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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예언'

 

여러 날 동안 꽃샘추위로 봄옷 입기엔 너무 춥고 겨울옷 입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운 날 이어지더니 어제부터 완연한 봄, 봄 날씨다. 이제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이 완연하다고 아우성치듯 앞 다투어 피어 난만하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몸과 마음을 봄은 자꾸 밖으로 밖으로 불러낸다. 몸도 마음도 봄에 이끌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선다.

 

몇 달 동안 산행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몇 주 전에 거제도 망산을 등산하고 난 뒤 모처럼 산행다운 산행을 하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3.26)엔 꽃샘추위 속에서 영남알프스의 가지산을 만나고 왔다. 바람이 제법 불고 쌀쌀한 날씨여서 얇은 옷을 여러 겹 입고도 여벌로 더 챙겨 넣어 나선 길, 날은 쾌청해서 먼 산줄기도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

 

동행이 아름답다

 

산행할 때면 대부분 남편과 단 둘이서 할 때가 많지만 가끔은 동행이 생긴다. 함께 산행하자고 남편이 데리고 온 청년은 금정산에 한두 번 갔던 것 외엔 산행 경험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젊음이란 뭔가. 철도 씹어 삼킨다는 에너지로 똘똘 뭉친 그런 시절이 아니던가.

 

약속장소인 양산 종합운동장에서 만나 가지산을 만나러 향하는 길. 언양을 지나 가지산터널을 통과하고 호박소터널을 지나자 바로 밀양 삼양리마을이 펼쳐졌다. 우뚝 솟은 크고 넉넉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삼양리마을은 평온해 보인다. 올 때마다 이 풍경은 마음 편안하게 하는 데가 있다. 삼양리마을을 통과해 석남터널로 가는 구 도로를 타고 삼양교까지 다다랐다. 삼양교 건너 쪽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가지산계곡 진입로 한쪽에 있던 건물이 사라지고 텅 빈 공터가 되어 있다. 우린 가지산 계곡 흐르는 물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 계곡을 따라 걸었다.

 

봄은 밑에서 타고 올라가고 가을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온다. 아직 이곳은 겨울인양 그 빛이 초록으로 갈아입기엔 요원해 보이지만 그래도 얼음 풀린 계곡 물소리 졸졸 흐르고 생강꽃이 봄이라 전하듯 여기저기 흩어져 피었다.

 

남편은 청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주고받는 이야기에 흥이 실려 있다. 나랑 단 둘이서 주로 걷던 길에 다른 동행이 있어 더 좋은 듯하다. 나는 두 사람이 앞에서 걷도록 배려하고 맨 뒤에서 그들을 뒤따라 걸었다. 가지산계곡을 타고 가지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꽤 길고 멀다. 가지산을 비롯해 영남알프스 산은 어느 곳이든지 산정까지 닿으려면 어디서든 녹녹치 않다. 계곡길 따라 걷다가 넓은 바위위에 앉아 쉬기를 몇 번.

 

한참 동안 계곡 물소리 들으면서 이야기도 하면서 걷고 또 걷다가 어느 순간 계곡이 끝나고 바위 너덜지대가 이어진다. 너덜지대는 갈수록 가팔라지고 경사가 점점 높아지면서 힘들어진다. 경사 높은 너덜지대를 한참 동안 가다가 잠시 쉬고, 다시 힘을 내서 올라가야 한다. 길은 어디서든 끝이 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다시 길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드디어 바위너덜지대가 끝나고 가지산 중봉과 가지산 정상 사이 안부에 이른다. 안부에서 이제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가지산 정상이다. 정상이 바로 가까이 있다 생각하니 무겁던 다리, 접힐 듯 하던 허리에 힘이 들어간다. 고지가 바로 저기다. 아침을 대충 먹고 와서 그런지 배가 몹시 고프다. 얼른 가지산 정상에 올라 점심도시락을 먹고 싶은 마음뿐이다.

