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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의 실습도 거치지 않은 '귀'로 익힌 솜씨입니다. 현란한 기술입니다.
▲ 현란한 기술 단 한번의 실습도 거치지 않은 '귀'로 익힌 솜씨입니다. 현란한 기술입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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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아이들 머리에 바리캉을 댔습니다. 지난 19일 아침입니다. 평소 토요일이면 온 가족이 따뜻한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어 이리저리 뒹굴 거리며 싫지 않은 게으름을 피우는데, 웬일인지 집안이 부산합니다. 아내가 아침을 빨리 먹어야 한다며 아이들을 다그칩니다.

바쁜 일이 있나 싶어 아쉬운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아내는 차려진 밥상 앞에서도 연신 조급증을 냅니다. 그리고 막 수저를 놓은 큰 아이 손을 화장실로 이끕니다. 그 후, 저는 마저 먹던 수저를 든 채 놀란 토끼눈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아내가 던지던 말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미친 물가 때문에 내가 아이들 머리를 직접 잘라 줘야겠어. 이발비가 일인당 6000원이야, 두 명이면 1만 2000원, 장난 아니야. 가위는 공짜로 얻었겠다. 바리캉만 구입하면 돼. 아이들 이발 열 번이면 바리캉 구입비도 건진다구.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 되면 당신 머리도 내가 맡는다."

말로만 들은 미용기술을, 실습도 없이 결행하다

무모한 도전에 동원된 장비들입니다. 날선 가위는 공짜로 얻었습니다. 모든 소란의 발단이 된 문제의 가위입니다.
▲ 이발도구 무모한 도전에 동원된 장비들입니다. 날선 가위는 공짜로 얻었습니다. 모든 소란의 발단이 된 문제의 가위입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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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가까운 분이 미용실을 잠시 쉬고 있는데 그 분이 아이들 이발에 필요한 몇 가지 장비를 빌려주었습니다. 물론, 친절하게 기기 사용법과 간단한 미용기술도 알려주었고요.

그 장비가 토요일 집에 도착한 겁니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아내는 보내온 장비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흘립니다. 날선 가위와 작은 빗 그리고 한 손에 잡히는 전기 바리캉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물고 며칠간의 다짐을 끝내 실행해 옮깁니다.

아내는 말로만 듣고 온 미용기술을 단 한 번의 실습도 없이 아이에게 들이댑니다. 아내는 스스로 최면을 걸기라도 하듯 머리카락을 자르는 내내 "간단하구만"이라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반면, 화장실로 끌려 들어간 큰 아들은 털깎는 양치기 앞 온순한 양처럼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히죽히죽 웃는 것을 보니, 재밌기도 한 모양입니다. 둘째도 신기한지 연신 주변을 기웃거립니다. 아내가 "귀찮아"라며 "떨어져 있어"라고 엄포를 놓아도 소용없습니다.

머리를 만지는 사람을 부르는 두가지 명칭. 이발사와 헤어디자이너. 두가지 명칭 모두 해당사항이 없는 무모한 아줌마입니다.
▲ 초보이발사 머리를 만지는 사람을 부르는 두가지 명칭. 이발사와 헤어디자이너. 두가지 명칭 모두 해당사항이 없는 무모한 아줌마입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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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삭발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두 녀석은 마냥 즐겁습니다.
▲ 잘린 머리카락 어떤 이는 삭발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두 녀석은 마냥 즐겁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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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멀찌감치 뒤에 서서 마냥 신나하는 두 아이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윙윙, 꿀벌 날갯짓 소리를 내며 전기 바리캉이 예쁘장한 큰애 머리를 휘젓고 다닙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는 점점 이상해집니다.

서툰 솜씨가 우스운지 아내도 피식피식 웃습니다. 그러다 점점 심각한 표정이 됩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계와 스치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움푹움푹 파이는 아들의 머리 모양에 희비가 엇갈립니다. 결국 쥐 파먹은 머리가 되었습니다.

더 큰일은 아내가 포기하지 않고 둘째를 부른 겁니다. 신나서 달려드는 둘째를 보며 목욕탕 안에서 물장난을 하느라 정신없던 큰애가 한마디 합니다.

"엄마, 근데 머리를 아직 덜 자른 것 같아요."

월급 빼고 모든 것이 다 올랐다

순한 양들입니다. 철들어서도 엄마의 기술을 받아 들일까요?
▲ 순한 양 순한 양들입니다. 철들어서도 엄마의 기술을 받아 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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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아내는 머리모양이 예쁘다며 연신 큰아들을 달랩니다. 큰애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이상한지 계속 저를 쳐다보는데, 저는 애써 외면하며 아내 말에 동의해 버렸습니다. 그 말을 굳게 믿은 아들은 다시 물장난에 몰입하고 둘째도 그렇게 엄마의 절약정신에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부족한 살림 아껴 보겠다며 이발도구를 손수 든 아내의 마음은 오죽할까요? 미친 듯 올라가는 물가에 시름이 깊어갑니다만, 알뜰하고 용기 있는 아내가 있어 또 힘을 냅니다. 아내가 제 머리를 자르겠다고 덤비면 정중히 사양해야 할까 고민됩니다.

조용한 토요일 날 작은 소동을 보며, 며칠 전 운전 중에 흘러나온 아나운서의 농담반 진담반의 말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습니다.

"요즘 장바구니 물가가 심상찮습니다. 월급 빼고 모든 것이 다 올랐답니다. 서민들 살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따뜻한 봄입니다. 우리네 살림도 봄 햇살에 핀 꽃처럼 활짝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복지방송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물가, #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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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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