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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일요일 아침 7시. 일찍 서둘러 큰길로 나갔습니다. 중학교 동문이랑 문경새재라는 곳으로 산행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못 갈 뻔했습니다. 안 따라갔으면 참 후회할 뻔했습니다.

 

저는 울산 동구 현대중학교의 1회로 졸업생입니다. 1978년 봄 초등학교를 마치고 우리는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전까진 중학생도 시험 보고 들어갔으나 우리 때부터 마침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 되어서 우리는 무시험으로 누구나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는 울산 동구 전하동 1번지에 있는 현대중공업 창업주인 고 정주영 씨가 만든 것입니다. 초등학교 중퇴가 다인 학력을 가진 정주영 씨는 늘 배움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마침 우리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 현대중학교가 완공을 하여 입학하게 된 것입니다.

 

우린 현대중학교에 첫 입학을 하게 되었고 입학식 날 고 정주영 씨가 직접 와서 축사 하기도 했으나 저는 뭐라 했는지 모릅니다. 입학식 날 저는 교실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중학교에 가게 되니 교복이란 걸 사 입어야 하는데 교복을 사 입지 못해서 담임 선생님이 "너는 그냥 교실에 남아 있어라"고 해서 그냥 창 밖으로 입학식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현대중학교 첫 입학식에 온 입학생은 염포·남목·전하 초등학교 학생이 함께 입학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모여 그 학교에서 3년간 등하교를 하고 수업을 받다가 졸업을 했습니다. 지금은 교육 평준화로 학교마다 별로 다를 바 없겠지만 그 당시엔 현대중학교 시설은 울산에서 제일 좋다는 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1회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남달리 잘해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풋풋한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그 곳에 모여 3년을 함께 보냈다는 이유로 저도 그 학교 동문으로 취급 받고 있습니다. 횟수로 중학교 졸업 한 지 30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모두 어떻게 사는지 궁금도 하고 동문 모임을 가지자는 제안이 오래전에 이루어 졌고 모임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렇게 매년 봄과 가을 산행도 하고 운동회도 갖고 년말 송년회도 가지면서 모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경제 사정상 이번 봄 산행 못갑니다. 모두 즐거운 산행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가끔 동문 홈페이지에 들러 봅니다. 소식이 궁금해서 안 들러 볼 수 없습니다. 2개월 전부턴지 봄 산행 간다고 동문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올라 있었습니다. 저는 일주일 전쯤 그 내용을 보고 댓글을 그렇게 달아 두었습니다. 산행 회비가 1만 원인데 그거 낼 돈이 없어 못 간다는 내용으로 댓글을 달아 둔 것입니다. 그런데 산행 하루 전 한 동문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아 보았습니다.

 

"니 일요일 집에 있으면 뭐하노 인마. 내가 회비 내 줄 테니 같이 산행이나 가자. 내일 아침 그 장소로 나온나 알았제"

 

김정열이란 친구인데 초등학교도 함께 나오고 중학교도 함께 나와서 같이 지낸 적이 많은 친구입니다. 저는 고맙다고 말하고 산행에 참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못 갈 뻔했던 산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7시 시간 맞춰 버스가 설 예정이라는 장소로 가보니 여럿이 버스를 기다렸고 정열이도 나타났습니다. 제가 고맙다고 말하자 친구지간에 뭐가 고맙냐며 그런 생각 마라고 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의 어려운 가정 경제 사정을 알고는 기꺼이 1만 원 회비를 대신 내주는 그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대형 관광버스가 오고 우린 버스에 올라타고 출발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문경새재라는 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울산에서 3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했습니다. 간만에 동문들 만나니 참 기분 좋았습니다. 더구나 이번엔 총동문이 간다고 했습니다. 울산에서 버스 2대가 가고 서울,경기지역 동문이 버스 1대로 온다고 했습니다.