 

계곡 길 따라 올 땐 조용했는데 막상 정상 가까이 올라와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울긋불긋하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힘차고도 부드럽게 뻗어나간 산줄기들을 가지산 정상에서 바라보고 우리는 한동안 압도당해 서 있다. 언제 만나도 좋은 산이다. 중천에 떠오른 부드러운 볕을 받으며 두루 펼쳐진 산을 둘러보았다. 가깝고 먼 곳에 신불산, 영축산, 신불평원, 공룡능선 등이 두루 펼쳐져있고 뒤쪽으로는 청도와 그 주변을 둘러싼 산들이 펼쳐져 있다. 맛난 점심도시락을 양지바른 곳에서 먹고 하산한다.

 

청년은 평소에 산행을 안 해 보았다기에 1천 미터가 넘는 가지산을 끝까지 우리와 동행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되었지만 단 한 번도 힘들다는 기색 없이 여유까지 있어 보이는 모습이어서 놀라웠다. 힘들지요? 하고 물어보면 그제서야 '조금 힘드네요.'하고 말했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나는 산길 걸으면서 앞서 걷는 두 사람을 뒤에서 지켜보듯 걸었다. 뒤따라 걸으면서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혼자 생각했다. 아름다움이란 것이 봄에 피어나는 꽃만이 아니라, 파릇파릇한 새싹이나 흐르는 시냇물만이 아니라, 화사하고 어여쁜 여인네만 아니라... 무심한 듯 앞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 그 동행도 아름답구나, 새삼 느꼈다.

 

자연 속에 있어 그들의 동행이 더욱 멋스러운 것일까. 높은 산과 산 사이 깊은 계곡, 물소리 환한 계곡 길을 따라 호젓이 걸을 때에도 두 남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웠고, 잠시 쉬어갈 때의 망중한, 주고받는 대화와 침묵 사이의 고요함, 산등성이를 오르고 비탈길을 걷고, 산정 높은 곳에 올라 우뚝 선 모습과 우뚝 선 정상에서 산 능선을 따라 걸을 때... 하산 길에 하늘 능선 길을 따라 걸을 때 역광으로 보는 모습,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뒷모습, 자연 속에 어우러진 그들 모습을 나는 눈여겨 보았다.

 

가지산(1240m)의 우뚝하고 늠름한 기상과 높고 깊고 넓게 펼쳐진 이웃 산, 산들 사이를 걷고 쉬고 또 걷고 대자연의 웅장한 파노라마 속에 연출되는 두 남자의 모습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리라. 대자연이 그들을 품어주기에 그 속에 있기에. 높이 우뚝 솟은 가지산을 오르느라 힘들었지만 산정에서, 혹은 하늘 능선 길 따라 걸으면서 산산이 흩어지고 모여 있는 산 빛을 멀고도 가까이 보면서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고 동시에 자연 속에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또한 느꼈다.

 

자연의 웅장함에 홀린 듯 걷고 두 남자의 뒷모습에 홀린 듯 또한 걸었다. 그들 두 남자를 뒤에서 바라보며 가지산 품에서 마음껏 걷고 쉬고 또 걸었다. 어느새 산그늘이 짙어지고 있다. 아침 일찍 시작했던 산행이 산그늘이 짙어질 때에야 출발지에 도착했다. 긴 시간 동안 가지산에 있었다.

 

꽃샘추위도 끝, 매화꽃, 개나리꽃, 목련꽃 앞 다투어 피어나고 이제 벚꽃들도 피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봄이다. 이제 본격적인 봄꽃산행이 될 것 같다. 봄은 자꾸 밖으로 밖으로 불러낸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몸과 마음을 자꾸만 불러낸다. 봄에 불려나갈 일이 많을 것 같다.

 

산행수첩

1. 장소: 언양 가지산(1,240m)

2. 일시: 2011년 3월 26일. 매우 맑음

3. 산행기점: 밀양시 삼양리 삼양교 주차장

4. 산행시간: 7시간

5. 진행: 삼양교주차장(09:45)-정상과 중봉 사이의 안부(12:50)-가지산 정상(1:15)-점심식사 후 하사(2:00)-넓은 조망바위(3:10)-아랫재, 백운산 갈림길(3:25)-사거리 이정표(3:50)-구룡소폭포(4:15)-삼양교(4:45)


태그:#가지산, #영남알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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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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