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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2월 17일 오전 9시 13분]

제인 진 케이슨.
 제인 진 케이슨.
ⓒ 제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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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진 케이슨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난 후 3개월 후 덴마크로 입양되었다. 그녀는 덴마크와 미국에서 교육받았고, 현재 비디오 아티스트와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이번 한국 방문 감회를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와 영화제작자 입장에서 한국사회는 아주 흥미롭다. 한국은 급격하게 현대화가 되어서 그런지 과거와 현재가 뚜렷하게 공존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 면에서 초현대화 되어 있는 면이 있지만 여전히 과거 일제식민지와 한국전쟁의 상처(트라우마)의 흔적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입양도 이러한 한국인의 과거 상처의 유산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해외입양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곧 과거 한국인의 상처가 현재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1990년대부터 과거 해외로 입양되었던 '한국계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에 와서 자기 친부모뿐 아니라 한국사회 입양의 구조적 원인문제를 모색하고 있다."

제인은 덴마크로 입양된 후 2001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당시 그녀의 친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거의 매년 한국을 방문한다. 이번 제인의 방문목적은 작품전시회 참여와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을 위해서다.

나는 제인을 지난 2월 9일 서울 인사동 한 찻집에서 만났다. 다음은 제인과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한국 여성들이 3세대에 걸쳐 군사주의의 영향 받았는지 보여주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의 한 장면.
ⓒ 제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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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The Woman, the Orphan, and the Tiger)>가 2010년 대만에서 열린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아시아 비전상 후보에 올랐다. 또 나비갤러리 전시회에서도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그 수상 작품에 대한 설명과 소감을 이야기하면?
"그 국제영화제는 전 세계 영화제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아시아와 서구에서 영화제작자들이 참여했다. 내 작품을 아시아인들과 서구인들에게 동시에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기뻤다. 나는 거스톤(Guston Sondin-Kung)이라는 제작자와 공동으로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72분짜리 실험용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준비기간이 3년 걸렸다.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어떻게 한국 여성들이 3세대에 걸쳐 군사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보여주었다. 1세대는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분들이고, 2세대는 미군기지 근처의 기지촌 여성분들의 삶이고, 3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로 해외로 입양된 분들의 삶 문제였다.

이 작품은 군사주의와 가부장제가 여성과 아동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국내외의 구조적인 시각에서 다루었다. 이 작품에서는 여성들에 대한 일본의 전범으로서의 책임문제, 기지촌 성매매에 대한 미군의 책임문제를 보여주었다. 특별히 오늘날엔 한국, 필리핀, 미국인 중간업자들 때문에 필리핀여성들도 한국 기지촌에서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지적했다. 이외에도 한국의 여성과 아동들의 인권문제를 한국정부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도 보여주었다.  

나의 이런 작품이 대만과 미국에서 상을 받게 되어서 기쁘다. 나는 이 영화 속에서 문제제기에 관계된 분들과 직접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내게도 아주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특히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를 대만에서 상영한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대만과 한국은 둘 다 일본의 식민지였고 두 나라 여성들이 모두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갔던 역사 때문에 대만인들도 많은 관심을 보인 것 같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도 상영되었는데 영화를 본 시청자들은 우리 제작진들과 대화하면서 미국의 외교정책이 얼마나 폭력적 결과를 초래했는지 이 영화를 통해서 깨달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별히 많은 젊은 미국학생들은 현재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고 그래서 그런지 한국 기지촌 역사에 대해 충격과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기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 희생당한 여성들이자 한국의 서민들"

