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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꽃이 피었는데 어쩜 그렇게 참깨 한 알 나오지 않는다든. 까보니 죄다 쭉정이더라. 내 생전에 이런 일 처음 봤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한됫박이 안 나올까"

지난해 봄, 어머니는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깨로 기름을 짜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사방 열자도 넘을 듯 넓은 텃밭에 참깨를 심었다. 참깨는 잘 자랐고 꽃도 많이 피었다. 참깨 밭 옆에 가기 두려울 정도로 많은 벌들이 꽃과 꽃 사이를 들락날락했다. 어머니는 참깨 털어 기름 짤 날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가을엔가. '참기름 한 병은 주시겠지'의 기대로 참깨의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처럼 말하며 허탈해 했다.

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을 지난해 여름 나도 직접 겪었다. 지난해, "좋아하는 호박잎도 실컷 따먹고 늙은 호박 따서 좋아하는 호박죽도 실컷 해먹어라"며 시부모님께서 텃밭 둘레에 호박 몇 그루를 심어 주셨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호박 넝쿨을 보며 기대를 했다. 호박잎도 실컷 따먹고, 늙은 호박도 몇 개는 얻을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잎만 무성할 뿐, 호박 한 알 맺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벌이 날아들었음에도 말이다.

평생 농부로 살아오신 친정 부모님께 이런 정황을 설명했더니 몇 년 전의 일을 들려줬다.  호박을 사다 심었는데 호박이 유독 많이 열려서 씨가 좋은 것 같아 받아 다음해 심었더니 하나도 열리지 않았다는 것. 요즘은 옛날하고 달라서 종묘상에서 해마다 사다 심어야 호박이 열리지 옛날처럼 종자가 좋은 것 같아 씨앗을 받아 심으면 절대 열리지 않는다고.

친정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몇 년 전 <내 손으로 받는 우리 종자>(2007,안완식)란 책을 통해 알게 된 '슈퍼종자'가 생각났다. (관련 서평 '2009년 종자 로열티 지불...토종 개발만이 살길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2776

 계간지 <살림이야기> 봄호 겉그림
 계간지 <살림이야기> 봄호 겉그림
ⓒ 한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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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면, 단1회만 싹이 트고 자라 열매를 맺도록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이 품종개량·판매하는 1회용 씨앗으로, 예전처럼 열매가 좋다고 씨앗을 받아 다음해에 심으면 싹이 아예 나지 않거나 싹이 나도 우리 텃밭의 호박이나 어머니의 참깨처럼 열매를 맺지 못한단다. 종자회사들이 자신들이 만든 상품인 씨앗을 해마다 팔아먹으려고 그처럼 품종 개량한 것이다. 슈퍼종자들은 더 이상 번식을 못하니 '불임씨앗'이라는 표현도 적절할 것 같다.

슈퍼씨앗을 염두에 두고 어머니께 참깨와 호박의 씨앗에 대해 물었더니, 참깨는 쌀집에서 한 홉을 사서 심은 것이고, 호박은 친정아버지처럼 종묘상에서 모종으로 사다 심었는데 많이 열려 종자가 좋은 것 같아 씨앗을 받아 심은 것이란다. 참깨와 호박이 하나도 열리지 않은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이들은 슈퍼종자의 2세였던지라 모양은 멀쩡했지만, 수정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 꽃들에 날아든 벌들이 모은 꿀은 괜찮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농사를 짓지 않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슈퍼종자의 존재는 낯설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처럼 텃밭이나 주말농장에 씨앗을 받거나 얻어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않으면 이상기후 탓으로 돌리거나 귀신이 곡할 노릇, 혹은 우리 어머니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의아해 하고 황당해 한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 우리 농촌이 처한 현실이고, 우리 농부들이 해마다 뼈아프게 겪고 있는 일이다.

