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산악회 첫 번째 산행

 

 

지지난 일요일(3월 27일), 오랜만에 북한산을 오른다고 집을 나섰다. 결혼 전에는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라도 자주 올랐건만, 결혼 후에는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봐야하는 터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북한산이었다. 가끔 서울을 벗어날 때면 저 멀리 보이는 보현봉만으로도 행복해 하던 나. 그러니 백운대에서 바라볼 풍경 생각에 잠을 설칠 수밖에.

 

아내도 그런 나의 설렘을 눈치 챘는지 그전 날 내게 파란 등산점퍼를 선사해 주었다. 물론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남편의 뱃살에 대한 걱정도 큰 몫을 했을 테지만, 어쨌든 황금 같은 일요일에 혼자 아이 보기도 힘들 텐데 등산복까지 걱정해준다니 마냥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산해서 얼큰하게 취하지 않고 집에 일찍 들어가야지.

 

산악회원들과 만나 가양대교를 건너 북한산성입구로 향했다. 말이 산악회지 회원이라곤 나까지 포함해서 딸랑 3명인 산악회. 이름도 아직 정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이번 산행이 처음이지만 어쨌든 회사 직원들 중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조직한 모임이었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의욕 충만한 모임이었다. 적어도 매달 한 번은 산에 오르자고 뭉친 사람들.

 

얼마나 갔을까. 저 멀리 허연 인수봉이 보이기 시작했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보는 북한산의 위용이던가. 그 말이 필요 없는 풍광에, 하도 오랜만에 하는 등산이라 백운대까지 퍼지지 않고 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은 이미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오랜만에 백운대에 올라 그 그림 같은 풍광을 가슴에 품어보리라.

 

3년 간의 변화

 

 

짐을 꾸린 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등산길 입구에 못 보던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북한산 지도는 지도였는데 등산로가 정상이 아니라 북한산 둘레로 이어져 있었으며 북한산 둘레길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북한산 둘레길? 아하.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강원도 바우길 등이 인기를 끌자 북한산에도 둘레길을 만들었나보군.

 

과히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였다. 안 그래도 단위면적당 최고 방문객수로 몸살을 앓고 있던 북한산 아니던가. 기형적으로 거대한 도시 서울을 끼고 있는 죄로 제 모습을 간직하기조차 힘든 북한산에 둘레길을 만든다면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등정 대신 둘레길을 선택할 듯 했다. 북한산 자체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명산이요, 둘레길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서울의 모습도 장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산 둘레길은 우이령길을 통과하고 있었다. 비록 예약제였지만 그래도 40년 동안 출입금지였던 곳을 지날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여정일 듯 했다. 대학시절 우이동으로 엠티만 가면 한 밤에 술 마시고 오르다가 결국 군인의 제지 때문에 가지 못했던 그 길이 열렸다지 않은가.

 

표지판을 지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왼쪽으로는 원효봉이, 오른쪽으로는 의상봉이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오늘 산을 거의 처음 오르다시피 하는 마형(흰 운동화에 추리니을 입고 온)에게 의상봉-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나한봉-문수봉-보현봉 구간을 보여주며 등산이 조금 익숙해지면 저 구간을 탈 것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기겁을 한다.

 

 

곧이어 대서문이 보였다. 그 뒤로 보일 막걸리집들의 파전 냄새가 진동하겠구나 하며 문을 지나는데 웬걸, 대서문 뒤의 풍경은 휑하기만 했다. 북한동 마을의 집들이 터만 남기고 모두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08년도 왔을 때 철거반대라고 여기저기 현수막이 붙어 있더니 결국 국가에 의해 모두 철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국가에서는 국립공원의 환경보호를 보도로 북한동 주민들을 내쫓았겠지만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문득, 아까 산으로 오면서 마주쳤던 은평 재개발 지구가 떠올랐다. 산에서 막걸리를 팔아가며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을 내쫓고, 소위 중산층들에게 최고의 스카이라인을 자랑한다며 아파트 장사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북한동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결국 저런 미분양 아파트 단지를 만들기 위해 북한동 사람들을 내쫓은 건 아닐까? 덕분에 북한동 계곡은 전보다 깨끗해져 있었지만 마냥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거기 산이 있었다

 

무량사를 지나 도착한 새마을교. 우리는 그곳에서 더 이상 계곡으로 직진하는 대신 백운대로 오르는 가파른 지름길을 택했다. 비록 산행 초모 마형이 있었지만 짧고 굵게 정상까지 오르기로 한 것이다.

 

마형은 처음에는 산을 곧잘 타는가 싶더니 이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페이스를 너무 오버한 탓에 주능선에 위치한 위문까지도 못가서 퍼져버린 것이다. 덕분에 시작되는 그 빤한 거짓말들. "이제 다 왔네", "저기 하늘이 보이네", "끝났네" 등등. 어떻게 하겠는가.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까워 계속 오르는 수밖에.

 

 

가파른 계단이 끝나고 백운대 바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위문에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날씨가 쨍하고 맑지 않아 서울은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춘삼월에 아직까지 눈으로 덮여있는 설산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나무들이 잎 대신 눈을 입고 있는, 오랜만에 보는 겨울산. 아내는 저 모습을 보며 산이 가장 정직할 때라 좋다고 했던가.

 

더 이상은 못 오르겠다는 마형을 위문쯤에 남겨둔 채 김형과 함께 백운대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백운대 바위 가운데쯤 예전에는 쇠줄이 있던 자리에 철계단이 놓여 있었다. 항상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멈춰서서 정체되었던 구간인데 이를 계단으로 해결해 놓은 것이었다. 물론 편하기는 했으나 과연 이렇게 구조물들을 더 만드는 것이 옳은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나 역시 그 구조물에 의지하여 이렇게 백운대를 오르는 게 사실 아닌가.

 

 

드디어 도착한 백운대 정상. 우선 사진 한 장으로 우리의 등정을 증명한 뒤 실실 둘러보기 시작했다. 비록 아주 맑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북쪽으로는 사패산부터 도봉산 오봉, 자운봉, 그리고 가까이 인수봉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눈 덮인 봉능선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뻥 뚫리게 하고 있었다. 그래, 이 맛에 등산을 하는 게지.

 

배 한 쪽씩을 나눠먹은 뒤 하산하기 시작했다. 같은 길로 내려가면 지루할 터, 우리는 북한산대피소를 지나 계곡 길로 향했고, 북한산대피소에서 엄청난 인파와 마주쳤다. 보성고등학교 산악회인 듯 했는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지 고등학생 되는 자녀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동호회 오래 가기는 산악부가 최고인 듯. 우리 3명뿐인 산악회는 언제 저만큼 인원들을 모을 수 있을까나.

 

 

내려오는 길은 역시 오르던 길보다 빨랐다. 두 형님들의 다리가 풀린 것도 있었지만 더 이상 풍경을 핑계 삼아 쉴 틈이 없었던 탓이었다. 우리네의 인생도 이와 같이 뒤돌아 볼 시간이 없으면 안 될 텐데. 아마도 계속 산을 오르다 보면 내리막에서조차 뒤돌아볼 여유를 배우리라.

 

산을 내려와 해장국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씩을 들이켠 뒤 헤어졌다. 두 잔, 세 잔이 참으로 아쉬웠지만 아직까진 산악회 초기, 아내들의 눈치를 봐야 할 때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자, 다음은 관악산이다.

 

그나저나 마형, 다른 건 모르겠고, 등산화는 꼭 필요할 듯.


태그:#북한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