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에야 집 밖으로 몇 걸음만 뛰어나가면 바다가 안겨들었고 바닷가에서 자라면서 바닷가 크고 작은 바위들을 평지 걷듯 오르락내리락했었다. 조금 더 자라면서는 높은 바위 위에 올라 다이빙을 하기도 하였고 웬만한 바위들을 쉽게 넘나들었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예민하고 부끄러움 많았던 청소년 시절엔 비가 오면 콤콤한 냄새나는 다락에 숨어들던 나의 모습이었다.
바닷가를 주무대로 해서 놀던 어린 시절, 이따금 마을 뒷산을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산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산을 좋아하는 남편 손에 이끌려 등산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따금 산을 만나러 가야할 정도로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 인생도 남편 인생도 새로운 변화와 U턴을 겪으면서 몇 년 간은 산에서 산으로 산을 만나러 다녔었다. 지금은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우린 말없이 산을 찾는다.
산을 만나고 산에 들면서 나의 인생은 더 깊어지고 여유로워지고 넉넉해진 것 같다. 내 마음도 몸도 많이 치유되고 건강해졌고 내 삶이 소극적인 삶 정적인 삶에서 동적인 삶과 조화를 이루게 된 것 같다. 산은 내게 새로운 만남이었다. 돌아서면 만나고 싶을 정도로 친근한 벗(?)이 되었다.
요즘은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내 삶은 더 역동적으로 변한 것 같다. '도전' '극복'이란 단어들이 내 삶의 피부에 와 닿는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도전', '모험' '극복' 이런 단어들을 접하면 사람들은 흔히 뭔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크고 거창한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내딛음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도전은 뭔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기대의 심리, 거기에 문 두드리고 한 발 내딛는 것, 그것 자체가 도전이다.
몇주 전에 등산교실에 입교하고서 내가 몰랐던 내 인생의 미개척지를 탐험하고 모험하고 확장하는 것 같은 희열과 설렘을 느꼈다. 그로 인해 내 정신연령도 마음도 몸도 힘찬 활력의 펌프질을 하는 것 같다. 잔잔하게 흘러가던 생활이 역동적이고 활력 있게 움직인다. 이론수업에서부터 실전수업까지 모든 것이 그저 새롭고 신선하기만 했다.
등산을 좋아해서 남편과 함께 쉬는 날이면 산을 찾았고 산에 올라 하염없이 등정의 기쁨과 편안함,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신비를 마음껏 느끼고 내려오곤 했었는데, 등산교실에 들어와서 가장 기본적인 등산상식과 정보들을 배우면서 등산도 학문이라는 것을 알았고, 산 노래가 따로 있다는 것도 새로 알았다. 등산이론, 보행법, 매듭법, 독도법 등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실전교육을 통해 모험과 극복의 묘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의 암벽슬랩을 하면서 자기 극복의 의미와 모험을 몸으로 경험했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다가도 그것을 극복하고 난 뒤에 보이던 희열에 찬 동기들의 표정은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또한 느꼈다. 할 수 있다 해 내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태도에서부터 모든 것을 극복하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는 것, 나의 두려움과 불안을 누르고 용기 있게 도전할 때 도전으로 인한 성취의 기쁨을, 그리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배짱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새로운 암벽등반을 경험 한 뒤,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훓고 지나갔다. 높은 바위벽이 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앞에서 애써 두려움을 누르고 아찔했던 순간, 바위를 오르고 성공했을 때의 그 느낌.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남편에겐 한 마디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으리라. 산행 도중에 높은 직벽 계단이나 가파른 바위를 만나면 오금이 저려서 제대로 건너질 못했던 남편이었다. 그랬던 그가 슬랩등반에서 바위벽을 손과 발을 의지해 올라갔고 죽느냐 사느냐의 심각한 자기 갈등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해냈을 때,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 번 해냈다는 성취감이 그에게 두둑한 배짱을 선물했나보다. 자꾸만 바위벽을 타고 오르내렸다. 만면에 웃음까지 띠고서 희열에 찬 표정으로 바위를 즐기고 있었다. 암벽등반이 주는 것은 암벽 슬랩을 해냈다는 성취감은 의외로 컸던 것 같다.
두려움과 불안을 누르고 용기 있게 해냈다는 자기극복,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한계를 지레 긋지 않고 극복해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마음을 준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한계를 금 긋고 살아간다. 자신의 삶 속에 내가 미처 개척하지 않은 분야, 가능성의 '처녀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안주하면서 살아간다.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해내고 나면 내 인생에서 내가 소심함과 두려움과 용기부족으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들을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 자기 극복의 의지를 심어주는 데 모든 모험과 도전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극복해 내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도전'이 아닌 것이 무엇이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크고 작은 도전 앞에 선다. '그것'을 극복해 냄으로써 또 더 앞으로 더 나아간다. 크고 작은 도전이 우리 인생길 앞에 있다. 익숙지 않은 길에 설 때도 있고 전혀 몰랐던 길, 그런 길이 있다는 것조차 상상조차 못했던 미개척지가 내 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 바라보는 시야가 좁다. 가던 길, 아는 길, 익숙한 길로만 가려고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자기가 있는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특히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그렇다. 도전, 극복, 모험, 개척…. 이런 단어는 젊음의 특권인양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주한다. 해서 갈수록 그의 삶은 협착하고 옹졸하고 딱딱하게 굳어진다.
도전은 젊음의 특권만이 아니다. 우리 인생길, 그 자체가 도전이고 모험에 찬 길이다. 새로운 세계, 내 인생의 처녀지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되자 하나의 세계가 열리면 또 다른 처녀림이 나타난다. 끊임없는 도전과 모험의 길이다.
우리 일상에서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앎에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다는 것, 그것을 알아간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도전하는 인생이 아름답다. 도전하는 인생은 늙어도 늙지 않는다. 나의 세계를 한계 짓지 말고 새로운 세계에 눈 뜨기 위해 '알'을 깨고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헤르만 헷세,<데미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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