제인 진 케이슨.
 제인 진 케이슨.
ⓒ 제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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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부모를 처음 만났을 때, 희비가 엇갈린 복잡한 감정을 가졌을 것 같다. 친부모와 너무나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서 언어와 문화적으로도 괴리감이 깊었을 것이다. 어떻게 친부모를 찾을 수 있었나? 얼마나 자주 만나나?"2001년 친부모를 처음 만나고 두 번째는 2004년에 만났다. 최근 세 번째로 만났고 총 지금까지 친부모와 함께 보낸 시간은 3개월 정도 된다. 친부모를 찾는 과정은 정말 길었다. 친부모와의 재회는 나와 친부모가족 모두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아픔과 슬픔이 많았고 이것이 치료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친부모를 만나고 그분들에 대해 알게 되어서 너무 좋다. 친부모와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아주 긍정적인 경험이었고, 지금 나는 친부모와 감정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내가 친부모와 처음 만났을 때는 21살이었다. 도와준 단체는 한국사회봉사회(Korea Social Service)와 해외입양연대(GOAL: Global Overseas Adoptees' Link)였다. 그때 나는 해외입양된 후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거의 백지상태였다. 지금 나는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있고 마음도 더 친숙하다. 그 결과로 친부모님과 나와의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나는 계속해서 친부모와 만나고 싶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 친부모를 만나고 난 후 가장 크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친부모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의식, 정체성, 소속감을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이제 단지 덴마크 사람만이 아니다. 나는 한국과 연결된 것을 느낀다. 아직 말로 잘 표현할 수 없지만 나는 지금도 매순간 한국사회를 좀 더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자아나 정체성은 단수가 아니라 생각한다. 지금 나는 덴마크 사람이며, 또한 한국 입양인이고, 한국친부모의 딸이며 한국형제들의 자매다. 다른 나라의 역사도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나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덴마크 외에도 미국에서 4년을 공부했고, 내 남편은 유대인과 중국계 혼혈 미국인이다. 나는 예술가(영화제작자)로서 중국, 인도네시아. 홍콩, 칠레에서 일해 왔다. 이러한 경험이 세계에 대한 나의 시각과 나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2001년 처음 한국에 온 이래 나는 내 개인사뿐 아니라 한국역사에 대해 점점 관심이 늘어갔다. 입양인으로서 나는 한국사회 많은 소수자들과 나를 관련지어 생각한다. 그분들은 소외된 자, 아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 가부장적 한국사회 구조 속에서 희생당한 여성들, 외국이민자들, 한국의 서민들이다.

나는 또한 다른 나라의 해외 입양인들과 다양한 연대 활동에 참여하는 데 그러한 경험은 아주 매혹적이다. 그들과 함께 예술 활동, 글쓰기, 연구, 입양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한다. 입양인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나라와 문화, 가족 형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입양에 대한 경험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입양기관들이 입양인들에게 알려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종종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는 국제입양인 연대 같은 것이 생겨서 한국의 여러 단체와 더불어 더욱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조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난 전형적 덴마크인도 아니고 전형적 한국인도 아니다"

제인 진 케이슨.
 제인 진 케이슨.
ⓒ 제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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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부모님 고향이 제주도이고, 제주4·3항쟁 중 제주도에 사셨다. 특히 친할아버지가 제주4·3항쟁에 대한 책을 쓰셨다는데?"2001년 처음 제주도에 갔을 때 나는 4·3항쟁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서구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한국전쟁 등 한국역사에 관한 문헌들도 단지 서구인들의 관점에서만 보았다. 최근에야 내 친부모님들의 고향인 제주도에 어떤 비극적인 폭력의 역사가 있었는지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친할아버지가 쓰신 책을 최근 발견했고, 내 한국 가족의 역사를 더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로 쓰인 할아버지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지금 추진 중이다. 할아버지는 책에서 4·3항쟁 당시 자신의 삶에 대해 기록했다. 할아버지 책을 통해서 나는 모든 제주도민이 4·3항쟁을 통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제주4·3항쟁의 역사는 한국역사에서 그동안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너무 이념적 잣대로 취급당한 것 같다. 수많은 무죄한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는데도 너무나 오랫동안 공산 폭동으로 사건을 규정짓는다. 한국전쟁 전인 1948년 미군정 하에서 4·3항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미군도 그 잔인한 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가와 영화제작자로서 나는 제주 4·3항쟁 역사의 중요성과 진실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고 그것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치료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입양인으로 자라난 나는 내가 역사 없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제주4·3항쟁과 그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미시적으로는 단지 나 자신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이지만 거시적으로는 나와 한국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들이 속했던 한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이다.