전남 함평의 귀농 5년차 농부 박진선씨는 올해 세 살 배기 아들의 돌반지를 팔기로 했다. 당장 주저앉은 비닐하우스를 다시 세워 올려야 했고, 봄을 코앞에 두고 들어가야 할 돈이 이만저만이 아닌 터였다. 한 돈짜리 금반지를 팔아 손에 쥔 돈은 19만원. 금값이 많이 올라 시세가 좋다는 말도 들었지만 박씨는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돈으로는 그가 주력으로 재배하는 파프리카 종자를 한 줌도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값보다 씨앗 값이 더 나가는 시대다. 현재 금의 실거래 가는 1g당 5만 원선. 반면 신품종이라는 파프리카 종자의 경우 g당 11만 7천원, 토마토도 12만 원선으로 거래되고 있다. 새로운 품종이 나타날 때마다 치솟는 종자 값에 농사철을 앞두고 한숨부터 나오지만 반대로 종자회사로서는 바닥나지 않는 금광을 채굴하듯이 고부가치 미래사업의 승자가 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계간지 <살림이야기> '종자 전쟁이 치열하다'에서

우리가 오래전부터 재배해 오지 않은, 식생활의 변화로 현대인들이 즐겨 찾는 파프리카, 브로콜리 등과 같은 일부 작물들에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혹 있으랴. 전혀 아니다. 배추, 무, 상추, 쑥갓, 파, 양파, 감자, 고구마, 생강 등 우리가 오래전부터 재배해 왔으며 우리밥상에 자주 오르는 거의 모든 작물들이 예전처럼 종자가 좋은 것 같다고 받아 심으면 애써 농사지어 수확할 수 없는 지경까지 되기 때문에 박씨처럼 금값보다 비싼 씨앗값을 해마다 지불하고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종자전쟁이 치열하다. 금값보다 종자값이 비싸다면 믿겠는가?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다. 외국 특허 종자 점유율이 높은 우리나라 농민들은 해마다 종자전쟁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종자전쟁이 치열하다. 금값보다 종자값이 비싸다면 믿겠는가?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다. 외국 특허 종자 점유율이 높은 우리나라 농민들은 해마다 종자전쟁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 최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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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 회사의 국적이 어떻든 농부들이 매년 지불해야 하는 종자 비용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특히 한국은 2002년 뒤늦게 국제신품종보호연맹(UPOV)에 가입하면서 식물 품종 육성자의 권리를 가맹국 간에 보장한다는 원칙에 따라 2012년부터 거래되는 모든 농작물 종자에 대해서 특허권자에게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외국 품종의 점유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로열티 대응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입장이다. 2000년에 들어서야 농촌진흥청이 처음으로 사과, 배, 복숭아, 오이 등에서 품종보호권을 설정했을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은 한국의 실정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일본의 딸기 종자인 '육보'. '장희' 종자를 1998년 한국에서 등록하고 매년 등록비를 지출해 왔는데, 한국이 UPOV에 가입하자 뒤이어 이들 딸기 종자에 대해 로열티 60억 원을 요구했다.…한국의 농부들은 새송이와 팽이버섯의 포자를 이용하는 대가로 매년 46억 원 가량을 일본에 지급하고 있고, 참다래도 뉴질랜드의 제스프리라는 회사에 매년 20억 원 가량, 장미나 국화와 같은 화훼류도 네덜란드 등의 종자회사에 수십억 원을 지불하고 있는 실정이다.-계간지 <살림이야기> '종자 전쟁이 치열하다'에서

계간지 <살림이야기> 봄 호(통권 12호) 특집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씨앗'에 대해서다. 씨앗 특집 십여 편의 글 중 '종자 전쟁이 치열하다'는 글의 이 부분은 참 쓰리게 읽혔다.

UPOV 가입으로 외국 특허권자에게 엄청난 로열티를 물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2009년부터 모든 종자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는 줄은, 우리에게 친숙한 '육보'나 '장희'가 이처럼 비싼 대가를 치른 딸기라는 걸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국산 농작물의 로열티 지급액은 2001년에 5억 5천만 원, 2005년에는 151억 6천만 원, 2009년에는 164억 8천만 원으로 갈수록 늘고 있다고.

