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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에서 경남 하동 방향으로 섬진강을 끼고 난 19번 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따라 하동 거의 다 가서 좌측으로 보면 전각이 보인다. 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니, 이곳 집이라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좋은 집 자리이다. 그러나 이 전각은 사적 제106호 '칠의사'이다.

 

칠의사 앞으로 섬진강을 바라보면 우측 산턱에 작은 묘가 8기가 보인다. 담장을 둘러친 이 가지런히 조성한 여덟 기의 묘는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때 석주관에서 왜적을 물리친 7명의 충절어린 의사들과 당시 구례현감을 모신 무덤이다. 한 8년 전인가 이곳을 지나쳤으니, 2006년 정도인가 보다. 당시는 이 무덤이 봉분이 아닌 비가 서 있었다.

 

 

석주관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

 

구례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곳이다. 섬진강을 끼고 칠의사 뒤편으로는 당시의 산성인 석주관성이 있다. 이 석주관에서 정유재란 때 끝까지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구례출신의 일곱 분의 의사를 모신 무덤이, 바로 사적 제106호인 석주관 7의사 묘이다.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의 남원과, 경상도의 진주는 많은 전화를 입은 곳이다. 하기에 그 중간에 위치한 구례는 군사작전상 상당한 요지였을 것이다.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병들은, 이곳 석주관을 통과하여야만 남원성을 공략할 수가 있었다. 하기에 이 석주관은 경상도지방에서 전라도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석주관은 안음의 황석산성과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량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의 한 곳이다. 군사적으로 요충지이다 보니, 고려 때부터 이곳에 진영을 설치하여 왜군의 침략을 막았다.

 

 

죽음으로 석주관을 지킨 의병들

 

조선 선조 31년인 1598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호남지방을 목표로 하여 이곳 석주관을 집중 공격하였다. 당시 이 석주관이 갖는 의미는 상당한 것이었다. 하기에 구례현감 이원춘을 석주관의 만호(종 4품의 무관직)에 겸임토록 하였다. 선조 31년인 1598년 왜병이 석주관을 공격하자 이원춘은 남원성으로 후퇴를 하여, 그곳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를 하였다.

 

그러자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켜 석주관에서 진주에서 올라오는 적과 대항하여, 필사적으로 석주관을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그 후 왕득인의 아들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의병·승병들이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의병을 희생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당시 왜병들은 석주관을 넘어 구례로 쳐들어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던 구례의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과 왕의성 등이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구례 화엄사의 승병과 더불어 석주관을 지키던 중, 이듬해 봄 다시 공격하는 왜병들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너무나도 작은 봉분, 그래도 고마워

 

이 전투에서 5명의 의사들은 모두 전사하고, 왕의성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왕의성도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가 전사를 하고 말았다.    순조 4년인 1804년, 나라에서는 왕득인을 포함한 7명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이 내려졌고, 1946년에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에 의해 칠의각이 세워졌다.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고, 칠의사 동편으로는 석주관성이 복원이 되어있다. 이곳에서 경상도로 가는 길목을 보고 있는, 8명의 충절로 나라를 지킨 의사들. 2006년에는 그저 네모나게 조성한 시멘트 위에 비석들이 서 있어 황량하였으나, 이렇게 작은 봉분이나마 조성을 하였으니 고맙기 짝이 없다.

 

석주관성과 칠의사. 이곳은 우리가 후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충절의 역사현장이다. 무심코 칠의사 묘 앞을 지나쳐 달려가는 수많은 차량들. 그들에게 과연 이 칠의사의 묘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변화가고 있는 세상이 그저 무심하기만 하다.


태그:#석주관, #칠의사 묘, #사적 제106호, #섬진강,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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