나는 예술가이자 영화제작자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통해서 제주4·3항쟁 당시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고 그 상처를 치료해 드리고 싶다. 해외입양의 역사(과거사)도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되거나 사회에서 금기시 되어왔는데 공정하고 민주적인 현재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어두운 과거사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예술이 당신 삶에 주는 의미는? 작품 활동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나?
"예술은 내 삶에 아주 중요하다. 예술을 통해 나의 생각과 느낌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작품 활동을 통해 나의 주관성을 사회, 문화, 정치, 역사적 틀 안에서 혹은 그 틀을 넘어서 실험해 본다. 영화, 비디오, 행위 예술을 통해서 나는 종종 역사적, 심리적, 문화적 시각을 담은 다층적인 줄거리를 보여준다.

예술은 단지 장식적, 기능적이거나 상업적인 것이 아니다. 예술을 통해 사회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폭넓은 대중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동안 금기시 되었거나 논쟁거리였던 주제에 대해 예술작품화 함으로써 나는 대중들과 의미 있는 대화와 소통을 시도한다. 예를 들면, 나의 작품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에서도 나는 해외입양아문제를 그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군사주의와 가부장제도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생된 구조적인 문제로 조망했다."

- 청소년기 자신이 입양아인 것을 알고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그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지금 자신을 덴마크인, 한국인 아니면 세계시민으로 보나?
"나는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나는 전형적 덴마크인도 아니고 전형적 한국인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또 덴마크문화와 한국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나를 단지 어느 한 국가에 속한 사람보다 세계시민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국경을 넘어선 해외입양문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해외입양인들은 국제적 입양을 통해 일반인들보다 다국적 시각을 갖게 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입양의 근본 이유가 종종 아주 비극적이고 슬픈 가족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해외입양에 대해서는 회의적 입장이다."

"입양... 고통, 트라우마 엄청나게 크다는 것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The Woman, the Orphan, and the Tiger)>.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 고아 그리고 호랑이(The Woman, the Orphan, and the Tiger)>.
ⓒ 제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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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와 한국의 아주 다른 점 몇 가지를 이야기하면?
"두 나라의 복지제도가 너무 다르다. 덴마크는 오랜 사회복지의 모델을 갖고 있고 그 복지제도를 통해 국민들이 확실하게 그 혜택을 누리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덴마크에서는 대학교까지를 포함한 모든 교육이 전 국민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그리고 사회복지가 미혼모, 노인, 장애인들에게 특히 많이 제공된다. 또 한국과 비교해서 남녀가 성적으로 아주 차별이 없는 사회다.

한국이 지난 몇십 년 동안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양극화 등 부작용 문제도 많다. 민주사회는 경제적 발전뿐 아니라 적절한 인권보장과 빈부의 격차 없이(유전무죄나 무전유죄 말고), 외국인 근로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해 보편적 평등이 보장된 사회이어야 한다." 

- 어떤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고아로 어렵게 자라는 것보다 좋은 나라로 해외입양을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아이들이 서구에만 가면 자동적으로 훨씬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과거에는 특히 해외입양아들이 서구에서 보다 낳은 경제적 혜택과 교육적 기회를 누릴 수 있었으니까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원래 문화를 잃어버리고 친부모나 가족사에 대한 뿌리 없이 자랄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의 고통이나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도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자기 자녀에 대한 애정과 열성은 세계최고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낳은 자식에 대해서만 애정을 쏟고 남이 낳은 아이들은 해외입양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편부모 가정에 대해서도 사회적 편견을 버리고 사회복지와 법적제도를 통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사회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위한 인권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와 기준도 변해야 한다. 즉 성적으로 남녀 간에 더 평등해지고 미혼모와 혼혈아 등에 대해서도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입양인으로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다른 입양인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나?
"서구와 한국 둘 다에서 고통스런 경험이 있었다. 내가 해외입양아 출신이기 때문에 두 문화에 다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덴마크인들은 내가 100% 덴마크인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입양의 과거를 지워버리고 전적으로 덴마크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는 혈연이 지금도 중요하기 때문에 입양인들은 종종 동정의 대상이나 가문이 의심스럽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종종 입양인들은 마치 어린아이나 외국인으로 대우받는다. 해외입양인들의 활동이 예술, 학문 등 사회 전 분야에 활발하게 성장하는 것과 더불어 서구와 한국에서 우리의 다면적인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 주기를 희망한다."


태그:#입양, #최고은, #복지, #인권, #김성수, #제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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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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