금값보다 비싼 종자 값의 현실을 다룬 이 글 '종자 전쟁이 치열하다' 외에 '씨앗, 님 쫌 짱인 듯' '세계의 밀 1/4에 우리밀의 피가 흐른다.', 'GMO 오염된 씨앗이 밥상을 위협한다.', '종자의 고향에 질병 해답이 있다'등 씨앗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들이 실려 있다. 마침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는 봄인지라 이야기들은 더욱 현실감 있게 와 닿는것 같다.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아마도 내가 심어 수확한 씨앗을 받아 심거나 좋은 종자를 이웃끼리 나눠심던 옛날에는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신났을 것 같다. 해마다 부모님께 "올해 농사는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종자값 빼고 농약과 거름값 빼면 뭐가 남겠노? 어떤 때는 품삯은커녕 종자값도 나온다. 그래도 어쩌겠노. 평생 지어온 농사인데, 자식들 먹일 수 있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지"라고 대답하시곤 한다.

안완식의 <내 손으로 받는 우리 종자>란 책을 읽기 전까지, 이 책들을 통해 우리 토종 씨앗의 중요성과 우리의 씨앗들이 처한 위기, 종자전쟁과 그에 따른 암울하고 처참한 농촌의 현실을 알기 전까지 아버지의 '종자값 빼고'의 진실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던지라 아버지의 종자값 부담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농약값과 거름(비료)값은 이해가 됐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종자를 받아 심거나 이웃끼리 나눠심는 것을 예사로 보고 자랐기에.

 지난해 여름에 찍은 친정의 재래종(토종) 참깨꽃
 지난해 여름에 찍은 친정의 재래종(토종) 참깨꽃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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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생강농사 망쳤다 아이가. 112만원어치 종자를 사서 여름내 농사지어 170만원이 나오더라. 거름값 빼고 나면 무슨 돈이 남겠노. 농사가 잘되면 훨씬 많은 돈이 나오지만, 해마다 종자값이 오르니 이젠 생강 농사도 영 재미없다. 내 생전에 생강은 이제 다시는 심지 않을 생각이다. 어디 생강만 그러가. 해마다 씨앗값만 몇백 만원이 든다. 고추고 상추고, 옥수수고 이제는 무엇이든지 사서 심어야지 옛날처럼 씨 받아 심으면 하나도 건지지 못하기 일쑤니 말이다. 고추씨 한 봉지 6만원 주고 사면 1000주, 잘하면 1100~1200주도 나오는데, 요즘에는 씨앗과 흙(한 봉지 5천원)을 함께 판다. 들리는 말이 그 씨앗은 그 흙에 심어야 싹이 제대로 나고 잘 자라지 옛날처럼 흙을 만들어(모종을 기를 때 흙을 정리하여) 심으면 부실하기 때문에 씨앗을 살 때 흙도 함께 산다. 이래 농사 지어 무엇이 남겠나?"

어제 <살림이야기>에 대한 이 글을 쓰다가 오늘날 우리 농촌이 처한 현실이 참으로 마음 쓰려, 올해는 어떤 것들을 심으실 것인가? 물으니 친정어머니는 이처럼 말씀하신다. 농민들 등골 빼먹는 종자 회사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개발한 흙에서만 싹이 트고 잘 자라도록 씨앗을 조작해 파나보다 싶어(아마도), 이러다가 우리 흙들까지 설 땅을 잃고 마는 것은 아닌가의 우려까지 겹쳐 전화를 끊고 한참동안 마음 참 씁쓸했다.

우리 씨앗들의 위기와 농촌의 암울한 현실을 알려주고 있는 <살림 이야기>의 봄호 특집 글들은 밥을 먹고 사는 한 누구나 알아야 할 그런 것들이다. 씨앗 이야기 외에 베개 이야기인 '종이 세장 베고 자, 삼천갑자를 살았다고?'와 '정부가 자초한 구제역 재앙', '산후조리, 엄마와 아기 모두 평화롭게'란 글들도 유용하게 읽었다.

덧붙이는 글 | <살림이야기> 봄호(통권 제12호)|한살림|5000원|정기구독은 잡지나 홈페이지에서



#종자전쟁#씨앗(종자)#토종씨앗(재래종)#씨드림#잡지(계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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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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