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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전남 해남 땅을 밟은 것은 15년 전이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교 들어가기 전 겨울. 대학 생활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난 무작정 길을 떠났고 그 길로 반도의 끝, 해남까지 내려갔다. 땅 끝에 서야만 무언가 결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나를 그 먼 곳까지 이끈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해남 땅에서 나의 이목을 끈 건 땅끝마을이 아니었다. 물론 15년 전 토말에 지금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전망대가 있었더라면 한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꽤 강한 인상을 받았겠지만, 당시 그보다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해남의 낯선 색감이었다. 늦겨울 서울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해남만의 싱싱한 색깔.

 

난 아직도 목포에서 해남으로 넘어오는 길에 본 그 푸른 파밭을 잊지 못한다. 붉은 토양 위로 파랗게 솟아 하늘거리는 파밭의 모습은, 그때까지 두꺼운 점퍼를 입은 채 춥다고 호들갑 떠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남도의 늦은 겨울은 이미 그 강인한 색깔에서부터 추위를 이겨내고 이른 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내게 해남은 강렬한 색의 고장으로 각인되었다. 이후 친구들과 땅끝마을에서 호연지기를 다지겠다며 몇 차례 더 해남을 방문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창밖으로 보고자 했던 것은 해남의 색이었다. 땅끝이라는 상징성보다는, 내 눈으로 직접 본 해남의 색채야말로 내가 이 땅을 인식하는 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남도를 돌아다님에 있어서 내가 해남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월 해남의 색이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만물 본연의 색이 창궐한다는 4월. 과연 해남은 어떤 색을 하고 있을까?

 

11일 아침 해남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에 띈 건 역시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푸른 파밭이었다. 어느 곳보다도 붉은 토양과 그 위로 피어난, 눈 시리게 푸른 파. 그런데 4월의 해남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벚꽃은 물론이요, 분홍색 진달래, 노란 유채꽃이 더해져서 4월을 합주하고 있었다. 물론 전국 어느 곳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해남의 색은 더 강렬했고 더 신선했다.

 

해남의 중심 두륜산 대흥사

 

해남의 길은 두륜산 대흥사로 이어졌다. 요즘은 땅끝마을이 해남의 상징처럼 돼버렸지만, 아마도 오랫동안 해남의 모든 길은 대흥사로 모아졌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유언대로 사명대사가 스승의 의발을 이곳 두륜산에 묻은 이후 대흥사는 남도에서 가장 큰 사찰 중 하나가 되었는데, 아마도 이를 계기로 대흥사는 해남의 중심이 됐을 것이다.

 

대흥사 들어가는 길은 15년 전과 비교해서 그리 크게 달라진 바 없었다. 아직 나뭇잎은 채 돋아나지 않았지만 숲은 앙상한 가지만으로도 여전히 울창했고, 계곡은 깊었다. 대흥사를 찾아온 이들에게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길을 걸으며 어찌 속세에서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대흥사 일주문 앞의 유선관이었다. 그 전만 해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언급된 걸로 유명세를 탔던 그곳은 KBS <1박 2일>에 나간 이후 비교도 안 될 지명도를 얻은 듯했다. 당장 나를 지나가던 많은 방문객들이 유선관을 가리키며 <1박 2일> 이야기를 했으며, 아무리 화창한 4월이라지만 평일인데도 여관에는 빈 방이 없어 보였다.

 

휑한 벌판 위에 우뚝 솟은 느낌의 일주문을 지나니 서산대사의 부도로 유명한 대흥사의 부도밭이 나왔고, 이를 지나니 드디어 대흥사 경내가 눈에 들어왔다.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두륜산의 기암괴석 밑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대흥사.

 

깊은 계곡을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이 좁은 곳에 어찌 대흥사 같은 거찰이 있을까 싶었지만, 대흥사가 자리한 분지는 그야말로 산으로 폭 둘러싸여 속세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서산대사가 두륜산을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한 곳으로(三災不入之處)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으로 꼽아 자신의 의발을 맡길 수밖에.

 

깊숙한 계곡을 들어온 만큼 조용한 산사를 기대한 나. 그러나 그 바람은 해탈문을 들어서는 순간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대웅전 뒤로 거대한 기중기가 움직이고 있었으며, 경내는 그 무식하게 파란 공사천으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시끄러운 굉음을 내며 돌아다니는 덤프트럭들. 방문객이 없는 계절이라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아쉬울 따름이었다. 사진을 찍어도 작품 하나 나올까 했건만, 멋들어진 한옥 뒤의 기괴한 기중기라니.

 

 

'호국사찰'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고민

 

대흥사는 송광사나 화엄사만큼 큰 규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특이한 건 역시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표충사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사(祠)' 자로 끝나는 표충사. 그곳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를 모시기 위해 1669년 현종 때 건립된 사당으로서, 1788년 정조가 대사의 높은 공을 기리기 위해 친히 사액을 내리고, 현판까지 썼다고 한다. 어쩐지 들어가는 문 역시 유교 형식의 삼문이라더니.

 

이후 대흥사는 조정으로부터 세금까지 면제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억불숭유를 기본 골격으로 했던 임진왜란 이후 불교에 대한 대우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였다. 조선은 양란을 거치면서 불교의 저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정조는 화성 용주사에 아버지 유패를 모시는 등 불교를 이용해 왕권강화를 꾀한 것이다.

 

불교의 달라진 위상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징표로서의 표충사. 그러나 이를 마냥 조선의 불교에 대한 양보로 볼 수 있을까? 문제는 권력이 종교를 인정해주는 만큼, 종교 또한 변질된다는 사실이다.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게 되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현재 진행형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과연 조선의 불교는 어떻게 변질되었을까?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승병이다. 우리는 민족을 강조하며 호국불교의 승병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비가 오면 외출할 때 자신도 모르게 초목이나 작은 벌레를 밟아 죽여 금지된 살생을 범하게 된다 하여 우안거를 설정하였던 것이 불교의 가르침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불교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준군인'으로서 적군을 죽이게 된 것이다.

 

물론 민족이 종교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것이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어쨌든 불교의 스님들이 승병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고민은 생략한 채 자랑스럽게 호국사찰만을 운운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불교를 속세의 시선으로만 바라본다는 반증일 것이다.

 

사진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시끄러운 소음을 피해 서둘러 대흥사를 나왔다.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저 멀리 두륜산 정상까지 오르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었다. 해남에 오면 이곳 대흥사 말고도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달마산 미황사. 어차피 두륜산에 올라 볼 수 있는 풍경이 남해안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달마산에서도 이를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가자, 달마산으로.


태그:#해남, #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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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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