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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직접 체벌은 금지하고, 교육 목적의 간접 체벌은 허용하겠다.'

지난 1월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밝힌 방침이다. '도구나 신체를 사용하는 직접 체벌은 금지하되, 팔굽혀펴기나 운동장 걷기 등 교육적 훈육 목적의 간접 체벌은 허용한다'는 것이 골자다.

교과부는 구체적인 방법은 단위학교에서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하도록 하고,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만들어 입법예고했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3일, 해당 시행령 개정안을 검토한 결과 교과부에서 제안한 간접체벌 또한 신체적 고통을 주는 훈육 방식으로 학생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문제 학생의 지도 강화를 목적으로 회당 10일, 연간 30일 범위에서 출석정지를 도입한다는 개정안 내용도 '퇴학 처분시와 마찬가지로 재심 청구권 절차를 마련하는 등 학생 불이익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똑같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 사이에서도 간접 체벌을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체벌 반대 입장이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체벌 찬성 입장이다. 학교 현장에서조차 같은 사안에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으니 학생 지도가 얼마나 어려울까 이해가 된다.

체벌 앞에 '교육적'이라는 단서를 붙여 간접 체벌을 옹호하는 것은 유신시절 '한국적 민주주의'에 상응하는 불합리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으로, '교육적 체벌'이라는 명분의 체벌은 학교 현장에서 합당한 통과의례처럼 보조 교사로 자리매김해왔다.

필자 또한 현장교사로서 체벌 문제를 고민하며 산다. 대안 없는 주장으로 거룩한 계몽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단상에 젖어본다.

"나무가 일시적인 고통을 겪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잖아유~"
▲ 가지치기 "나무가 일시적인 고통을 겪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잖아유~"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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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의 가지치기와 교사의 체벌은 같은가, 다른가?

정원사 한 분이 열심히 가지치기를 한다. '저 분은 가지치기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살며시 다가가 말을 건넨다.

"저, 가지치기를 하면서 무슨 생각 하시나요?"

"아이구, 뭐 있나요? 사는 거 다 그렇쥬 뭐. 인생사 시름도 잘라내고 고통도 잘라내고 이것저것 생각하기 싫은 것들 다 잘라내는 거지유. 이 일 하다 보믄 아무 생각이 읍써유."

"엉뚱한 질문인데 나무의 입장에서는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그렇쥬. 고통스럽겠쥬. 그러나 일시적인 고통을 겪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좋은 모양새를 보고 우러러보게 되잖아유. 우리는 나무의 입장에서 나무가 되어 가지를 쳐유. 여기 좀 보세유. 빽빽하고 답답한 곳을 이렇게 살짝 쳐주면 얼마나 시원하겠어유. 나무에게 길을 열어주는 거지유."

"아, 예에. 저는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나무가 무척 아프고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말씀 듣고 나니 마음이 좀 놓이는데요?"

"먹고사는 일이지만서두 나무 자르며 근심 걱정 잊으니께 을매나 좋아유. 나무는 나무대로 좋고."

"나무마다 가지를 치는 방법이 다 다르겠어요."

"그럼유. 이 일 많이 하다 보니께 나무의 마음을 알게 되유."

말을 하지도 못하는 나무련만 나무의 입장이 되어 가지치기를 한다는 정원사의 철학이 감동을 준다.

정원사의 가지치기 철학이 교사로서 삶을 살아가는 내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교육계 최근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체벌 금지 논란과 관련하여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교사로서 성장기 아이들에게 정원사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닐까? 뭔가 부족하니까, 혹은 제멋대로니까, 보기 싫으니까, 내 마음에 안 드니까 정원사의 경험과 방식처럼 아이들에게 가지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체벌은 결국 상처만 남게 한다

체벌은 학생의 행동 변화에 특효약이다. 해열진통제일 뿐이다. 그러니 효과가 매우 일시적이다. 체벌은 장기적으로 교육력을 저하시키는 애물단지가 된다. 체벌당한 학생에게 저항, 복수심, 부정적 사고 등이 내재화된다면 그 어떤 교육으로도 치유하기 힘든 상처가 되는 것이다.      

그 상처의 양태가 짧은 시간이 지나 치유되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한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반창회, 동창회 때 학창 시절을 돌이키며 한 맺힌 사연을 토로할 때가 있다. 그때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체벌의 추억이다. 일부 벗들이 육두문자까지 동원하여 체벌의 악연을 떠올릴 때면 현장교사로서 등골이 오싹하기도 한다.

우리는 성장기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벌 문화를 수용해왔다. 서당의 훈장이 방석 위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종아리를 치며 훈육하는 장면은 차라리 정겨운 모습으로 학습될 정도였다. 우리는 그러한 종아리 치기를 아주 바람직한 교육적 체벌로 받아들여 왔고, 그보다 훨씬 강한 체벌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매'로 장식하여 문제없이 넘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 사이에서, 양육하는 부모와 성장하는 자식 사이에서, 군대에서, 선후배간 다양한 조직에서 체벌은 마치 음성화된 문화처럼 때론 양성화된 관습처럼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초중고 교육이 입시 경쟁으로 치닫는 한 체벌 의존도는 줄지 않을 것이다.
▲ . 초중고 교육이 입시 경쟁으로 치닫는 한 체벌 의존도는 줄지 않을 것이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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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교육, 입시 환경 등 사회적 성찰 필요

학부모가 회초리를 만들어 현장 교사들에게 나누어주며 '내 자식 때려서라도 잘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 화젯거리가 된 적도 있다. 체벌이 사람을 강인한 무기로 변화시키는 군대 문화 또한 학교에 자리 잡고 있다. 여전히 진행 중인 과밀 학급은 교사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라 체벌이 보조교사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할 수도 있다.

학교 현장의 체벌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유포하고, 그 충격이 사회 문제로 비화되면서 체벌금지 조치를 환영하는 분위기더니, 최근에는 체벌금지 조치로 '교사가 학생을 두려워해야 할 정도'라며 교육적 체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눈치다. 체벌은 표면상 순종과 맹종을 낳게 할 뿐 이면에는 저항과 반항심을 자극하는 독이다.

이제 체벌을 초중고 현장의 이야기로 국한해서는 안 된다. 입시 환경을 둘러싼 체벌 합리화의 구조도 깨야 한다. 체벌 교사를 싸잡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네 가정교육의 실상도 함께 짚어봐야 한다. 체벌이 학교 현장의 산물이라고 단정 짓기 전에 잘못된 가정교육의 실상도 덧붙여 헤아리는 사회적 지혜도 필요할 때다.

결단코 체벌은 안 된다. 필자 또한 23년 교직 생활 중 어지간히 매를 댄 경험이 있다. 그 매가 제자를 위해서였다기보다 나를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매를 버렸다.

내 자식 셋을 키우며 매 한 번 대지 않았으면서 남 자식이자 내 제자들에게 일시적이나마 체벌로 다스렸던 점을 참회한다. 소위 속 썩이는 아이들 때문에 내 오장육부가 썩어문드러져도 좋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체벌 없이 살겠다. 그게 학교다.


태그:#체벌, #체벌 금지, #간접 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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