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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75호인 곡성 태안사 경내에 소재한 광자대시비. 비의 몸돌은 파손이 되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 광자대사비 보물 제275호인 곡성 태안사 경내에 소재한 광자대시비. 비의 몸돌은 파손이 되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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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에 소재하고 있는 태안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부도군을 모아 놓은 곳이 있다. 지난 2월 26일 오후 늦게 찾아간 태안사. 부도군 그 안쪽으로 보면, 비가 없이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는 비가 보인다. 이 비는 몸돌인 비는 사라지고 받침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는, 고려 초기의 승려 광자대사 '윤다'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태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이다. 광자대사는 고려 초기 경문왕 4년인 864년에 태어나, 8세에 출가를 하였다. 동진출가를 한 광자대사는 많은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 뒤 가야갑사에서 '계(戒)'를 받은 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수행을 계속했다. 혜종 2년인 945년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용머리의 목 부분은 뛰어난 조각술을 보이면서 사실적이다
▲ 머리 용머리의 목 부분은 뛰어난 조각술을 보이면서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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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몸돌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보물 제275호인 광자대사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거북받침인 귀부 위에 머릿돌인 이수만 얹힌 상태이다. 비에 새겨진 글씨조차 마모가 심하여 알아볼 수가 없다고 하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이나 <해동금석원> 등에 비문의 전문이 남아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다.

이 사라진 비문에는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효공왕의 측근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광자대사는 궁중에 드나들면서 법을 설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탑비의 받침인 귀부는 용머리로 조각하였다
▲ 용머리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탑비의 받침인 귀부는 용머리로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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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갑문을 새긴 등 뒤편에 조각한 꼬리가 조금은 해학적이기도 하다
▲ 꼬리 귀갑문을 새긴 등 뒤편에 조각한 꼬리가 조금은 해학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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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으로 묘사한 조각술의 백미

광자대사비의 받침돌에 새겨진 거북은 목이 짧아 보인다. 하지만 용의 형상을 한 머리의 표현이나, 목 앞쪽의 선을 표현한 것 등은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거북이의 귀갑문을 새긴 등이나, 꼬리 등은 조금은 해학적이기도 하다. 앞뒤의 발은 힘차게 표현을 하였는데, 우측 앞발은 떨어져 나갔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는 소용돌이치는 형태의 문양을 새겨 넣었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네 귀퉁이마다 용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다. 이수의 중앙과 앙 편에는 여의주인 듯한 둥근 물체를 화려한 불꽃문양과 같은 것으로 감싸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이수에서 찾아보기 힘든 예이다. 

귀부에 조각한 발은 발톱을 세워 힘차게 표현을 하였다
▲ 발 귀부에 조각한 발은 발톱을 세워 힘차게 표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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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의 오른쪽 발은 떨어져 나갔다
▲ 깨어진 발 귀부의 오른쪽 발은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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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잘린 극락조의 풀리지 않는 궁금증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이러한 새의 종류는 국보 제53호인 연곡사 동부도와, 국보 제54호인 연곡사 북부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극락조의 목이 잘려있는 부분을 보면 구멍이 나 있다. 늘 갖는 의문이지만, 왜 이렇게 목이 잘린 부분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일까? 어떻게 일석으로 조각을 한 이수의 극락조 안에 저런 공간이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연곡사 북부도와 동부도에서도 목이 잘려나간 극락조들의 부위에 구멍이 나 있었다.

아마도 극락조의 목 윗부분은 따로 제작을 하여 끼웠던 것이나 아니었는지, 그래서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있고, 극락조의 머리 부분만 손쉽게 빼간 것이나 아닌지 하는 점이다. 이런 경우 완전한 모습의 극락조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조금 더 신경을 쓰고 관리를 했다면, 제대로 된 극락조의 머리 부분을 보았을 텐데 말이다.  

이수에 조각한 극락조의 머리가 없다. 목 부분에 구멍이 나 있다
▲ 극락조 이수에 조각한 극락조의 머리가 없다. 목 부분에 구멍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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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조각을 한 광자대사비의 머릿돌인 이수
▲ 이수 화려한 조각을 한 광자대사비의 머릿돌인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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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의 양편에는 용머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용머리 이수의 양편에는 용머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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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소중한 문화재의 모습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비는 머릿돌인 이수를 보면 뛰어난 조각 솜씨를 통해,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려 했던 점을 볼 수가 있다. 대사가 입적한지 5년 후인 광종 1년인 950년에 세운 비로, 벌써 1160년의 세월을 태안사 경내에 서 있었다. 그동안 전화로 인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 귀부와 이수라도 남아있다는 점이 고마울 뿐이다.

이런 소중한 문화유산을 우리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다면, 후대에 우리들은 얼마나 바보 같은 선조들이라고 욕을 먹을 것인가? 강 정비를 한다고 하면서 애꿎은 마애불에 구멍을 내놓고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눈뜬장님이 되어가는 세상. 그래서 오늘 이 광자대사비가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태그:#광자대사비, #보물, #태안사, #곡성,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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