 

제가 못 간다는 댓글을 대부분 동문이 보았는지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잘 왔다고 말했습니다. 우린 버스를 타고 문경새재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서울서 오는 동문 차량을 기다리다 그 동문 차량이 도착하자 모두 만나 인사 나누고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동문 중 산을 많이 탄 사람들이 산행대장을 맡아 했습니다. 그들은 삼각 깃발을 가방에 꽂고 자신을 따라오라 했습니다.

 

그곳은 유명한 관광지인지 관광단지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 지역 특산물 판매하는 곳이 많았고 나무로 만든 큰 수레들이 여러 대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예정에 없던 여행이어서 아무것도 준비해가지 못했습니다. 잘 가지고 다니던 사진기도 집에 두고 가서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산행하러 걸어가니 남대문 같은 그런 형식의 옛 건물이 나왔습니다. 그 문을 통과하여 우리는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산을 오르며 보이는 경치는 참 좋았습니다. 계곡엔 맑은 물이 많이 흐르고 있었고 얼마쯤 오르니 멋지게 떨어지는 폭포가 나왔습니다. 물줄기 흐르는 계곡을 따라 좀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넓은 공터가 있는 절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곳은 혜국사라는 절이었고 그 절에 대해 알림판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혜국사(惠國寺)

문경읍 상초리 여궁폭포를 지나서 주흘산 기슭에 있다. 847년(신라 문성왕 8년) 보조국사가 창건하여 당초 법흥사(法興寺)라고 하였다. 도승(道僧), 청허(淸虛) 송은(松隱)대사가 고려조에 공을 쌓았고 공민왕이 난을 피해 법흥사에 행재(幸在)하여 국은(國恩)을 많이 입었다고 해서 혜국사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1873년 송장, 지성 두 선사가 일부 중수하였다. 금강문(金剛門)은 1977년에 건립하였고 대웅전 단청은 1973년에 실시하였으나 1989년 대웅전 등 3동을 다시 중수하였다. 1979년 신중탱화에서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나와서 봉안하고 있다. 속암으로는 안정암이 있으며 예부터 혜국사를 오르던 길에는 자영당대사성연출세탑, 혜월당여상지탑, 해월당탑, 연곡당사신지탑의 부도가 있다.

 

우린 주흘산이라는 곳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본 긴 폭포 이름이 여궁폭포라는 곳임을 그 절간에 대해 설명문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곳은 참 절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을 오르던 중 날씨가 오락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먹구름이 끼더니 작은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날씨가 산을 오를수록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갔는데 그냥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워서 우린 그 절간 공터에서 조금 쉬다가 다시 주흘산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주흘산 정상까지는 1시간이 더 남아 있는 거리였습니다. 우린 주흘산 정상에 올라가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20분쯤 더 올라갔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날씨도 추워지고 비가 내려 더는 올라가는 게 무리라고 판단한 동문회 간부가 말했습니다.

 

"거기 선두 그만 올라가고 내려 갑시다. 올라오는 동문과 너무 쳐져서 다 도착하고 밥먹고 내려 올 시간이 안됩니다. 비도 오고 날씨도 추워지고 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그때 시간을 보니 1시가 넘었습니다. 뒤에 쳐진 동문들 다 올라오기를 기다리다 정상에 올라 점심을 먹고 산을 내려 오기엔 시간이 늦어져 진행에 착오가 생긴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동문도 그렇게 하자고 해서 우린 다시 산을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다시 산을 내려가다 그 절간 공터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맑은 공기가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산속 절간 옆 공터에 도착해 각자 짊어지고 온 보따리를 푸니 푸짐한 먹을거리가 차려 졌습니다. 여러 명씩 둘레둘레 바닥에 앉아서 점심을 나눠 먹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싸가지 않아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조금씩 얻어먹었습니다. 여러 동문과 나눠 먹으려고 무거운 짐보따리 짊어지고 온 동문이 참 고마웠습니다.

