 모집했는데, 지원한 학생들이 넘쳤던 것만 보아도 당시 학생들의 각오와 결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지금도 나는 가끔 그때 학생들이 보여준 투지가 다른 열사들의 장례에 그대로 이어졌고, 또 전국의 대학생들이 이 지역 학생들처럼 투쟁 의지를 보여주었다면 그해 정국은 달라졌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그해 많은 젊은이가 분신을 했지만 대학생마저도 투쟁을 통합하지 못했다. 지역에 따라 투쟁 강도가 달랐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아쉬움을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박승희의 죽음으로 광주는 다시 뜨거워졌다

 

5월 24일 박승희 열사의 유해는 그가 투병하고 생을 마감한 병원을 떠나 모교 전남대학 교정으로 옮겨졌다. 전남대 병원에서 입관식, 병원 앞에서 발인식, 그리고 남동성당에서의 영결식이 '눈물의 의식'이었다면 순환도로를 통해 전남대학으로 가는 학생들의 분위기는 한판 결전을 앞두고 결의를 다지는 의식이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단체의 깃발을 앞세우고 대오를 지어 따르는 청년과 시민, 학교별 학과별 깃발을 앞세운 대학생 대열은 장관이었다. 드높은 결의를 담은 구호·함성·노래도 그랬지만 거리에 선 시민이 애틋한 눈물로 승희 가는 길을 지켜보던 모습은 진한 감동이었다.

 

그 무렵 전국은 유족의 슬픔에 아랑곳없이 지자체 선거 분위기로 가득했다. 싸워야 할 때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오월을 보내고 정권이 의도한 대로 그렇게 끌려가는가 싶어 국민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5월 25일 날씨는 맑았다. 국화꽃을 들고 온 학생들이 박승희 열사의 영전에 엎드려 오열하는 장면과는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소설처럼 적당히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라도 올 것 같은 날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팠는지도 모른다. 화창한 오월에 친구를 보내야 하는 학생들은 울고 또 울었다.

 

한쪽에서는 전남도청 앞 노제를 사수하겠다는 학생들이 하얀 장갑에 쇠파이프를 든 채 결사 투쟁의 의지를 가다듬고 있었다. 3000명을 모집하겠다는 애초 계획은 지원 학생이 넘치는 바람에 인원에 제한을 둘 수 없었다. 평소에는 시위에 거리를 두던 예비역 학생들까지 대거 참여하였다. 꽃과 쇠파이프가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도 강렬한 조화를 이루어 낸 그날 아침 전남대학교 교정의 풍경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강한 영상으로 남아 있다.

 

전남대 총학생회 1층 복도에 마련된 빈소에서 발인제를 지낼 무렵 도청노제가 '허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 앞서 이미 어떤 기자에게 도청 노제가 허용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기자는 학생들의 투쟁 결의를 감지하고 있던 도경찰청에서 될 수 있으면 충돌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는 개인적 관측도 덧붙였다.

 

대책회의 지도부도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움직임으로 봐서 도청 노제를 막으면 당국과 한판 결전이 확실해 보여 방관만 할 수 없었다. 학교 측에서는 총장과 학생대표, 대책회의에서는 진관스님이 도경찰청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도경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불감청고소원이었으리라.

 

아무튼 대책회의와 당국이 서로의 이해와 명분을 세우면서 도청 노제를 합의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승리를 굳혀놓은 상황에서 대책회의와 대학 당국이 자진하여 협상의 테이블로 달려가 결국 정부가 시혜를 베풀듯 '허용'이라는 단어를 쓰게 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승리였다.

 

전남대학교 5.18광장에서 치러진 영결식에서도 느낌은 많았다. 다른 열사의 장례식에는 대책회의와 당국 간에 중재를 서는 것도 피하던 국회의원들이 무더기로 내려와 영전에 선 모습이 고깝게 보였던 것은 내 속이 좁았기 때문이었을까?

 

김대중 신민당 총재의 조사를 대독하기로 했던 국회의원을 학생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끝내 조사는 빛을 보지 못했다. 국회에서 싸울 때는 용감하게 육탄전도 불사하던 의원들이 떳떳지 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처럼 학생들이 반대한다는 말에 꼼짝 못하고 물러서는 모습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맑은 5월 어느날, 우리는 박승희를 떠나 보냈다

 

영결식에 쓸 제물 준비가 늦어져 당황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제물을 담은 접시가 일회용이어서 누가 책을 잡을까 싶었는데 지적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제수품 진설에는 구경 오신 할머니 한 분이 자청해서 정성을 다해 맡아줘 다행이었다. 

 

영결식에서는 많은 사람의 조사와 영결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박승희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구신서 선생만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조사를 했던 사람은 없었다. 그가 제자의 영결식에 조사를 해야 하는 스승의 아픔과 시대의 비극을 울면서 말할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의례적인 조사가 아니라 나에게는 한 맺힌 통곡 소리로 들렸다.

 

영결식이 끝나고 도청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은 비장했다. 몇천인지 모를 결사대가 정연하게 앞서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운구 행렬은 대형 영정과 열사도·문화선전대·방송차·운구차 그리고 가족 및 장례위원들의 순으로 이어졌다. 그 뒤로는 또 학생과 시민이 따라 전남대에서 도청까지의 거리를 꽉 메웠다.  

 

박승희 열사는 누구?

전남대 가정대학 식품영양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91년 4월 29일 교내 집회도중 "폭력정권 퇴진"을 외치고 분신했다. 병원 치료 중 5월19일 숨졌다. 강경대 열사와 더불어 1991년 '분신정국'에 많은 영향을 줬다. 군부독재에 항거한 행적으로 2005년 9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내 평생에 처음 보는 장례 행렬이었다. 국장인들 그만한 규모를 만들 수 있으랴. 훗날 그날의 장면을 꼼꼼하게 담은 젊은 화가의 그림을 통해 당시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던 장면까지 한눈에 보면서 다시 감동을 되새긴 적이 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그날 처음으로 도청 분수대에 태극기가 올랐다. 이철규 열사의 장례식 그리고 윤용하 열사의 장례식을 치를 때는 피 터지게 싸우고도 접근조차 못 했던 분수대였는데,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를 인파가 모였다는 사실은 감동이었다.

 

강경대를 타살한 정권에 분노해 온몸으로 항거한 박승희 열사. 청년학생과 광주 시민은 그렇게 박승희 열사를 보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승희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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