 

"창기 이리 온나 같이 묵자. 니가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 잘 보고 있다. 난 그거 모두 스크랩 해서 따로 모으고 있다. 잘 왔다. 마이 무라"

 

서울지역에서 온 동문이 날 불러 앉히고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저의 글에 대해 관심 있게 보고 또 글 잘 보고 있다고 여러 동문이 말하니 기분 좋았습니다. 동문과 함께 음식을 배불리 나눠 먹고 있는데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비가 오나 마나 개의치 않고 점심을 먹었으나 자꾸만 빗줄기가 굵어지고 게다가 비가 눈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아까 어떤 분이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온다면서 정상엔 눈이 왔다고 하는 게 믿기지 않던 차에 눈이 섞여 오는 것을 보고 이거 장난 아니다 싶었습니다.

 

"야들아 빨리 정리하고 내려가자 비가 많이 온다"

 

우린 음식 먹던 동작을 멈추고 허겁지겁 걷어치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산에서 내려갔습니다. 산을 내려가던 내내 비가 내리더니 산을 다 내려가고 나니 비가 그쳤습니다. 너무 아쉬웠습니다. 산 정상에 한 번 올라 가보고 싶었는데 이래저래 날씨가 요동치는 바람에 우린 오르다 말고 산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우리는 한 장소에 들러 남은 음식을 처리하고 다시 울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문경새재 갈 때랑 달리 울산으로 갈 때는 동문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습니다. 3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춤추는 동문도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가는 게 아쉬워서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울산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이경자 동문회장은 일일이 악수를 하며 "수고했다 고맙다 다음에 또 보자"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현대중학교 동문 산행은 끝났습니다.

 

저는 이번 산행 모임에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친구였던 동문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대호와 손정삼 이라는 친구들인데 염포동 이웃에 살며 살갑게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이대호라는 친구는 가끔 동문회에 나가 만났지만 손정삼이라는 친구는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이대호는 어릴 때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어 쉽게 알아 보았지만 손정삼이가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변해 있을지 그동안 그 친구가 참 궁금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사회자가 소개하는데 손정삼이란 친구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귀를 쫑긋하고 누가 손정삼인지 찾았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발견하고 당장 일어나 가서 악수를 청했습니다. "내가 변창기인데 정삼인 날 아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알지 우리 집 옆에 살았잖아" 그도 저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산행 참 즐거웠습니다. 동문 중에는 공무원도 있고 교사도 있으며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는 동문도 있습니다. 잘사는 동문도 있고 저처럼 처지가 딱한 동문도 있습니다. 대학 나온 동문도 있고 저처럼 가방 줄 짧은 동문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동문은 그런 거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같은 중학교를 나온 동문이니까 잘났든 못났든 잘살든 못살든 많이 배웠든 못배웠든 그냥 그렇게 하나로 어우러져 즐겁게 놀았습니다. 모두가 고마웠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길게는 40년 넘게 또는 30년 넘게 알면서 살아왔습니다. 같은 건물 속에서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이유로 허물없는 사이. 저는 그래서 동문 모임이 참 좋습니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풋풋했던 그들이 이젠 대부분 머리가 하얘지고 얼굴엔 주름이 생겼습니다. 산을 오르는데 무릎이 아프다고 하는 동문도 생기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2,3년 후면 50줄로 들어서는 동문들. 그렇게 청춘이 흘러 가는 게 아쉬워 그런지 동문들은 한결같이 어린아이처럼 킥킥거리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놀았습니다. 그 좁은 관광버스 안에서 쉼 없이 땀 흘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일어나 춤을 같이 추기도 했습니다. 저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사색을 즐기지만 오늘 그 시간 만큼은 일어나 동문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었습니다. 그렇게 청춘은 흘러가는가 봅니다.

 

덧붙이는 글 | 문경새재를 잘 구경하고 산행도 하며 보낸 하루가 다 가고 울산 남목에 도착해서 관광버스에서 내리려는데 한 여성 동문이 말했습니다. "창기야 힘내라. 내가 늘 응원할게."

가슴 뭉클한 동문의 마음을 내 마음의 질그릇에 담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동문들의 청춘. 언젠가 기회가 되면 우리 동문들의 '삶의 이야기'를 한사람 한사람 찾아다니며 듣고 사는이야기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태그:#현대중학교, #졸업,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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